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계속 운동이다”
        2008년 06월 19일 07: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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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일 시국토론회에서 최장집 교수가 발표한 세 쪽 반짜리 글 「촛불집회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촛불집회에 대한 진단 뿐 아니라, 1987년 이래의 민주주의를 평가하고 미래 한국 사회를 여는 데 귀중한 가르침이다.

    “이번 촛불집회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시민들이 민주화라는 큰 얘기가 아니라, 그들의 실생활과 직결된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정책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라는 최 교수의 진단은 지금까지 나온 학자들의 촛불 인식 중 가장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운동이 자율적 결사체를 통해 시민사회를 활성화하는 데 몰두하는 반면, 제도정치 내에서 정당을 강화하는 데 무관심했던 결과 … 우를 범할 수도 있는 것이다”는 최 교수의 주장은 한국 진보정치의 발전 과정에서 경험적으로 확인된 진실로서, 반정치적 역량 소진에 몰두해온 가두분자들과 조합주의자들이 경청해야 한다.

    “삶의 조건을 반영하는 이익과 요구는 정당을 중심으로 한 자율적 결사체들을 통해 최대한 광범하게 정책과정에 투입되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은 촛불집회 이전이든 이후든 올바른 정치관일 것이다.

       
    ▲ 지난 16일 열린 시국토론회 모습 (사진=참여사회연구소)
     

    1. 촛불을 대의정치가 받아 안을 수 있는가?

    그런데 최 교수의 올바른 정치관이 촛불집회의 향방을 논하는 특정한 정국에도 그대로 적용돼야 할까? 지금 그런 주장은 어떤 의미일까?

    최장집 교수는 “무엇보다도 현대민주주의는 대의제민주주의라는 점이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며 ‘제도’에 대립되는 ‘운동’의 한계를 다섯 가지나 제기한다. 운동의 다섯 한계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하나의 정책이슈를 운동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할 때, 쇠고기수입협상 문제가 끝나면, 민영화, 교육 등 이슈가 출현할 때마다 시민들은 거리에 나설 수밖에 없고, 이명박 정부 임기 내내 한국의 민주주의는 국가와 운동 간의 충돌로 일관하게 된다.”

    이슈 때마다 거리로 나오는 것은 참 괴로운 노릇이다. 하지만 민영화나 교육 이슈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을 방법도 없고, 나오라거나 나오지 말라거나 사람들은 거리로 나올 것이 너무도 뻔하다.

    위 인용문의 핵심은 “이명박 정부 임기 내내 한국의 민주주의는 국가와 운동 간의 충돌” 부분으로 읽히는데, 글의 전체 맥락에서 유추하자면 최 교수는 ‘국가’ 또는 ‘대의제도’인 이명박 정부와 거리운동이 계속 충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그런데 촛불이 꺼지든 말든 이명박 정부의 위기는 계속될 것 같다. 조금 더 학구적으로 표현해보자면, 이명박의 임기 5년은 ‘항시적 위기 체제’쯤 되겠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의 안정화를 기하자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 최장집 교수의 목소리는 운동의 제약으로써만 실천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최장집 교수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의 새삼스러운 ‘제도정치’ 강조는 어떻게 에두르든 “슬슬 정리되고 있는 거 아닌가? 이제 정치권이 받아 안도록 하자”는 메시지로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진다. 진의가 무엇이든 그런 해석이나 수용이, 공적 장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커뮤니케이션의 상례다.

    2. 진보정당이 촛불운동의 대안인가?

       
    ▲ 이재영 기획위원
     

    지금 제도정치를 강조하는 진보학자들은 대개 진보정당을 촛불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진보정당 강화론에는 ‘누가, 언제, 어떻게’와 같은 구체성이 결여돼 있다. 나는 아래 다섯 가지 이유로, 현 정국에서 운동에 반정립되는 진보정당을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첫째, 어떤 제도, 누구의 대의정치인가? 이명박 대통령이라는 제도와 한나라당, 민주당의 대의정치임이 너무도 명약관화하고 전혀 불변임에도 그리로 가자고 제안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게는 돌아갈 대의정치 같은 게 아예 없지 않은가?

    지금 진보정치세력은 그들의 고향이었던 거리에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국회가 아니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거리에 국민의 눈길이 모이고 있다. 이 상황에서 ‘대의정치’는 유리한 싸움터를 버리고 불리한 싸움터로 들어서는 어리석은 짓이다.

    둘째, 결국 제도정치로 다시 수렴된다 할지라도 왜 하필 지금인가? 6월 10일 이후 촛불집회가 교착이나 하강에 접어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진보정당이 조직적 수습에 들어갈 만한 시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거리로 나서게 한 원인들, 거리운동의 동인이 의연히 남아 있으므로 언제 더 큰 불길로 치솟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제도정치에서의 일탈이 10년이나 20년마다 주기적으로 반복된다는 평론가들의 분석은 나름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런 사후적 정리는 일주일이나 한 분기를 주기로 정세를 예측하고 개입해야 하는 실천가들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다.

    진보정치세력의 관점에서 보자면 촛불집회와 같은 현상은 예측할 수 없는 부정기적 일탈이다. 지난 40여 일을 꿈도 꾸지 못했던, 우매한 진보정치세력에게는 늦게까지 남는 것이 가장 일찍 나오는 것일 수 있다.

    셋째, 촛불집회와 같은 대규모의 사회운동이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론이나 분위기가 아니라, 작더라도 만질 수 있는 구체화된 성취가 있어야 군중은 낙담하지 않는다. 이 측면에서 지금은 진보정치세력의 몇 되지 않는 장기인 용의주도함, 집중력과 촛불집회의 결합이 더욱 필요한 시기이다.

    넷째, 진보정치세력의 성장을 위해서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촛불집회에 가장 많은 그리고 진보정치세력에게 개방적인 사람들이 있다. 이런 기회를 빌어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만, 사실은 진보정치세력이 촛불시위자들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동안 진보정치세력은 스스로가 쳐둔 울타리 안에서 안주했고, 그런 고립이 최근의 무기력으로 귀결된 것이다. 촛불집회는 진보정당에게 진정으로 부족한 것이 의석 이전의 문제, 촛불시위자들이 가지고 있는 판단력과 용기라는 것을 보여줬다.

    다섯째, 늦게 들어간 사람이 늦게 나오는 게 세상 사는 도리다. 이리 재고 저리 살피느라 선두 역할을 못한 진보정치세력은 이제라도 끝까지 남아 후방을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최 교수의 말마따나 촛불집회가 그리고 진보정당이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면, 진보정당이 촛불을 지키는 것 역시 의미 있는 공적 과업이다.

    3. 시대에 편승하라

    정당들은 언제나 혼란을 두려워한다. 조직적 이성이고자 하는 정당은 당연하게도 논리적으로 해명되지 않는 문제, 자신이 계획하거나 주도하지 않는 상황을 꺼려한다. 그래서 사회주의 정치세력조차도 1848년 유럽 섬유노동자들의 파업, 파리꼼뮨, 20세기 초 러시아의 혁명들에 소극적이거나 적대적이었다.

    그런데 모든 혁명은 준비되고 추진되는 것일 뿐 아니라, 동시에 아노미다. 촛불집회 역시 생활과 문화에서 연성 혁명이면서, 동시에 정치에서의 연성 아노미다.

    풋내기 진보정당인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이 촛불집회를 ‘지도’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지도능력이 없다면 1848년과 1871년에 지혜로운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민에게 편승하면 된다.

    촛불의 내일에 노심초사하지 말자. 가라앉는 것을 두려워 말자. 떠오른 무엇이든 가라앉을 운명이 물질세계 철의 법칙이다.

    이기지 못해 안달하지도 말자. 당장 이길 힘이 없으면 상대를 흔들어 놓는 것도 훌륭한 방책이다. 모든 것을 가진 이명박 정부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진보정당이 충돌했을 때, 잃는 쪽은 언제나 이명박일 수밖에 없다.

    대통령 퇴진을 외치는 정치 시위를 ‘직접민주주의’라고 아전인수로 평하는 것은 지식인 관념의 넋두리이고, 이번 기회에 현재의 민주주의를 넘는 어떤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모든 정국에 강령을 갖다붙이는 운동권의 버릇이다. 한편, ‘제도정치가 중요하다.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단순 반복은 구체적 정세와 현실 주체를 묻어버린 일반론일 뿐이다.

    현실에서 ‘제도’와 ‘운동’이 다른 영역에서 현상하므로 양자를 나누는 패러다임을 쓰는 것은 일면 타당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제도는 운동의 귀착이거나 중간점이고, 운동은 제도의 생산자이며 동시에 파괴자이다. 정치는 제도를 지향하는 운동이고, 운동하는 제도이다.

    나는 으레껏 거의 폭력적으로 진보정당을 되뇌어 왔다. 그리고 여전히 ‘결론은 정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진보정치의 제도화를 위한 ‘계속 운동’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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