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좌파연합정당 고민해야 할 때
    2008년 06월 20일 06: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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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는 2007년 12월 대선 이후 승승장구할 것으로 보였던 이명박 정부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촛불시위는 기존의 여러 정치적・사회적 세력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고 모두에게 성찰적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급진세력들도 예외는 아니다. 급진적 정치・사회세력이 어떻게 촛불시위로 표현된 대중의 역동성과 결합하고 그것을 선도할 것인지하는 고민에 직면해 있다.

모두를 성찰하게 만든 촛불시위

촛불시위는 한국사회에 잠재적(潛在的)으로 내재하고 있었던 경향들을 전면에 드러냈는데 그 중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중도자유주의정당의 리더십이 현저하게 약화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87년 이후 민주개혁을 추동하는데 있어서의 제도권 구심점 역할을 했던 중도자유주의(liberal. 리버럴) 정당은 신민당, 민주당, 열린우리당 등 다양한 당명을 가졌다.

정당은 일정하게 사회적 기반 혹은 사회적 리더십을 갖는다. 그러나 사회의 급진화 혹은 변화 속에서 정당의 사회적 기반이나 리더십이 균열되게 되고, 여기서 정당 간의 새로운 각축을 위한 공간이 발생하게 된다. 현재가 바로 그러한 국면이다.

즉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흐름에 서 있었던, 그리고 90년대 이후 민주개혁을 위한 투쟁과정에서 일정한 선도적 역할을 해왔던, 중도자유주의정당의 사회적 기반과 리더십이 현저하게 약화되고 있다. 촛불시위 과정에서 이들은 심지어 야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내가 이 글에서 토론의 의제로 부각시켜 보고자 하는 것은, 기성 정당들의 사회적 리더십이 현저하게 약화되는 이 국면에서 그것을 대체하는 새로운 급진적・좌파적인 정치적 리더쉽을 어떻게 대중들에게 가시화시켜 낼 것인가 하는 점이다.

급진적-좌파적인 새로운 정치 리더십

87년 이후의 정치변동을 돌이켜보면, 중도자유주의정당은 자신들의 사회적 기반과 리더십이 균열되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혁신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을 통해서 정치적 리더십을 유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김대중은 재야 수혈이나 합당을 통하여 이러한 위기적 상황에 응전하곤 했다. 현재 통합민주당의 경우 이러한 자기 혁신을 선도할 수 있는 내부적인 중심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상당 기간 이러한 현상이 지속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도, 중도자유주의세력의 정치적 리더십의 균열 상황에 급진진보세력이나 좌파세력이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 하는 것은 당분간 회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될 것이다.

나는 2008년 2월 3일 분당이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현재와는 상당히 다른 상황이 나타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2월 3일 분당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분당을 ‘분화(分化)’로 받아들이고 분화의 기초 위에서 최선의 결과를 나오도록 하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토론주제로서, 민주노동당을 제외한 급진진보세력 및 좌파세력들이-서로간의 소이(小異)를 인정하면서도 대동(大同)연합하는-‘범좌파 연합정당’ 혹은 범PD연합정당(정치연합)‘의 필요성을 제기해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는 급진진보세력이나 좌파세력 내부의 세세한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편한 위치를 활용하여 ‘무식하니까 용감하게’ 토론주제를 제기해보고자 한다.

범좌파 연합정당이 중요한 이유

현재 가까운 시기에 총선이 없기 때문에 제도적인 형태로 리더십의 교체가 나타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중적 촛불시위라는 조건 속에서, 혹은 앞으로 확산될 다양한 투쟁 속에서, 정치적 구심역할을 할 대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차적으로 대중적 투쟁 속에서 사회적 리더십을 갖는 급진진보적 정치의 구심을 형성해내고, 이러한 구심이 대중적 기반을 확대함으로써 향후 선거에서 유력한 원내정당으로 진입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처럼 범좌파연합정당 혹은 범PD 연합정당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해방 이후 남한의 천민적 자본주의와 종속적 파시즘에 대결하면서 성장해온 ‘신좌파적’-혹은 PD적-운동이 ‘누란(累卵)’의 위기에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에서 진보신당은 향후 4년 동안 ‘원외정당’으로서의 외로운 고투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80년대 식의 사회구성체논쟁적 흐름에서 보면, NL(민족해방파)은 일제하 반제민족해방운동의 전통으로부터 유래하는 ‘구’좌파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PD(민중민주파)는 신식민지 자본주의와 종속적 파시즘에 저항하면서 성장해온 ‘신’좌파적 흐름을 상징하고 있다.

80년 광주항쟁 이후 파시즘적 독재에 대한 대중적 저항의 확산 과정에서 이러한 구좌파적 전통과 신좌파적 전통이 ‘정파(政派)’라는 형태로 복원되었으며, 이 두가지 전통은 민주노총으로 상징되는 노동자 대중운동과 민주노동당으로 상징되는 노동자 정치운동 속에서 연합하는 형태로 발전해왔다. 분당 혹은 분화는 바로 노동자 정치운동 속에서 이들이 두 가지 상이한 정당으로 분립되었음을 의미한다.

‘강기갑적 이미지’의 한계

민주노동당은 민노당대로 자기발전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고 그렇게 될 것이다. NL로 상징되는 구좌파적 전통은 새로운 좌파적 요소를 자기화하는 형태로, 촛불시위와 같은 이러한 새로운 역동성을 자기화하는 노력을 진행할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강기갑적 이미지’로 이러한 대중들의 새로운 열기와 지향을 담아내기 어려운 공백이 대단히 크게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지난 번 대선평가에서도 ‘시장근본주의(market fundamentalism)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동하는 이명박 정부는 역설적으로 ‘평등파적(PD적) 의제’가 부각되는 시대를 열 것이고, 그렇게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PD적 세력의 대약진의 시기가 되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정작 현재-‘분화’를 주체적으로 선택함으로 인하여-PD적 좌파의 전통에 중대한 도전적 상황이 조성되고 있다. 신식민지 자본주의와 파시즘에 저항하면서 성장해온 신좌파적 전통(PD적 좌파)이 노동자정치운동의 전통 속에서 약화된다면, 이는 해방 이후 좌파적 운동의 한 축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둘째, 현재는 계급적・사회적 투쟁전선의 재구성 과정에 있고 이 과정의 역동성을 전유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나는, 반독재 중도자유주의정당(정치세력)의 리더십의 균열은 거시적인 맥락에서는 87년 이후 우리사회의 지배적인 대립구도인 ‘독재 대 반독재’ 혹은 ‘(민주)개혁 대 반개혁’의 구도가 퇴조하는데 따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독재-반독재에서 보수-진보 구도로

이명박 정부의 성립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전기라고 생각된다. 이명박 정부의 성립은 이제 80년대 이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독재 대 반독재’ 그것을 계승하는 ‘(민주)개혁 대 반개혁’의 시대가 종결되고 이제 포스트-‘개혁 대 반개혁’의 시대가 출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80~90년대적 표현으로 하면 ‘독재 대 반독재의 구도’로부터 ‘보수 대 진보’의 구도로 이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돌이켜 보면 80년대 이후 ‘독재 대 반독재’의 구도로부터 ‘보수 대 진보’로의 구도로의 이행을 빈번히 ‘당위적으로’ 이야기해왔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전환이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국면이다.

중도자유주의정당의 주변화는 바로 이러한 변화를 상징한다. 중도자유주의정당은 ‘독재 대 반독재의 구도’나 ‘개혁 대 반개혁의 구도’가 강력하게 존재하는 상황에서 정치적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었다. ‘비판적 지지’도 그러한 맥락에서 가능했다.

그러나 지배의 변화(‘시장근본주의’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동하는 이명박 정부의 출현)와 저항의 변화(촛불시위 등)는 지난 20여년을 지속해온 계급적・사회적 투쟁전선의 변화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촛불시위가 한편에서는 보수 정당의 위기이면서 그것의 대척점에 있는 중도자유주의정당의 리더십 위기를 동시에 동반하고 있는 현실은 ‘사회적’ 수준에서의 역동성이 ‘정치적’ 수준에서의 역동성의 공간을 새롭게 제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보적 리더십 공간 확장됐으나 주체 역량은 축소

문제는 포스트-‘독재 대 반독재’ 시대의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의 재구성 과정에서 급진진보세력이나 좌파세력이 얼마나 능동적으로 개입할 것인가하는 점이다. 여기서 진보정당의 ‘사회적 리더십’의 공간이 확장되고 있는데 민주노동당의 분화 이후 주체적 역량은 오히려 축소되어 있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급진진보세력 및 좌파세력들의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작년 초 진보 논쟁에서부터 ‘제도정치 중심주의’적 관점을 넘어서서 ‘사회중심주의적’인 관점에서 제도정치를 접근해야 함을 강조한 바 있다. 제도화된 정치는 넓은 의미의 ‘사회적 정치’의 일부이며, 그렇기 때문에 정치의 중심은 제도화된 정치만이 아니다.

국가와 자본이 ‘비(非)정치’로 규정한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민중들의 진정한 사회적 정치일 수 있다. 촛불시위가 바로 정치의 장이 유일하게 제도정치만이 아님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우리는 제도화된 정치와 급진적 사회적 정치의 새로운 결합모델을 고민해야 한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는 직접행동 정치와 제도화된 정치의 이원적인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것을 알 수 있고, 우리는 한국민주주의를 두 트랙(two track) 속에서 바라보고 발전시켜 가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직접행동 정치의 역동성으로 출현한 제도정치 내의 공간을 누가 전유하고 획득할 것인가, 그 공간을 어떻게 구조화하는가에는 주체적 응전의 문제가 개재된다.

‘독재 대 반독재’ 및 ‘개혁 대 반개혁’ 구도로부터 또다른 구도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사회적 투쟁의 효과로 현재 제도화된 정치영역에서의 공백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한 공백을 급진적으로 전유하기 위해서 해방 이후의 광의의 신좌파적 흐름들이 정치운동 속에서 연합하는 범좌파연합정당 혹은 범PD연합정당이 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분당 또는 분화의 장점

나는 분당이나 분화가 이른바 ‘경쟁’의 장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복수의 진보정당들의 경쟁은 경쟁 당사자들로 하여금 경우에 따라서는 더 큰 혁신과 자기발전 노력을 촉발할 수도 있다. 민주노동당은 민노당 대로 위협적인 경쟁자가 존재하는-과거에는 보수적・중도자유주의적 정당이 경쟁정당이었는데 이제 경쟁적 진보정당이 존재하는-구도는 자기혁신 노력에 오히려 약(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반대 축이라고 할 수 있는-범PD적 전통을 잇는 진보정당의 정치적 전열이 약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물론 현존하는 제도화된 정치의 장에 진입하지 않고 급진적 민중정치를 지향하는 경우는 논외로 하자. 단지 제도화된 정치의 장에 진입하고자 하는 급진세력 혹은 좌파세력들의 경우에는 연합전략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급진보 혹은 좌파진영 내의 여러 집단들이 스스로의 기득권을 모두 버리고 적극적으로 범좌파연합정당 혹은 범PD연합정당을 만들기 위한 과제를 토론에 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진보신당은 자신들의 조직적 기득권이나 심상정・노회찬으로 상징되는 제도정치적 자산의 기득권에 안주하지 말고 대통합의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사회운동의 형태로 존재하는 좌파세력들은 진보신당에 대해서 사회민주주의라든가 개량적 성격을 운위하면서 대연합의 당위성을 거부해서는 않된다고 생각한다. ‘파이를 키워서 나누는’ ‘부르주아적’ 계산법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작은 기득권이나 위치에 안주하지 않고 위기적 상황에 연합해서 돌파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운동 형태로 존재하다가 제도정치에 진입하고자 하는 좌파세력들의 경우에는 진보신당적 대중성을 활용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며 스스로의 약진의 공간을 가질 수도 있다.

전진-노힘 토론 통한 연합 물꼬를

이를 위해서 ‘전진’이나 ‘노동자의 힘’ 같은 조직들만이라도 토론을 통해서 연합의 물꼬를 트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나는 기존의 운동과정 속에서 존재하는 감정적・이념적 갈등의 골을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편한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절박성을 절감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사실 현단계 급진진보적・좌파적 세력에의 진정한 도전은 좌파세력 내부의 각축이기보다는, 급진적 반(反)자본주의자들이 급진적 민주주의자, 급진적 생태주의자, 급진적 여성주의자, 급진적 공동체주의자, 급진적 자율주의자들과 어떻게 연합하고 협력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한 더큰 연합도 고민해야 하는 시대적 조건 속에서, 좌파세력 내부의 연합을 사고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된다. 비(非)맑스주의적 급진주의자와 맑스주의자들 간의 거리보다는, 맑스주의적 전통 혹은 노동급진주의 내에서의 차이가 적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80년대와는 다른 시각에서-여성주의에서 이야기하는-‘차이의 정치학’에 개방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범좌파 연합정당은 신자유주의적 불평등 시대의 대중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며 대중적 성장의 잠재력도 크다고 생각된다(조희연. 2008. “신자유주의적 불평등/신보수정권 시대의 ‘복합적 반신자유주의 정치’”. <진보평론> 35호. 여름호).

그리고 이 정당이-주체들의 합의가 있다면-사회주의나 좌파를 내걸어도 좋다고 생각된다. ‘반공규율사회’적 제약을 수용하는 바탕 위에서 언어선택을 하는 기조를 이제 돌파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생각된다.

이제 사회주의, 좌파 내걸어도 좋을 시대

‘독재 대 반독재의 구도’ 혹은 ‘개혁 대 반개혁의 구도’는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제약을 전제하는 구도였다. 그러나 이제 신자유주의 불평등 시대의 진보는 이러한 제약을 불가피하게 돌파하지 않으면 구현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단지 우리가 사회주의나 좌파의 내용성을 주어진 것으로 그리고 완료된 것으로 사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급진적・혁명적 투쟁노선으로서의 사회주의와 좌파의 내용성은 선명하지만, 포스트-자본주의적 대안사회에 대한 사회주의나 좌파의 내용성은 많은 부분 공백이며 향후의 이론적・정치적 실천을 통해서 채워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좌파들, 다양한 사회주의자들, 급진주의자들이 같은 배를 타지 못할 이유는 없다. 우리 모두가 인지하듯이,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현존 사회주의 붕괴 이후 시대에 사회주의나 좌파의 현실적 모습이 어떠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그리고 그 합리적 핵심을 어떻게 재설정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많은 부분 공백으로 남아 있다.

계획, 민주집중제, 심지어 피티독재 등도 그것을 견지하느냐 않느냐라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것을 견지한다고 하더라도 현존사회주의의 실패 이후 어떠한 새로운 의미에서인가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견지’ 자체는 신념 이상을 벗어날 수 없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기존의 지형 내에서의 정치사상적 차이를 전제로 연합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굳이 이전의 척도로 보면 나의 개인적 성향은 사회민주주의 좌파 혹은 유로코뮤니즘 우파 정도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에 우리는 좌파를 보다 폭넓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학자 보비오의 경우 좌파는 자유보다 평등을 중시하고, 우파는 평등보다 자유를 추구하는 지향으로 본다.

좌파가 불평등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며, 우파가 불평등을 존속시키려는 것은 아니지만, 인류를 평등하게 만들고 인류를 불평등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상이한 인식 방법에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좌파연합정당은 신자유주의 불평등 시대 대중요구

그런 점에서 좌파의 공적은 자유권을 넘어 사회권을 확인하고 찾아낸 것이며, 이것은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거대한 대립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에 꼭 동의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나는 좀 넓은 의미의 좌파들의 연합정당이 신자유주의 불평등 시대/신보수정권 시대에 대중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작 현시기 좌파에 제기되는 진정한 도전은 사회주의 프로젝트 자체의 새로운 인식 지평을 획득하는 것과 함께, 다양한 급진주의와 어떻게 만나고 자신의 정치적 해방의 프로젝트 속에서 그러한 급진주의적 기획을 내부화・접합(接合)할 것인가하는 점이다.

이 점은 인간다운 사회를 향한 민중들의 해방운동의 역사에서 사회주의나 맑스주의로 정의되지 않았던 운동들이 역할을 해왔음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진보신당이 내건 ‘평등, 생태, 평화, 사회연대’ 같은 가치들은 시의적절하다. 문제는 단순 절충이 아니라 기존의 좌파적 해방의 프로젝트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가치들과 운동들을 재설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범좌파연합정당 혹은 범PD연합정당(범평등주의연합정당)은 ‘혁신’ 정당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강조는 필자)

촛불시위는 시장절대주의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지향하는 이명박 정부 하에서 드러나는 다종다양한 새로운 저항성들의 한 사례일 뿐이라고 생각된다(극단적인 권력은 잠재적 저항성들을 현재화한다!). 향후 새로운 사회적 저항들에 대한 ‘사회적 리더십’을 급진주의자들과 좌파세력들이 갖기 위해서도, 그것을 기초로 ‘제도화된 정치’ 영역에서 급진주의의 확장을 위해서도 우리가 새로운 고민과 토론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 * *

* 이 글은 ‘참세상’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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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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