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기서 대한민국을 봤습니다"
    2008년 06월 04일 09: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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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때문에 초지가 좌절된 ‘불도저’ 정권이 우왕좌왕해가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금과 같은 순간에, 제가 약 한 달 동안 인터넷으로 봐온 촛불 시위의 광경에 대해 마음 속에 일종의 정리를 합니다. 사실, 이 한 달 동안 제가 본 것은 대한민국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 대한민국의 정부의 수준은, 제가 시위를 많이 본 1990년대 이후로는 그렇게 크게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시위자에 대한 경찰의 성추행이라도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지, 구타, 물대포, 발로차기, 방패로 찍기, 온 몸이 짓밟힌 여대생 – ‘기본 메뉴’ 그대로입니다. 아 참, 최루탄이 빠진 것은 진일보라면 진일보….

어쨌든 시위자를 ‘비국민’으로 보는 그때 그 사고 방식은 경찰 간부들에게 본질적으로는 여전합니다. 그런데, 시위는 정말 크게 진화됐습니다. 용역깡패 수준의 경찰들에게 아프게 맞아도 끝까지 폭력으로 대응하는 걸 자제하고, 사진을 찍고 법적인, 여론적인 대응을 하고.

좌파 지식인들보다 훨씬 더 강한

이번의 시위대는 비폭력의 위력을 십분 발휘했습니다. 이 위력은 무서울 정도입니다. 좌파 지식인들의 오랜 외침보다도 경찰에 온 몸이 짓밟힌 여성 시위자 사진 한 장은 불도저 정권의 정통성을 훨씬 더 강하게 뒤흔듭니다. 사실, 진화된 국민과 그저 그대로의 권력의 충돌을 지켜본 수백만 명들에게는 불도저는 더 이상 ‘우리 대통령’이 아닙니다.

그냥 어떻게 잘못돼서 권력 피라미드의 맨꼭대기에 오른 구시대의 역겨운 산물일 뿐이지요. CEO대통령의 신화는 이미 끝났습니다. 그가 이제 운하를 파든 민영화를 시도하든 미친 불도저를 멈출 수 있다는 자신감이 다수에게 생겼습니다. 급진적 신자유주의화 프로젝트는 일단 초전에서 실패되고 말았지요.

   
  ▲ 예비군 복장으로 가두시위에 동참한 사람들.
 

그런데 이번에 노정된 ‘대한민국’의 각종 측면들이 여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위력적으로 보이려고 예비군복을 입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요? 그러면, 예비군이 될 수 없는 다수의 여성이나 장애인, 중고생들이 ‘예비군 아저씨’에 대해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원칙적으로 폭력에 반대해 병역거부하는 사람에게 예비군복이 바로 야만적 경찰 국가, 병영 국가 대한민국의 상징으로 보인다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나요?

예비군 제도를 없애겠다고 김대중 전대통령이 이미 1971년에 공약하지 않았나요? 이 제도는 그 때도 군사 파시즘의 상징이었고, 지금 같으면 그냥 빨리 퇴장해야 할 구시대의 유물일 뿐입니다. 아직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군복이 자랑스럽게 보인다면 이게 큰 일입니다.

우리는 이명박의 정치에 반대해도 보수우파의 심정을 거스란히 공유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요. 아니면 "한우를 먹고 싶다"는 플래카드는 무엇인가요? 당연히 광우병 막고 축산 농가를 도와주자는 의미에서는 ‘미우’보다 ‘한우’를 먹는 것이 낫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차악이지 선(善)은 아니잖아요?

한우라고 해서 동물설 사료를 안 먹이는 것도 아니고 또 사료를 만드는 데에 귀중한 곡물을 써서 세계 곡가를 앙등케 하지 않는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가 세계 식량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자면 한국과 같은 잘 사는 나라들의 육식 문화부터 근본적으로 바꾸도록 노력하는 것이 가장 근원적인 대책이 아닐까요?

‘다함께’ 같은 영세 극좌파 마녀사냥 유감

축산 농가를 당연히 국가가 책임져야 하지만, 한우 농가들을 다른 업종으로 전환하게끔 지원해주고 사료로 낭비돼온 곡물들을 예컨대 북한 형제자매들에게 보내주는 것이 인도(仁道)가 아닐까요? 글쎄, 저는 "누군가를 먹고 싶다"는 말만 들으면 몸으로 공포감을 느낄 뿐입니다. 채식주의자의 편견인지도 모르지마는요.

그리고 ‘다함께’와 같은 영세 극좌파 단체들을 마녀 사냥하는 것이 참 아쉬운 대목입니다. 그들의 접근법이 다소 교조주의적이고, 획일화돼 있는 그들의 수사 (修辭)에 짜증을 느낄 수도 있지만 (‘대중적인 운동 건설’, ‘연합 전선 전략’ … 아니, 사람이 그냥 쉬운, 인간적인 언어로 서로 소통하면 안되나요? 1920~1930년대 일본 좌파 언어에서 온 관용구들을 언제까지 재탕, 삼탕하겠어요?), 그게 누구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마음에 안 맞으면 마음에 맞는 단체를 찾으면 되지 누군가를 고발, 초토화하고 싶은 심정이란 과연 무슨 심정입니까?

우리 마음 속에서 파시스트가 잠자고 있고 가끔가다가 일어나서 기지개를 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놀라운 정도로 참을성이 많은 끈질긴 비폭력 시위와 ‘빨갱이 고발’, 정치 생활에 눈 뜬 중고생과 군복 차림의 시위자, 국민 건강권 운동과 "한우를 먹고 싶다"….. 이 모순, 이 갈등, 이 ‘복합적이고 불균형한 발전 (트로츠키)’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 * *

* 이 글은 ‘박노자 글방’에도 같이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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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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