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소하면 자전거를 사야겠다"
        2008년 05월 20일 11: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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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9월 18일, 한국 정부는 전격적으로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 허용 방침을 발표했다. 2001년 12월 오태양의 병역거부선언 때부터 2007년 9월까지 6년 간 모두 30명이 병역을 거부해 감옥으로 갔고, 그들의 수감기간은 37년, 1만 3,500시간에 이른다. 물론 이 수의 수백 배 많은 여호와의 증인의 젊은이들이 병역을 거부하고 있다.

    ‘전쟁없는 세상’이 엮어 ‘철수와 영희’에서 5월 하순경 출판 예정인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1만 3500시간을 담고 있다. <레디앙>은 5월 15일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아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에 실린 병역거부자들의 글 몇 편을 게재한다.

    버스기사와 촬영기사 / 정재훈

    나는 버스 타는 걸 좋아한다. 우선 첫째로 창 밖을 볼 수 있어서이고 둘째로 버스의 진동이 편안하게 느껴져서 잠도 잘 오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버스의 진동과 소리가 너무 싫다고 하는데 나는 그게 왜 그리 편한지 잠자기 시작하면 정신없이 자고 간혹 종점에서 내리기도 한다.

    또한 버스기사는 매일 다르기 때문에 언제나 타고 가는 느낌, 즉 운전 스타일이 다르다. 언젠가 어떤 운전기사는 운전하는 내내 욕을 하고 경적을 울리기도 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서오세요, 출발합니다. 꼭 잡으세요”라며 부드럽고 안전하게 가는 운전기사도 있었다.

    이 두 가지 예들이 모두 불편할 때도 있고 아무렇지도 않기도 하고 즐거울 때도 있지만 어쨌든 버스는 참 재밌고 좋다. 지하철은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기는 하지만 너무 답답하다. 오래 걸리더라도 나는 버스를 탄다. 그리고 나는 꼭 어디로 가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진동을 느끼고 창 밖의 풍경을 보는 것이 즐거워 모르는 노선을 갈아타면서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렇지만 버스기사는 언제나 같은 길을 따라서 간다. 노선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운전을 하던 아저씨가 두 갈래로 갈려진 길 앞에서 멈칫하면서 정해진 노선이 아닌 다른 길로 가고 싶어 하는 순간을 느낀 적이 있다.

    길을 가던 버스가 두 갈래 길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고 버스는 정해진 노선대로 갔다. 나는 맨 앞에 타고 있었기에 그 모든 순간을 뚜렷하게 느꼈다. 내가 아는 사람은 진짜로 다른 길로 빠져나간 버스를 탄 적이 있다고 했다. 노선을 벗어난 버스의 승객들은 웅성거렸고 항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버스는 공공의 것이다. 승객들은 어디로 가기 위해, 목적을 가지고 각기 다른 노선의 버스를 탄다.

    다른 길로 가고 싶은 버스

    나는 노량진에 있는 학원에서 강의를 찍는 촬영 아르바이트를 한다. 학원 내에서 강의를 찍는 목적은 우선 인터넷에 올려서 동영상을 제공하기 위해서고, 넓은 강의실에서 뒤에 앉은 학생을 위해서 찍는다. 강의실 뒷편에 칠판 방향으로 설치되어 있는 두 대 혹은 한 대의 TV는 녹화를 하고 있는 캠코더와 연결되어서 눈이 나빠 뒤에 앉거나 강의 듣는 인원이 많아 뒤에 앉을 수밖에 없어서 칠판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보여준다.

    그러니까 생방송처럼 찍고 인터넷에 올리는 식이다. 촬영은 어떤 매뉴얼을 가지고 있다. 왜냐면 보여줄 사람이 학생이라는 것이 분명하며 그 학생들이 강의를 보는 목적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촬영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첫째로 사운드다. 교사가 하는 말의 내용은 곧 강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중요한 건 칠판에 쓰는 판서이다. 교사가 칠판에 쓰는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학생에게는 필기꺼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판서가 정말 작아서 줌인(카메라가 고정된 상태에서 줌인렌즈를 변화시켜 피사체에 접근하는 것)을 통해 보여줘야 할 때가 있기도 하고 교탁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강의하는 교사는 패닝(카메라가 고정된 상태로 좌우로 움직이는 것)을 통해서 그를 따라다녀야 한다.

    말을 하는 사람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촬영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배우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찍어야 한다. 강의 내용의 흐름을 따라 충실히 판서를 따라가고 교사를 따라간다.

    그 넓은 강의실에서 강의하는 그 순간, 나는 다른 것을 찍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아예 빈 공간, 빈 책상, 의자들을 찍고 싶기도 하고 교사의 콧구멍을 찍고 싶기도 하며 열중해 있는 학생의 눈을 찍고 싶기도 하고 일일이 열거하자면 정말 많다.

    하지만 내가 그런 식으로 찍으면 난 아르바이트를 더 이상 못하게 될 것이고 그 동영상은 인터넷에 올리지도 못할 것이며 올린다 하더라도 기존 동영상에 익숙한 학생들의 항의글과 전화가 빗발칠 것이다.

    젠장. 그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가 된다는 것, 게다가 하나의 목적을 위해 거기에 내 몸을 움직인다는 게 끔찍하다. 버스기사는 또한 어떠한가. 운전하는 그 순간 그는 거기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해진 길 속에서 그도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불특정 다수의 이동수단이 되거나 눈과 귀가 되는 것. 그게 즐거울 수도 있고 즐거워서 하는 이도 있을 수 있지만, 난 하나도 즐겁지가 않다. 난 촬영하는 걸 좋아하고 즐겨하는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건 정말 더더욱 아닌 것 같다.

    여기에 나는 없다.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만들었을 때, 테이크아웃 커피점에서 카페라떼를 만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이게 무슨 경영시스템인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매뉴얼 경영이었던가 뭐 그런 거겠지. 매뉴얼대로 행동하고 생각하라! 회사는 움직일 몸을 요구하고 그 몸이 가야 할 길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 정재훈은 인간에게 강제로 등급을 매기는 징병검사와 본인의 의지는 무시한 채 복종만을 요구하는 위계질서로 이루어진 군대에 반대하며 2007년 2월 병역을 거부했다. 현재 영등포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으며 출소 후에 영화제작과 관련된 일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쁘리모 레비 / 김영진

    형. 동생이오, 해가 바뀌었네. 새해구려. 복 많이 받으시라고.

    좀 형식적인 느낌이 나지만 지난주에 편지 잘받았다네. 내가 보낸 편지들은 잘 받았는지. 수연이가 조금 바쁜 모양이구만.

    금요일에 엄마, 동혁씨, 그리고 이승규씨 이렇게 세 분이 면회를 왔다네. 29일 형이 말해준대로 엄마생일 축하한다고 했네. 형이 편지에 쓴대로 물질적으로나 마음으로나 가장 고생했으니 나도 잊고 있지 않구려. 작년 한 해 동안 더운날, 추운날, 비오는날, 눈오는날 안가리고 면회오시느라 이곳에 있는 나로선 그다지 마음이 편할 수 없었네. 늘 미안하고 고맙지.

    물론 형도 매주 편지 쓰느라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으리라 생각하네. 나도 편안히 쓴다고 쓰는데 주말에 편지 쓰면 하루가 금방 지난다네. 형 엄마 수연이 현구 이렇게 쓰고 또 가끔씩 여기저기 편지를 쓰니 양적 팽창이 있을수록 질적으로 좀 그렇다는 문제가 있기도 하고. 어쨌든 형도 편지 쓴다고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편안히 쓰시길~.

    거기 시간으로 31일, 1일 어찌 보냈든가? 시끌벅적하게 보내시진 않을 것 같은데 나야 진짜 다른 건 없네. 오늘 점심에 특식이라고 떡국 나온 게 전부. 그 이외에는 평소에 보내는 휴일과 다름이 없다네. 방안에 달력이 바뀐 것도 있구만.

    그것보다는 책에 저번에 말한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에 집중하려고 해서. 말했지 이탈리아 유대인 아우슈비츠 생존자 primo levi. 책은 그리 두껍지 않은데 읽으면서 느끼는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네. 지난 28일에 배달되서 2/3정도 읽고 있지.

    레비가 직접 쓴 게 아니고 서경식 선생이 레비의 삶을 흔적을 따라 다니며 기행문 형식으로 쓴 것이지. 레비는 토리노에서 자라났나 보네. 토리노 하니 그람시가 생각나는군. 대학을 그쪽에서 다니고 활동 무대도 그쪽이었던 것 같으니.

    레비는 그곳에서 스스로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의 환경에서 자라났다고 하네. 유럽에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유난히 이탈리아에선 덜했다는구만. 그래서 이탈리아에선 상대적으로 다른 곳보다 자유로웠다고 하네.

    그런 그곳에 파시즘이 이르고 독일군의 직접 관할구역에선 유대인에 대한 억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더군. 유대인 종교적 정체성이 더 강하게 부여되어 있는 것인데, 나찌는 인종적 의미를 그 위에 덧칠한 것이라고 하네. 레비는 기껏해야 돼지고기 안먹는 정도 뭐 그 정도의 의미밖에 없는 것이 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가를 정도인지 몰랐던것 같네.

    “나에게 유태인의 의미는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지 않고 돼지고기로 만든 쏘시지를 금하지만 이를 무시하고 먹으며 열세 살이 되어 히브리어를 조금 배우지만 금새 잊어버리는 것에 불과했다.” 뭐 이 정도야.

    짐승이길 거부하고 문명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레비가 수용소에 갇혔을 때 그에게 삶을 지속시키게 만든 것, 글쎄 한 마디로 요약하긴 뭐하지만 스스로 짐승이길 거부하고 문명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 않았다고 하네. 그래서 레비는 단테의 신곡을 외우고 친구들과 같이 암송했다 하네.

    문명이라. 그에게 계몽을 지키기 위한 것이 필요하다고 여긴 것 같고, 나찌는 계몽과 이성에 대한 반증이라 여겨진 것 같네. 그래서 인간으로 남길 원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네. 

    그리고 갇힌 내가 그걸 읽으니 글쎄 쉽게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마구 떠오르더군. 그리고 내가 책을 읽고 있을 때 주위에서 잡담을 하는, 그 내용이 온갖 돈으로 점철된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상황이란 어제도 그랬고 며칠 전에도, 그러면서 진짜 인간이란 것에 나의 물음이 집중되더군.

    쉽게 말을 하지 못하겠지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없는 듯하면서도 계몽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다시 등장하니.

    면회 때 엄마가 마스크 이야기를 하더군. 응 나도 마스크 쓰고 자, 방이 건조해서 얼마 전부터 마스크가 구매되더라고 그래서 쓰고 있지 ㅋㅋ.

    오늘도 또 주저리주저리 늘 두서 없는 것 같구만. 해가 바뀌었지만 날은 아직 차구만 늘 감기 조심하고 건강관리 늘 잊지 마시고. 편지 자주 쓰려 노력하는데 이놈에의 일이, 아우. 그리여. 그럼 편지 쓸 수있는데로 주중에 또 띄울게 알지? 안전제일

    형에게 동생 영진이가. 2007. 1. 1

    * 김영진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진보운동을 하다 2005년 12월 병역을 거부했다. 영등포구치소와 의정부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지금은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면서 진보정당운동을 하고 있다.

    출소하면 자전거를 사야겠다 / 나동혁

    오랜만에 남는 시간을 이용해 12월에 받은 편지를 다시 읽고 답장을 쓴다. 세 통의 답장을 쓰고 잠시 쉬려고 시계를 봤는데 1시간도 채 흐르지 않았다. 난감한 일이다. 요컨대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재판 종료 이후 수감생활 컨셉이 적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 지루함을 잠시 잊기 위해 네 번째 답장으로, 일찍이 20일 전에 요청을 받은 ‘평화수기’를 쓰고 있다.

    글이 늦어진 데 변명을 하자면, 출력이라는 걸 신청했었는데 12월 1일부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 30분까지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일용할 양식을 만드느라 피곤해서 한동안 편지 쓸 생각을 못하고 자기 바빴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작업장이 옮겨져 시간을 내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더 그럴싸한 변명을 하자면 평화를 말하기엔 난 너무 정서불안이다. 평화운동에 관한 그럴듯한 이론이 정비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 자신이 그다지 평화로운 인간이 못 된다는 이야기다.

    수십일씩 단식을 하고, 전경 방패를 앞에 두고 있어도 마음은 당당하고 편안해야만 평화로운 건 아니지만 난 최근 몇 년간 병역거부를 결심한 이후로 정서가 불안했다. 그러고 보니 일평생 항상 정서가 불안했었다. 중학교 적성검사 때도 신뢰도가 60%밖에 안 되었고 ‘정서가 불안하다’는 최종평가를 받은 바 있다.

    평등하지 못하면 평화가 아니고

    진맥을 짚어주었던 ‘돌팔이 의사’ 수감자 역시 내 맥박이 부정기맥으로 ‘생각이 너무 많아 정서가 다소 불안하다’는 진단을 내렸으니…. 어찌할까? 난 평화를 잘 모르는데…. 요즘 실제로 나는 ‘정서불안’과 평화 사이에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평화는 말 그대로 ‘평평한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평등하지 못하면 평화가 아니고 불안하게 요동치고 있으면 평화가 아니다. 개인이건 사회건 정서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면 평화롭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평화를 서술해버리면 보수 인사들이 말하는 평화, 즉 질서와 사회 안정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을 뒷받침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운동 방식에 대한 고민이 뒤따른다. 불평등과 폭력과 군사주의를 없애나가는 운동은 필연적으로 갈등과 변화를 수반하고 그 과정은 요동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힘과 힘이 충돌해서 이기는 쪽이 사회를 운영하게 되는데, 이는 의회민주주의가 충분히 발달한 경우에도 완전히 해소하기는 힘든 딜레마 같다.

    그래서 평화운동은 설득과 감동, 이해 따위를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다수의 의식을 넘어서는 일시적인 변동은 결국 그 의식이 감당할 수 있는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 같다. 폭력적이고 군사적인 구조와 문화를 유지하려는 소수 기득권이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수가 거기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에 현 상태가 유지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이 로마제국과 파시즘의 차이가 아닐까? 봉건사회나 유신체제의 차이이기도 하고. 파시즘이나 유신체제는 구성원들 스스로가 원한 것이기도 하다. 직접선거와 국민투표도 거쳤다. 다수의 저항, 계급투쟁이나 의회정치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사회운동과 이해, 설득, 감동, 영적 교감, 자율적 소규모 공동체를 중시하는 평화주의자들 사이에 어떤 교류가 가능할까? 문제는 시스템에도 있고, 그 시스템을 받치고 있는 각 개인의 가치관에도 있다.

    과거에는 온통 시스템에 대한 고민이었다면 평화를 고민한 이후에는 내 자신의 삶 속에 평화란 무엇일까 고민해보았다. 너무 외롭고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삶이 무거울 때, 난 내 삶이 평화롭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뭔가 영적인 충만함이 없는 상태에서 관성으로 유지되는 활동이 전부는 아닐까 고민했다.

    벽안의 현각 스님 말처럼 ‘배고플 때 밥 먹고 졸릴 때 잔다’는 말도 퍽이나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생활 속에 기름기를 제거하기로 했다. 채식은 아직 못하고 있지만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너는 히피냐?

    기존 사회가 요구하는 통과의례들, 가령 군대니 결혼이니 취업이니 하는 것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니 몸과 마음이 한결 가볍다. ‘너는 히피냐? 최소한 네 밥벌이는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해야 한다. 작가 김훈의 말처럼 ‘밥벌이의 지겨움’을 모르는 자, 평화를 말할 자격이 없다. 일본작가 무라카미 류의 방식처럼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사는 데도 돈이 필요하다. 그의 글과 생활방식을 좋아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만한 돈과 재능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내 자신이 평화롭게 살려고 노력하다보니 일상적인 생활 패턴에서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다. 결혼해서 애를 낳고 부양해야 한다는 생각만 바꿔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무궁무진하게 많다.

    오히려 30대에 뭐하며 지내야 할지 걱정이 된다. 직장, 결혼, 자녀부양 이런 계획들이 사라진 30대 생활계획표 짜기는 정말 어렵다. 마찬가지로 취업, 군대, 대학 이런 계획들을 미뤄둔 생활계획표를 짜기도 20대에게는 참 힘든 일이다. 난 그냥 생활계획표를 조금 다르게 짜본 것뿐이다. 다만 감옥에서 그걸 감당하고 있는 중이니, 날로 먹으려 한다는 비난은 부당하다. 개인의 평화에도 책임은 따른다.

    우리는 시간이 모자랐다고 후회하지만 사실은 항상 계획할 시간이 너무 많아서 두려워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단 안정과 질서의 품에 안긴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사회든 개인이든 그저 관성에 의존하는 건 평화가 아니다. 물론 거기에 변화를 주려면 고민도 많아지고 갈등도 생긴다. 당연히 예상할 수 없는 책임이 뒤따를 수도 있다.

    그래도 변화없이 지쳐가는 것보단 낫다. 지쳐가는 사회는 새로운 위기에 적응할 힘이 없다. 평화적인 변화 역시도 전투 못지않게 치열할테다. 사회든 개인이든, 너도나도 담배를 피우면서 ‘너만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게 좋다’고 충고하는 사람들처럼, 너만은 다르게 살라고 말하면서 기존 질서에 순응하게 만드는 거대한 관성이 작용한다.

    어쩌면 내가 정서불안에 시달리는 이유도 그런 것일까? 스스로 ‘바람직하게 변하고 있어요’ 하고 말하는 건 좀 우습다. 병역거부 이후에 고민이 많아진 건 사실이다. 그 과정이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지금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생활과 관계의 변화들이 썩 괜찮게 느껴진다.

    출소하면 자전거를 사야겠다. 그리고 빨리 겨울이 갔으면 좋겠다. 춥고 지루하다. 창틀에 갇힌 메마른 가지의 풍경도 곧 변하겠지.

    수기니까 이렇게 막 써도 이해하겠지. 사실 막 쓴 것도 아닌데…. 내 의식 수준을 넘어서는 글을 쓰지 못하겠다. 반군사주의 운동도 중요하다. 그래도 가끔 이런 수기도 괜찮겠지. 어쨌든 내게 ‘현장’이라고는 감옥뿐이니까…. 2004. 12. 26

    * 나동혁은 오랜 시간동안 학생운동가로 살았다. 2002년 전쟁과 군사주의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병역을 거부했고, 수감되기 전까지 전쟁없는세상에서 활동했다. 서울구치소에서 수감생활을 했으며 출소 이후에는 논술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다.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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