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는 것 빼고 다 해봤다"
        2008년 05월 21일 09:5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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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한 지 천일만에 작업복을 꺼내입고 금속노조가 주최한 투쟁 승리 결의 대회에 함께 했다.
     

    죽는 것 빼고 전부 다 해봤다. 생활을 위해 젓갈부터 양말까지 팔 수 있는 것도 전부 다 팔아봤다. 딱 ‘3일’이면 끝날 줄 알고 시작한 싸움이었다. 최저임금보다 10원 더 많았던 64만 1850원의 월급을 받고, 현행 법상 생산직에 파견 업무를 쓰는 것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3개월, 6개월 단위의 계약을 맺으며 ‘노예’처럼 일하다가 ‘잡담’ 등의 이유로 ‘문자 해고’를 당했다.

    비인간적인 처우와 부당해고에 맞서 현장복귀를 요구하며 정규직, 계약직, 파견직 노동자들과 함께 노조를 만들어 노동부로부터 불법 파견 판정도 받아냈다. 하지만, 회사는 벌금 500만 원으로 법적인 책임을 벗어났고, 노동자들에게는 해고와 구속, 54억 원의 손해배상 가압류 신청이 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조합원들은 6살 난 아이를 잃어버릴 뻔한 혼비백산한 순간을 겪어야 했고, 가장 믿고 사랑했던 가족과 친구들에게조차 외면받아 만신창이가 된 가슴은 우울증과 불면증을 낳기도 했다.

    1000일이 지나도 멈출 수 없는 이유

    그렇게 200여 명의 조합원은 36명으로 줄어들고, 노조를 떠나 재취업을 한다고 해도 파견직 근로로 인해 또 다시 해고를 당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이렇듯 투쟁한 지 1000 일이 지나도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싸움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현장 곳곳에 ‘제2, 제3의 기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기륭 비정규 노조 박행난씨는 "언제가는 다른 사업장에서 또 터질 문제이고, 지금 잠깐 우리가 외면한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다"면서 "자본가들이 알아서 바꿔주기를 바라나? 우리 같은 노동자들이 당당하게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일어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불법 파견 문제를 대표하는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이라는 대의만으로는 이 싸움을 끌어올 수 없었다. 이들에게는 투쟁을 이끌어주는 보이지 않는 ‘사슬’이 있었다. 내 살이 네 살 같고 네 살이 내 살 같은 조합원들의 동지애와 각 단위 사업장을 뛰어넘는 연대의 손길이 그것이다.

    투쟁 천일을 맞이해 문화제가 열린 20일 밤. 오랜 투쟁에 지칠만도 하건만 기륭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내미는 연대의 손길에 일일이 화답하며 투쟁의 승리를 자신했다.

    기륭전자 앞 한 자리에 모인 GM 대우, 이주노조, 뉴코아 이랜드, KTX 승무원, 코스콤 등 비정규직 사업장 노동자 300여 명은 굳건하게 이어온 ‘천일’ 투쟁을 축하해야 하는지 안타까워 해야 하는지 난감해 하며, 기륭 노동자들의 선도 투쟁에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했다.

    축하해야 하나?

    뉴코아 노조는 도시락으로, 이랜드 노조는 막걸리 주점을 통해 마련한 수입금으로, 백기완 선생님은 시로, 학생들은 경쾌한 몸짓과 노래로 기륭 노동자들에게 힘을 보탰다.

       
      ▲1000일 맞이 연대 문화제에는 GM 대우, 이주노조, 뉴코아 이랜드, KTX 승무원, 코스콤 등 비정규직 사업장 노동자 300여 명이 함께 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랜드 노조 이경옥 부위원장은 "기륭 천일 투쟁을 보며 ‘이랜드는 천일이 가기 전에 끝나야 한다’, ‘우리도 그때까지 싸우게 되는 건 아닐까’ 등 정말 만감이 교차했다"면서 "이랜드 내부에서도 ‘누군가 뛰어내리거나 죽어야 해결이 되나’ 싶어 정말 답답했는데, 이렇게 많은 노동자들이 함께 하는 것을 보니 희망이 보인다"고 말했다.

    이 부위원장은 "단순히 천일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간 혹시 기륭 노동자들을 외롭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면서 "기륭 노동자들의 투쟁에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다.

    오미선 KTX 철도노조 승무지부 직무대행은 "비정규직 싸움의 선봉에 선 기륭노동자 선배들을 보면 힘이 난다"면서 "쉽지 않은 싸움을 지금까지 꿋꿋하게 이어오고 또 연대의 대오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것을 보면 기륭 투쟁은 이미 승리했다는 생각도 든다. 다음에는 투쟁문화제가 아니라 일하는 현장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진보신당 박김영희 공동대표는 "천일이 말로 하기는 쉬어도 그간의 투쟁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한숨과 눈물을 대신한 힘든 세월이었을 것이다"면서 "거대한 세상과 싸워 이기는 방법은 지치지 않고 질기게 함께 투쟁하는 것 뿐이다. 그 길에 진보신당이 함께 하겠다"며 투쟁 기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경쾌한 몸짓과 노래로 이어진 문화제는 ‘한 번 더’를 청하는 재청을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 더’ 로 이어져  점점 열기를 더해갔고, 이에 천일만에 작업복을 꺼내 입은 기륭 노동자들은 ‘승리의 기운’ 이 느껴진다며 함께 한 노동자들에게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화답했다.

    연대, 인간으로서의 참된 삶

       
      ▲노동자들이 농성을 벌이는 컨테이너 박스 앞을 지키고 있는 촛불
     

    윤종희(39)씨는 "우리 투쟁이 천일을 이어올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많은 노동자들의 연대 덕분이었다"면서 "투쟁 초기에만 해도 ‘내 코가 석자여서 죽을 것 같은데 무슨 놈의 연대 투쟁이냐?’고 했던 우리들이 지금은 연대 투쟁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가장 가슴 아파할 만큼 많이 변했다.

    인간으로서의 참된 삶, 연대의 의미와 소중함을 배웠던 것만으로도 이미 승리한 것 같다"고 말했다.

    씩씩하기로 소문난 김소연 분회장도 "우리 투쟁이 누군가 죽지않고 과연 해결될 수 있을까, 정말 속이 너무 타들어가서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는데 같이 투쟁한 동지들이 있어 여기까지 왔다"면서 "이렇게 싸움이 길어질 줄 알았다면 처음에 시작도 안했을 것"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김 분회장은 "어느 새 주위를 둘러보니 어디에나 기륭이 있었다. 이 투쟁에서 지면 우리 같은 비정규직은 항상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그저 눈치를 보며 노예처럼 살 수밖에 없다"면서 "우리 싸움은 85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예의 삶을 살 것인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 것인에 대해 스스로 선택하는 투쟁이기에 멈출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90%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그 가운데 97%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가, 노조를 떠나 취업 후 또 해고를 당하며 울음을 삼키는 기륭 노동자가 이 싸움을숨죽이며 지켜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노사는 노조가 ‘하이 서울 페스티벌’이 진행 중인 서울시청 앞에서 조명탑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인 것을 계기로 지난 16일부터 다시 재교섭을 시작했다.

    하지만 노조는 직접 고용을 요구하고, 사측은 생산라인이 부족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해 이견만 확인했다. 노사는 오는 22일 2차 협상을 가질 예정이지만, 양측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어 쉽게 접점을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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