• '기륭산성' 앞 투쟁 1032일째
        2008년 06월 21일 03:1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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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민적 관심을 받으며 광화문 촛불이 타오르는 동안 구로공단 기륭전자 앞에도 40여일째 촛불이 켜져 있다. 광화문 사거리에 ‘명박산성’ 이 있다면, 기륭전자 철문 뒤에는 ‘기륭산성’ 이 있다. 각종 철기둥과 쇠못, 자물쇠 등으로 고정된 기륭전자 철문이 3년만에 밧줄과 해머에 뜯겨 처음으로 길바닥 위에 내동댕이 쳐졌다.

       
      ▲사진=김은성 기자.
     

    하지만 육중한 철문 뒤에는 ‘ㄴ’ 자로 막아선 전경차와 빽빽하게 들어선 전경들이 기륭 노동자들과 기륭전자 사이를 가로 막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집단 무기한 단식에 돌입한 지 열흘이 되는 20일. 단식으로 인해 기력이 떨어진  기륭 노동자들은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는 담담한 표정으로 ‘기륭산성’을 지켜봤다.

    기륭전자 앞을 지키느라 광화문 촛불에 참석하지 못하는 기륭 노동자들은 이날 여느 시민들처럼 ‘기륭산성’에 ‘투쟁의 끝은 정규직화’,’ ‘우리 자식에게는 비정규직을 물려줄 수 없다’, ‘비정규직 양산하는 이명박은 해고다’ 등의 글귀를 적는 것으로 그간의 답답함을 달랬다.

    금속노조 총력 진격은 … 180명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삶’이어서, 삶을 전부 걸 수밖에 없는 그녀들은 이날도 여전히 투쟁의 정당함에서 오는 ‘자신감’과 ‘여유’를 잃지 않았다. 이날은 금속노조의 총력 결의대회 겸 진격 투쟁이 예정돼 있던 날이었다.

    하지만 모인 인원은 180여 명 남짓에 불과했다. 지난 18일부터 기륭 노동자와 동조단식에 들어간 금속노조 김현미 서울지부장은 연대사에 앞서 "기륭전자 앞이 금속 노동자들로 많이 웅성거릴 줄 알았는데, 너무 조촐해서 미안하다"고 기륭노동자들에게 사과했다.

    김씨는 "이게 우리 실력이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시작하자"면서 "기륭 투쟁을 해결해 우리 사회 비정규직 문제를 알려내자"고 말했다.

    이에 3m 높이의 기륭 전자 경비실 위에 임시 천막을 치고 농성 중인 기륭전자 김소연 분회장은 "오늘 투쟁이 힘있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참가한 분들을 보니 투쟁 사업장들의 동지들이 많이 모였다"면서 "비정규직은 기륭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기륭 노동자들은 또 이날 호소문을 통해 "이땅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난 4년 동안 뼈저리게 느꼈다"면서, "전국을 뒤덮고 있는 촛불이 사회를 바로잡는 불길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며 희망을 본다. 이제 일터의 광우병인 비정규직을 끝장날때가 되었다"고 호소했다.

    이를 위해 기륭 노동자들은 투쟁한 지 1040일이 되는 오는 28일 시청 앞 광장에서 사회각계 인사 1040명과 집단 하루 동조 단식을 벌이고, 다음 달 4일부터 10일까지는 창덕궁 앞 눈 갤러리에서 기륭비정규여성과 비정규장투사업장 투쟁기금 마련을 위한 연대 미술전을 개최키로 했다.

    나무판자, 스티로폼, 요가 매트를 방바닥으로 삼고 비닐과 그물망을 벽으로 삼은 기륭 경비실 위 임시 천막은 행여 바람불면 날아갈 듯 위태로운 그 자태가 비정규직의 처지와 흡사했다.

    임시 천막에는 김소연 분회장과 다른 노동자 2명이 함께 아래로 내려가지 않은 채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이 입고 있는 햐안 옷의 의미는 해결되지 않으면 여기서 죽겠다는 결의를 뜻한다.

    농성자 흰 옷의 의미

    먹을 거리라고는 물과 구은 소금이 전부.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흘러내리는 끈끈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단식으로 인한 저체온증으로 추위를 느끼는 조합원들은 밤이 되면 전기 장판을 틀고 이불로 몸을 감싸야 간신히 잠이 든다. 모기와의 혈투, 장마로 인한 끈덕끈덕한 습기도 이들의 진을 뺀다.

    무엇보다도 가장 힘든 건 화장실 문제이다. 임시 천막 뒤로는 아이들 휴대용 변기를 나무 판넬로 감싼 임시 화장실이 있다. 단식을 하느라 씻지도 못하는 판국에 더운 날씨로 인한 화장실 냄새까지 뒤집어 써야 한다.

    그러다 보니 화장실에 덜 가기 위해 그나마 먹는 물과 소금을 줄이고, 또 생리현상을 일부러 참기도 한다. 임시 천막 옆에는 사측이 오래 전 설치한 철조망이 시멘트 바닥에 심어져 있다. 한 조합원은 단식으로 인한 현기증으로 혼자 철조망 쪽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손가락과 발가락이 철조망에 찔려 깊이 상처를 입은 상태이다.

       
     
     

    경비실 아래 컨테이너 박스에서 단식을 함께 하고 있는 7명의 조합원들 사정도 힘든 건 마찬가지. 단식을 하면 잠이라도 제대로 자야 하는데, 수시로 지나다니는 차와 사람들로 인해 깊은 잠에 드는 것이 불가능해 24시간 깨어있는 상태이다.  

    그러다 보니 신경이 날카로워져 될 수 있으면 서로 말을 아끼려고 한다. 7명 중  조합원 2명은 실신해 병원에 입원했으나 한 명은 퇴원후 다시 단식에 합류했으며,  한 명은 위염과 식도염으로 약물 치료를 받느라 단식을 포기하고 죽을 먹고 있다.

    게다가 기륭 노동자들은 이같은 상황이 알려져 행여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이를 숨기느라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에게조차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단식 사실 가족에게도 숨겨

    어떤 이는 일부러 부모님과 통화할때 목소리 톤을 한 옥타브 높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유독 먹는 것을 챙겨주시는 부모님의 요청을 거절하느라 애를 먹기도 한다. 어떤 이는 부모님이 보고 싶어 울기도 하고, 어떤 이는 무언가 먹는 꿈을 꾸다가 깜짝 놀라 깨어나고, 어떤 이는 외롭고 서러워 울고, 어떤 이는 날짜 자체를 아애 세지 않기로 했다.  

    이미영씨는 "지난 19일 민주노총 대대에 가서 투쟁을 호소하는데 서러워서 난생 처음 말하는데 눈물이 났다"며, "대의원 분들의 속 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날 현장 분위기나 대의원들의 눈빛이 우리 투쟁사를 일상적이고 으레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 서럽고 외로워 많이 울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조합원은 6.10일 광화문 촛불 집회 행진에 참여했다가, 행진에 동참했던 한 시민이 시청 앞에 세워진 다른 비정규직 사업장의 텐트를 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향해 욕하는 것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자신감’을 잃지 않는 이유는 노동자들의 ‘연대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윤종희씨는 "천일이 지나면서 언론과 다른 사업장 등에서 많은 관심을 가져 오히려 초반보다 덜 외롭다"면서 "함께 연대하는 많은 동지들이 우리를 그냥 죽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고 또박 또박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윤씨는 "쉽지는 않겠지만 이제는 광화문의 촛불이 비정규직 투쟁과 이어질 수 있도록 조직된 노동자들과 민주노총이 가교 역할을 해야할 때"라고 당부했다.

    저녁이 되고 이젠 밥 대신 일상이 되버린 촛불 문화제를 위해 투쟁 사업장에서 찾아오는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기륭전자 앞에 삼삼오오 모여 앉자 기륭전자에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무심히 지나가는 기륭 노동자들이 하나 둘 퇴근 길에 나섰다.

    두 개의 상반된 저녁 풍경이 교차하는 가운데, 기륭 노동자들은 ‘노동자 연대’에 대한 믿음을 노래하며 촛불을 들고 투쟁 1032일째 되는 밤을 밝히기 시작했다.

    한편, 배영훈 기륭전자 사장은 이날 <프레시안>과 인터뷰를 통해 "직원들의 반대가 너무 심해 현재로서는 그들을 고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고 밝혔다. 이같은 사측의 태도로 21일 오전 11시 노조와의 면담이 예정돼 있지만, 사측과 접점을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기륭전자는 지난 17일 <한겨레>, <조선일보> 등을 통해 "기륭전자는 단 한 사람도 부당해고를 당한 적이 없다"며 "기륭노조가 극단적 불법시위와 거짓 주장을 하고 있다"고 지면 광고를 실어 물의를 빚은 바 있다.

    지난 14일에는 김소연 분회장 등이 인권위에 진정을 내 “단순히 힘쓰는 일을 했다고 남성에게 임금을 더 주는 것은 성차별”이라며 낸 최초의 손해배상 권고가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져 비정규직 무더기 해고 사업장의 상징이 된데 이어 ‘성차별 기업’이라는 오명을 하나 더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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