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태학적 통찰 통해 지구 구하자
        2008년 05월 21일 05:5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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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의 위기?

    근대를 대표하는 학문은 자연과학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과학은 인간의 완벽한 이성을 통해서 얻어진 객관적 결과 및 그 운용 법칙의 집합체라고 생각되었다. 그저 우리는 그 결과를 주워 지식의 장바구니에 집어넣으면 되었다.

    그러나 이성(합리적으로 예측하고 보다 나은 상태로 개선할 수 있다는 인간의 가능성으로서의)이 의심을 받는 지금 과학도 이제 진리가 아닌 가장 유력한 가설들의 집합으로 그 위상이 약화되었다.

    최근 잦은 오보로 비난을 받고 있는 기상청의 일기예보는 이러한 좋은 예일 듯하다. 물론 완벽한 기상 예측을 바라는 사람들의 기대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한국의 사계에서 겨울이 사라지고, 장마라는 것은 사전에나 나오는 단어가 된 대신 예측치 못한 게릴라성 호우로 인해 자주 우산을 챙기지 못해 짜증이 나게 한다.

    특히 게릴라성 집중호우는 최근 한반도 중부 지방의 생태계 파괴 – 무분별한 벌채, 댐 건설, 북한의 산림 황폐 등과 지구온난화의 영향이라는 것, 즉 인간 활동의 결과라는 점이다.

    과거 주술사의 육감, 동물들의 반복된 행태에 바탕을 둔 관측, 그리고 자신의 기분 상태에 따라 날씨를 예측하는 것에 비하면 지금 축적된 자연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기상예측은 결코 헛된 노력이 아니다. 삼국지에서 제갈공명이 동남풍을 불게 한 것이 그의 신비한 능력이 아닌 오랜 관찰의 결과를 바탕으로 한 예측을 가지고 한 매우 정치적 행위였다는 점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자연을 단순히 정령들이나 신들이 자신들의 장난감으로 생각하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나름대로의 질서를 통해 변화하고 있다는 생각도 근대 이후 자연과학의 발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즉, 완벽한 일기예보라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잡을 수 없는 무지개일지 모르나 우리는 그 무지개 때문에 계속 그것을 잡아보겠다는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 아닌가?

    새로운 과학으로서 생태학

    필자가 대학을 다닐 때 당시 새로운 과목으로 인정된 생태학이라는 수업을 들은 경험이 있다. 강의 내용은 매우 딱딱하여 현재 생태계는 대기권, 생물권, 해양권, 지표가 있는 지구와 그에 영향을 주는 태양의 관계를 통해 에너지와 물질의 흐름, 그리고 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딱딱함에도 필자가 놀라워한 것은 이런 권역들 사이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여 서로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과 특히 생물권 내에서 생물종들 사이에 적자생존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존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옥수수박사 김순권, 그는 잡초를 완전히 없애기보다는 옥수수가 잡초들과 일정정도 비율로 공생할때 최대의 산출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아프리카 토양에 맞는 옥수수 품종을 찾아냈다.
     

    근대 자연과학이 중세 종교적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제공했던 것처럼 생태학 또한 인간과 자연 그리고 지구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고 현재의 전지구적 자연 재앙들의 원인 및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인류의 성과라 할 수 있다.

    만약, 1950년대 모택동과 중국의 과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면 식량증산을 위한다는 목표 아래 참새를 대대적으로 멸종시키겠다는 무모한 캠페인을 진행하지도, 이후에 중국에 대기근이 닥쳐 수천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산성비, 오존층 파괴, 그리고 지구온난화

    어릴 적 비를 맞으면 대머리가 될 수 있다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지구의 오존층이라는 것이 있어 이것이 파괴되면 자외선 때문에 피부암에 걸려 죽을지 모른다는 협박에 떨어지는 빗방울과 내리쬐는 태양을 피해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산성비와 오존층 파괴 논쟁이 어느새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팀 플래너리 교수(Tim Flannery. 호주 태생의 대중과학자로 전세계적으로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가 이야기했듯이 이러한 전지구적 위협에 대해 인류의 적극적 대응이 있었기에 그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매우 비관적인 예측 앞에서도 이런 위기를 극복했던 인류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다시 지구 온난화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전 미국 부통령 앨고어가 제작한 ‘불편한 진실’은, 그가 현재 지구 온난화(지구의 온도가 상승함으로써 발생하는 급격한 지구 생태계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필자는 기후변화(Climate Change)보다는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가 맞다고 생각한다)의 문제를 매우 쉽게 잘 다루어 대중들의 각성 및 행동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불편한 진실’에서 말했던 불편한 진실보다 더 불편한 진실이 있다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 영화에서 충격적인 사실 중 하나는 지구 온난화를 입증하고자 하는 과학적 논문은 무수히 많지만 그에 대해서 반대하는 논문은 하나도 없다는 지적이었다.

    지구온난화를 외면하려는 석유 자본들이 엄청나게 로비를 했음에도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자 시도하는 과학자가 없다니! 아마도 석유 자본들도 이 명백한 과학적 진실을 돈으로 막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정치권이나 시민사회에 대한 로비를 통해 최대한 면피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실을 찾고 변화시키는 힘으로써의 과학

    과거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논문 조작을 보면서, 처음엔 필자도 그의 성과(?)가 그의 너무나 정치적 행보에도 불구하고 이게 사실이라면 엄청난 과학적 발견-윤리적 논쟁을 제외하면-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대중이 열광하고 드디어 한국에도 노벨상을 타게 될 과학자가 탄생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을 때, 과학적 진실 앞에 부끄럽지 않으려는 젊은 생명공학자들의 문제제기와 이를 보도한 PD 수첩, <프레시안>의 강양구 기자, 그리고 한재각 동지의 노력으로 그 허구성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런 엄청난 과학적 발명 앞에 제대로 된 검증 없이 너무나 쉽게 조작되고 유통될 수 있다는 것도 충격적이지만, 반대로 소수의 굽힘 없는 문제제기가 더욱 큰 절망을 막아냈다는 것은 분명 우리가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현재 지구온난화라는 거대한 위협에 직면해 있지만 생태학 및 최근의 많은 과학적 노력의 결과로 인간과 자연의 연계가 얼마나 약한지, 예측 없는 인간의 행위의 결과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되었다. 인류절멸이라는 최악의 상태가 오진 않았지만, 지구온난화가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재의 문명을 완전히 파괴하거나 아니면 지구의 주인으로서 자격을 잃게 할 수 있다는 묵시록의 한 페이지를 우주인들이 읽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 무지하거나 자신들의 욕망만을 끊임없이 위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전 지구적 위협을 사전에 막고 지구공동체를 살리고자 하는 사람들 역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자연 파괴에 대한 응징으로 인간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극단적 회의주의나 지구가 어차피 스스로 치유를 할 것이기에 상관없다는 무책임한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파국적 미래를 막아내는 적극적 실천에 나서야 할 때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표현을 빌리자면 "먼저 시작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행위이다" 라는 그의 말처럼 이제 남은 것은 누가 먼저 시작하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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