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당할 때의 각오를 벌써 잊었는가?
        2008년 06월 12일 01:1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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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4일 진보신당은 7차 확대운영위원회를 열고 ‘제2창당’과 관련하여 ‘진보신당연대회의가 제2창당을 준비하는 조직’임을 명확히 하고, 이를 위한 5가지의 실천과제를 확정했다.

    7차 확대운영위 결과 유삼

    10년 가까이 사회당이라는 진보정당에서 일했던 나는 이번 진보신당의 확대운영위원회 결과에 관심이 많았지만 공식 결과보고만으로는 그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회의 의사록이 공개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의사록을 구할 수 없는 나로서는 관련 기사를 참조할 수밖에 없었다.

    <레디앙>은 진보신당의 이번 7차 확대운영위원회 결과와 관련한 기사의 헤드라인을 ‘진보신당 틀 유지 제2차당 추진’으로 뽑았다. 기사를 보면 ‘진보신당연대회의를 창당준비주체로 규정하며’ ‘진보신당연대회의의 틀을 유지하면서’ 제2창당을 진행한다는 것이 이번 결정의 핵심이다.

    그리고 ‘‘재창당’, ‘제2창당’, ‘진보정치 재구성’ 등의 용어혼재를 방지하기 위하여 ‘제2창당’으로 단어를 통일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런 용어정리가 강령, 당헌, 당규를 만드는 등 진보신당의 내용적 창당을 ‘제2창당’이라 부르고, 총선전 창당에 함께하지 못한 진보세력을 새롭게 규합하는 것을 ‘재창당’이라고 부른 장석준님의 개념규정에 근거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논의 결과는 결국 현재의 진보신당의 틀을 유지한 채 진보신당을 중심으로 제2창당을 추진하겠다는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기득권에 안주하는 진보신당의 결정

    나는 이런 진보신당의 결정을 보며 총선 후 진보신당의 진보정치 재구성 논의가 지지부진해질 때 가졌던 우려, 지금의 진보신당을 만든 분들이 민주노동당을 탈당할 때의 비장한 각오는 사라지고 어느새 기득권에 안주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현실화되는 것같아 실망스럽다.

    눈을 씻고 보아도 이번 결정은 민주노동당 탈당과 진보신당 창당의 가장 큰 명분이었던 ‘진보정치의 혁신과 재구성’의 문제의식은 사라지고 진보신당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연합 수준의 ‘제2창당’이 그 자리에 들어선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진보신당 지도부는 진보정치 10년에 대한 평가 등 내용도 준비하고 연석회의를 진행하는 등 외부 세력과의 논의도 충분히 전개할 것이라고 이야기할지 모른다. 물론 내용도, 여러 진보세력과의 대화도 중요하다. 특히 진보정치 10년에 대한 평가는 이후 진보운동 전반의 진로에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가를 단순히 학자와 외부전문가 등으로 평가위원회를 구성하여 평가서를 내는 것으로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치운동에 대한 가장 강력한 대중적 평가는 지금 진보신당을 주도하고 있는 분들의 탈당과 진보신당 창당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대중의 참여에 기반을 둔 논의와 평가가 이루어 졌다. 솔직히 전문가와 외부 평가위원 등으로 구성된 평가위원회가 이때의 평가를 넘어서는 의미있고 역동적인 평가를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연석회의 제안’ 등 연대 논의 또한 ‘제2창당에 함께 할 수 있는 개인 세력 조직을 규합하고 단결하기 위한 기획’이겠지만 기존의 정파연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활력을 창출할 수 있는 방법과 방향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는 한 상층연대를 넘어서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무미건조한 평가와 상층연대 중심의 논의를 통해 이룩할 수 있는 것은 말 그대로 현재 진보신당연대회의의 확대재편일 뿐이다. 이 과정에서 진보정치의 혁신과 이를 통한 재구성을 바라는, 진보신당 창당 초기에 가장 주요한 에너지를 제공했던 당원들의 자발적인 참여 열기는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대중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과정 자체에 주목해야

    내용도 외부세력과의 연대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면, 무엇이 해법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이런 내용과 연대를 추진해가는 ‘과정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보신당의 창당과정이나 지금의 촛불집회 등은 대중들의 역동적 참여 그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 운동 동력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사례는 결과만을 바라보며 일을 진행하는 것보다 이를 추구하는 과정 자체에서부터 당원들과 대중들의 참여를 고양하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준다.

    이렇게 보면, 진보신당 지도부가 구상하고 있는 평가위원회 구성과 연석회의 구성은 중앙에서 평가내용을 만들고 이를 당원들에게 돌리는 방식, 정파 지도부들의 협상에 의해 연대를 추진하는 방식으로 대중의 참여를 가로막고 관료화를 촉진하는 것으로 이미 ‘검증’된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진보정치의 혁신도, 재구성도 요원한 일이다.

    기득권의 포기가 선행조건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진보정치의 혁신과 재구성을 바라며,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동의하는 개인들이 지역과 부분에서부터 자유롭게 소통하고 연대하며 이 과정에서 진보정치 10년도 평가하고, 새로운 진보정당의 강령과 지향도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과정을 밟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로부터 일방통행식으로 논의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창당부터 아래로부터 개인들의 참여를 최대한 보장하고, 참여의 성과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진보정치의 혁신과 재구성, 새로운 진보정당 창당에 동의하는 개인들이 지역에서부터 모여 동-면, 시-군-구, 부문별로 자발적인 모임을 만든다. 이 모임은 지역과 부문에서 진보정치의 평가와 혁신,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의 활동 방향 등을 토론하고 준비한다.

    이 때 중앙은 창당을 위해 토론해야할 필수 토론과제의 목록만을 제시하고, 그 내용은 전적으로 구성원들의 토론에 맡긴다. 지역과 부문에서는 새로운 진보정치의 모형을 실험하고 갑론을박하면서 점차 자신들의 의견을 몇 개의 안으로 좁혀간다.

    이 과정에서 안들은 지지자들의 정치적 결단에 따라 통합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최종 결과가 창당대회에 상정된다. 이렇게 대중의 참여를 통해 사업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하면서 참가자들의 의사가 아래로부터 형성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은 새로운 인물과 지도력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할 것인데, 이런 논의를 모아 창당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정치력을 발휘하는 동지들이 운동의 새로운 지도력을 형성하며 새로운 정당을 대표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새롭게 면모를 일신하며 적극적인 참여와 소통속에 새로운 정당을 건설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전체에서 중앙과 지도부간의 협상은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한다. 이렇게 해야 대중속에서 철저한 혁신과 재구성이 가능하고, 기존 관행이 과감히 혁파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대중의 참여와 새로운 운동기반의 형성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렇게 창당과정을 밟아가기 위해서 진보신당, 사회당, 초록정치, 노건추 등등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이 현재의 틀을 넘어 자유롭게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무엇보다 현재의 틀이 허물어져야 하고, 그 제1조건은 기존 기득권의 포기일 것이다.

    민주노동당 탈당 때의 각오를 되새겨야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재의 잡다한 경계와 관행을 과감하게 혁파할 필요가 있다. 진보신당, 사회당, 초록정치세력, 노건추 등등으로 분화되어 있는 현재의 틀을 유지해서는 이런 혁신적인 창당은 불가능할 것이다.

    오히려 이들 각각 세력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해산 수준으로 문호를 대폭 허물며 이런 과정을 통해 평당원-대중들의 참여를 적극 이끌어내야 한다. 특히 진보신당은 이 과정에 가장 앞장서서 그 이름과 기대에 걸맞은 역할을 해야 한다.

    진보신당이 현실에 안주하는데 어느 세력이 나설 것이며, 나선다 한들 진보신당이 움직이지 않는데 당장 판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진보신당은 이와 반대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기득권을 버리고 스스로를 버림으로써 문호를 열고, 진보진영의 백가쟁명을 주도하고 이를 통해 진보진영의 혁신과 재구성에 밀알이 되기를 자처하며, 이로부터 오직 도덕적 우위로 이 과정을 주도해나가려 하기 보다는 총선 이후의 알량한 기득권과 관성적 사고방식에 자꾸 얽매이는 것같다.

    지금의 진보신당을 구성하고 있는 분들 중 다수가 민주노동당을 탈당하면서 밝힌 탈당의 변들을 보면, 진보정치의 대의에서 벗어나 자파의 기득권 지키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주체사상파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진보정치의 혁신과 재구성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그렇게 탄생한 진보신당이 불과 창당 석달도 안되어 스스로 기득권의 늪에 갇히려 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진보신당에 계신 분들께 정말 묻고 싶어 졌다. “동지여러분! 민주노동당을 탈당할 때의 그 각오를 벌써 잊으신 것입니까?”

    간단히 덧붙이는 사족(蛇足)

    진보정치 혁신과 연대, 재구성의 논의가 시들해진 데에는 진보신당의 책임도 크지만 사회당과 초록정치세력 등의 책임도 적지 않다.

    특히 현지도부가 3월에 있었던 당 대표 선거과정에서 진보정치 재구성에 적극 나서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사회당은 당 대표 선거가 끝나자마자 공언했던 비례대표 불출마 방침을 갑자기 바꾸는 등 단지 소극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총선이 끝난 이후도 진보정치의 혁신과 재구성을 위해 노력하는 대신 진보신당의 뭉그적거림을 핑계삼아 이를 방기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진보정치 재구성에 적극 나서겠다는 공약이 통합진보정당 건설을 위해 사회당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주장했던 유력 상대후보에 대한 물타기용이 아니었다면, 사회당 지도부는 지금이라도 적극적으로 진보정치 혁신과 재구성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한때 사회당의 사무총장을 했던 사람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만, 지금이라도 무엇보다 ‘젊음’을 자처하는 사회당이 진보정치 혁신과 재구성에 소중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초록정치연대는 내부 토론을 통해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하고 해산을 결정했다고 한다. 나는 스스로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는 초록정치연대 분들의 자세를 깊이 존경한다. 그러나 운동에는 가치를 확산하기 위한 활동도 필요하지만 이에 따르는 책임도 요구된다.

    그런 의미에서 자의든 타의든 진보정치 혁신과 재구성의 한 축으로 인정되어온 초록정치연대에도 일정한 책임이 요구될 것이다. 비록 스스로 해산을 결정한 분들 만큼은 아니지만 대안적 사고와 실천을 보여온 초록정치연대가 해산하는 것은 진보진영 전체에도 뼈아픈 상실로 다가올 것이다.

    상황이 그렇게 되었지만 초록정치연대에서 활동하신 분들이 추후 진보진영의 대안적 가치를 형성하는데 있어서는 개인 자격일지라도 보다 적극적인 책임과 역할을 해 주시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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