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광장에 서다
        2008년 05월 29일 05:2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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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날 100명 넘게 연행되었는데도 28일의 촛불문화제에는 긴장감이 없었다. ‘선량한 시민’인 그들은 잡혀가본 경험 없으므로 잡혀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참가자 만큼이나 많은 각종 촬영방송장비, 오가는 화이트칼라, 김밥 아줌마, 교통경찰, 청계천 관리센터 직원들이 뒤섞여 마치 난장(亂場)이었다. 학생들은 진압경찰을 배경으로 돌아가며 기념 사진을 찍고, 팔짱 끼고 나온 어린 연인들은 촬영기사와 리포터 역을 나누어 저희 블로그에 올릴 동영상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들에게 청계광장이란 ‘붉은 악마’ 두건을 두르고 나섰던 바로 그 장소였다.

    민주노총은 한 구석으로, 진보신당은 제일 뒤편으로 물러앉은 그곳은 재기발랄했다. “너를 심판한다. 나를 연행하라”, “우리가 왕이다. 굿바이 2MB” 같은 감성적 구호, 마이크 잡고 TV 드라마 얘기하다 난데없이 노래 부르고, 제 감정에 겨워 웃고 우는 자유발언자들은 두루마기나 작업복 입은 노인네들이 사서삼경 만큼이나 지당하신 말씀으로 청중을 고문하는 운동권 집회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기념 사진 찍고, 동영상 만들고

    의무감이나 버릇으로 나온 사람도 있겠지만, 지나가던 길에 “야, 여기 촛불 데모한다”고 친구에게 핸드폰으로 알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젊은이들에게 촛불문화제는 놀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대결이었다. 젊은 여자가 외친다. “이 세상에 악마가 있다면 제 영혼을 팔아 그들을 저주하고 싶습니다.” 누가 이들을 이토록 분노케 했는가?

    교보문고 쪽으로 귀가하는 대여섯 명 행렬을 경찰이 막아선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불어나고, “집에 가자. Let me go home.”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청계천 방향으로 우회하여 돌아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경찰의 안내방송. “많이 불편해”라는 반박 연호.

    경찰은 청와대 쪽을 막아 충성을 과시하고 싶었겠지만, 사람들은 거기 전철역이 있으니 당연히 그리로 가고 싶어했다. 촛불문화제는 몰상식에 대한 상식의 도전이다. 정부와 학교와 언론이 말하는대로 고개 주억거리지 않고, 스스로 찾은 자신들의 진리를 외치는 대결이다.

    ‘앵콜’ 환호를 받은 할아버지는 “우리 군대 갈 때는 한글 몰라 ‘가갸거겨’부터 배웠는데, 지금은 이명박보다 더 배운 사람이 많아”라 말했다. 그렇다, 2008년 대한민국 국민들이란, 도대체가 나랏님 말씀이라 하여 곧이곧대로 따르는 족속이 아닌 것이다.

    먹기 싫다는데 먹어도 괜찮다 우기거나, 가고 싶다는데 가지 말라 막는 것은 도저히 용납 못한다. 5.16광장이 여의도공원으로 바뀌고, 복원된 청계천으로 놀러다닌 이들에게 유신 때 같이 윽박지르는 정부와 데모한다 잡아가는 80년대식 경찰은 너무 후지다.

    상식과 몰상식

    힘 있는 자들이 홀대하니, 촛불들은 서로 돕는다. 촛불 만드는 할아버지들에게 “어디서 나오셨습니까?” 물으니, “모르겠습니다. 지나가다 하는 거라서…” 답이 돌아온다. 테이프로 적십자 마크를 만들어 단 의료봉사단, 매직펜으로 쓴 전화번호를 들고 다니는 촛불지킴이 변호인단. 상품 판매 촉진을 위해 병든 소를 먹어야 하는 이 시대에 촛불은 새롭게 등장한 공공부조다.

    ‘배후’ 찾기에 혈안이 된 자들은 부질없다. 무슨 운동권이라는 단체들이 아무 계산 없이 거리로 뛰어드는 법은 없다. 그들은 계산이 끝나야 행동에 나서지만, 그들의 계산은 으레 일이 끝난 후에 나오기 마련이다. 지금은, 멋모르는 촛불이 몸사리는 운동권에게 통제되는 않는 ‘진짜 분노’를 가르치는 형국이다.

    따라서 촛불은 일체의 기성에 대한 보이콧이다. 시위 참여자의 태반은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의 지지자일 테지만, 그들이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은폐가 아니라 그 권위들이 청계광장에서는 통용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사 차량과 마이크를 준비한 ‘주최 측’은 “집회 끝나면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는 것”이라고 가두시위를 설명한다. 누군가 앞선 이 없잖겠지만, “여기 경찰 없다”고 누군가 외치면 이리로 우~, 저리로 우~ 우왕좌왕하는 품을 보니 아무래도 ‘주최 측’의 변명이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가

    ‘공식 행사’가 끝나자마자 한 사내가 방송카메라용 비계에 올라 “오늘도 날밤을 까고 내일 아침에 출근하겠습니다”라고 선동한다. 그와 그를 따른 무리들은 꼭 쇠고기가 아니었어도 광장으로 나오고 싶어한 듯했다.

    우리는 끔찍한 일상에서 벗어나 일탈하고 싶어했다. 단지 미친 쇠고기가 우리를 불렀을 뿐, 미친 사회로부터 탈출하고 싶지 않았던가, 우리는.

    ‘고딩’들이 우리를 선동하고, 일탈을 고무 찬양했다는 점에서 촛불은 진부한 정치들에 대한 보이콧이고, 조직된 운동들로부터의 탈출이다. 조직이 아닌 이들에게 조직적이지 못하다 비판하는 것은 반칙이다. 촛불문화제가 조직적인가 그렇지 못한가, 전망이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는 중요치 않다.

    연단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일을 생생하게 전하고,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말한다. 서로들 호응하고 야유하고, 웃음과 박수를 보낸다. 이 설익고 산만한 난장에서 무언가 생겨날 것이다. 체계도, 조직도, 계획도, 그리고 ‘집합 이성’이라는 것도 이렇게 생겨나는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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