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티로폼 토론’ 끝에 ‘명박산성’에 깃발 꽂아
        2008년 06월 11일 08: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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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새벽 5시. 광화문 사거리를 가로막았던 육중한 컨테이너 박스 위에 촛불 시위대들이 준비한 깃발과 태극기가 힘차게 나부끼기 시작했다. 20여 명의 촛불 시위대가 ‘드디어’ 컨테이너 박스 위에 올라 대학교 및 ‘노동자의 힘’ 등의 깃발을 흔들며 시위대와 함께 애국가를 불렀다.

    물론 재치도 잊지 않았다. 시민들은 스스로 이름을 지은 명박산성(컨테이너 박스)에 올라 ‘소통의 정부, 이것이 MB식 소통인가’라는 글이 새겨진 현수막을 펼치며 귀 막은 정부에 대해 분노 대신 풍자로 화답했다. 이는 무려 7시간여 동안 길거리 스탠딩 토론 및 아찔한 몸싸움 등을 벌여가며 가까스로 얻어낸 ‘직접민주주의’ 결과였다.

       
    ▲ ‘비폭력’을 외치는 시민들과 스티로폼 계단에 오른 시민들 (사진=레디앙)
     

    난상 토론을 지켜보던 질긴 시민들도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민주주의가 정말 어렵다"(웃음)며 혀를 내둘렀다. 시민들은 이날 밤새도록 격렬한 ‘스티로폼’ 논쟁을 벌였다. 행진에 앞서 이미 촛불문화제에서 일부 시민들이 스티로폼으로 연단을 만들려 하자 ‘절대 비폭력’을 외치는 시민들로 인해 금새 저지당했다.

    하지만 ‘절대 비폭력’은 고수하되, 무저항이 아닌 저항을 주창하는 시민들이 행진 후 광화문에 다시 모여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과 장시간 토론을 시작했다. 무저항을 주장하는 쪽은 시민들의 안전을 가장 큰 이유로 컨테이너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으며, 저항을 주장하는 쪽은 컨테이너 자체가 오만한 권력의 폭력이라며, 이에 맞서 상징적인 행위가 필요하다고 맞섰다.

    이후 새벽 세시께 스티로품 연단이 만들어져 자유발언이 시작되나 싶었는데, 한 쪽에서는 연단을 더 쌓아 컨테이너 위로 올라가자는 측이 ‘넘어가자’고 하고, 여전히 무저항을 주장하는 측이 ‘내려와’를 외쳐 또 다시 토론이 진행됐다.

    라정숙(36)씨는 “애초에 스티로폼 연단을 쌓을 때 컨테이너에 붙여야 했다”며 “올라가서 흔들거나 반대편으로 넘어가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언제나 소극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지금까지 경찰의 바리케이트를 만나면 좌절감만 느껴왔다”며 “정권이 쳐놓은 바리케이트를 시민이 넘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도봉구에서 온 한 시민은 “우리의 시위는 비폭력이었기 때문에 지지를 받아왔는데 컨테이너에 올라가면 내일 조중동에 뭐라고 나겠냐”라며 “더욱이 사람들이 저기 한 번 올라가려고 서로 밀치고 싸우고 하는 모습이 보기 안 좋다. 저기 올라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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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과정에서 토론에 익숙하지 않은 일부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향해 대뜸 소속이나 신분을 물으며 ‘프락치’ 논쟁을 벌이고, 높게 쌓인 스티로품 연단에서 몸싸움을 벌이고, 또 연단을 향해 시민들이 생수통을 던지는 등 아찔한 순간들이 여러 번 지나갔다.

    양측 모두 이명박 대통령과 대화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똑같은데, 곳곳에서 제 각각 다른 파열음이 동시에 새어나와 현장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아수라장이었다. 이에 시민들은 서로를 향해 "6월 10일날 이게 지금 뭐하는 거냐?, 이게 민주주의냐?, 부끄럽다, 이명박이 정말 좋아하겠다, 왜 우리끼리 싸우고 있느냐"며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 컨테이너 박스 위에 시위대 몇몇이 깃발을 꽂는 것으로 마무리하자는 제안이 제시돼 절충점을 찾은 시민들이 또 다시 스스로 자정능력을 찾으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 두 의견의 타협으로 도출된 깃발 (사진=레디앙)
     

    이 과정에서 지도부는 없었다. 이날 판을 만들며 사회를 봤던 인권단체연석회의 관계자들도 번번이 시민들에 의해 연단에서 끌려내려와야 했으며, 광우병 대책위 관계자들도 섣불리 개입하지 못했다.

    광화문 컨테이너에서 난상 토론이 벌어질 동안 광우병 대책위 측은 동화면세점 앞에서 자유발언과 노래 등으로 계속 문화제를 이어갔다. 하지만 광화문 사거리 컨테이너 앞 상황이 악화되자 일부 시민들은 광우병 대책위의 관계자들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과 관련해 이들을 찾으며 무책임함을 질타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안진걸 상황팀장은 “광우병 대책위가 없었거나 방조한 것은 아니다. 그 자리는 어느 단체가 마이크를 잡고 진행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자리로, 누구 의지도 통하지 않는 다중에 의한 통치상태였다”면서 “우리가 주관해서 안전하게 끝나면 우리도 좋지만 그럴 수 만은 없는 게 사실”이라고 답했다.

    이같은 토론 과정을 지켜본 조정식씨는 "우리끼리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것을 겁내지 말자. 더 많이 논쟁하고 더 많이 토론하자"면서 "내일 아고라를 통해 청와대 행진과 관련한 찬반 투표건을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40만여 명(주최측 추산)의 시민들은  서대문, 안국동 일대를 행진하며 100만 촛불 대행진을 큰 사고 없이 무사히 마쳤다. 이날 행사에는 워낙 많은 인원들이 몰려 광화문 광장에서 빠져나가는 데만 한 시간이상이 걸렸다.

    시민들은 21년 전 이날 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숨죽여 불러야 했던 ‘훌라훌라송’에 이명박 대통령 이름 석자를 당당하게 넣고 외치며 힘차게 합창했다. 온 가족이 함께 행진에 참석한 김수혁(50)씨는 "87년에 비하면 정말 격세지감을 느낀다"면서,"이명박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이해를 구한다면 다시는 촛불 집회에 나오지 않을 용의도 있는데 국민들이 무엇에 분노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그는 "주말을 통해 세 번째 나왔는데, 나오면 나올수록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행복하고 신이 난다"면서 "시위대가 행복을 즐기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는 가장 큰 무기"라며 연신 웃었다.

    보수 단체의 집회 등으로 인해 한 때 긴장감이 고조되기도 했으나 이날 집회는  우려했던 불상사없이 유모차를 타고 나온 아기들이 잠든 가운데, 평화적으로 마무리됐다.

    이 밖에 일부 시위대는 조선일보와 경찰청, 한나라당사 앞에서 규탄하는 다양한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으며, 이날 밤 청와대 홈페이지는  네티즌들의 공격으로 다운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20주년 6. 10 민주화 항쟁의 밤은 거리로 쏟아져나온 제 각각의 시민들이 몸으로 직접민주주의를 체득하며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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