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가서 뭘 어쩌자고?"
    2008년 05월 19일 09:55 오전

Print Friendly

   
  ▲필자.
 
 

“신속한 지도부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조현연이 말하더니 이제는 장석준이 “빨리 시작하자”고 재촉한다. 그리고 나름의 이유를 말한다. 제2창당과 재창당을 구분하기도 한다.

제대로 된 배를 만들고 싶다

형식적으로 말하자면 진보신당은 없다. 진보신당은 총선용 대책기구로 만들었고, 그래서 이름에도 ‘연대회의’라는 걸 붙였다. 총선 전 열린 원탁회의에서도 그런 지적을 했었다. “총선 공동대응기구이자 총선 이후 실질적인 창당을 하기 위한 전략 거점” 정도였다.

제대로 된 정당은 총선 이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만들어가자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고, 조금 심하게 말하면 1달짜리 총선용 정당일 뿐이었다.

총선은 먼 길을 가기 위한 종자돈을 만드는 과정이었고, 그런대로 항해에 필요한 기름을 살 정도의 돈은 마련한 셈이다. 그런데 기름이 생기니까 가고 보잔다.

민주노동당이라는 배를 만들어 100km 쯤 가다가 우리는 그 배가 목적지를 달리 하고 있음을 보고 차가운 바다에 뛰어 들었다. 다행히 또 다른 배가 있어 그럭저럭 근처의 섬에 도착했다. 이제는 10,000km 정도 갈 수 있는 배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미 뒤처져 있으니까 그냥 그 배를 가지고 빨리 출발하잔다.

나는 그 배에 탈 수가 없다. 차가운 겨울 바다에 빠져 본 경험이 있는 나는 배를 새로 만들지 않으면 출발할 수가 없다. 나는 섬에 있는 사람들과 의논하고 싶다. 배의 나무는 어떤 재질로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항로를 잡아야 하는지, 선장은 어떤 사람이 가장 노련한지, 배에 탈 사람들이 가져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등 모든 것을 시간을 두고 논의하고 싶다.

그런데 그들은 배를 출발시키면서 섬에 있는 사람들보고 얼른 올라타라고 하는 것 같다. 개중에는 수영을 잘 하는 사람들이 있어 이미 출발한 배에 올라타기도 하겠지만 나는 가능하면 더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함께 출발하고 싶다.

빨리 가서 뭘 어쩌자고?

요즘 진보신당이 주춤한 이유를 재창당 때문이라고 말하는 장석준의 분석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2000년 4월 총선을 예로 들어 지도부의 신속한 결단 때문에 민주노동당이 성장했다고 보는 조현연의 말은 자기 논에 물을 대기 위한 평가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그 시기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안다. 자료를 뒤져 보니 97년 대통령 선거가 개표되기도 전에 쓴 이후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기획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준비되었고, 무엇보다 노동자 대중이 있었기에 민주노동당은 성장할 수 있었다.

“6월 안에 긴장을 걸고, 대의구조를 갖추고 당 대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게 장석준의 요지다. 그리고 추첨체 등 다양한 실험 등을 말한다. 여기에는 앞으로 나아감만 있을 뿐 돌아봄은 없다. 문제는 어떤 형식과 내용의 대의구조를 만드는가라는 점이다.

“도발적이고 모험적인 위험 감수 전략”이 필요하다고 조현연은 말한다. 문제는 지금 주춤하고 있는 것을 “안정적인 위험 회피”로 보는 인식의 차이다.

민주노총 자료를 보니 이번 탈당 사태로 인해 공공운수연맹에서만 2,000명 이상의 당원이 탈당한 것으로 나타난다. 문제는 탈당자의 다수가 진보신당에 결합을 아직 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관망하고 있다. 진보신당이 빠르게 자리를 잡음으로써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노건추의 문제의식

내가 처음 ‘노동자 진보정당 건설 추진 전국위원회'(약칭 노건추) 제안문을 제출한 게 3월 4일이다. 내부의 고민이 있었다. 진보신당의 노동위원회 정도로 출발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게 아니고 광범한 노동자 정치를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 노건추였다. 문제의식은 이런 것이었다.

“10년에 걸친 민주노동당 운동이 실패로 귀결되었다면 좀 더 차분하게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현 시기 ‘민족주의자와의 결별’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내적으로 공유하고, 이후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현재 전망으로서는 10명이 탈당한다고 했을 때 최대 절반 정도가 조직적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정당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 이하가 될 수도 있다. 노동자 진보정치에 대한 실망과 좌절, 탈당 과정에서 보여 준 신당에 대한 거부감 등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가 어떤 내용의 정당을, 어떤 과정을 통해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진보정당을 다시 만들고자 하는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어떤 내용과 과정을 통해 탈당하고 있는 노동자 및 새로운 노동자들을 포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새로운 진보정당이 어떤 조직구성과 이념적 지향을 가져나갈 것인가, 민주노동당 운동에서 노동자 정치가 왜 유실되었는가를 조직적으로 규명하고, 조직적으로 노동자 정치를 강제할 수 있는 틀을 만들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이대로 하나의 조직구조가 다시 짜여 질 경우 유력 정치인이나 새로운 당의 조직질서를 통해 ‘리메이크 민주노동당’의 활동 모습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노동자들은 주체로 참가하거나 일정한 조직적 흐름을 가지기보다는 수동적인 모습이 재현될 수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노건추는 총선 전후를 통해 유명무실해졌다.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의견을 모아나가기 시작할 무렵부터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총선 이후 노건추의 문제의식을 담아 본격적으로 진보정당의 모습을 위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고 있다. 진보정당을 어떻게 구성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전체적인 합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이런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핵심이라는 걸 누가 부정하겠는가?

이후에 우리가 가져야 할 새로운 당의 모습에 대해서 두 사람이 지적하는 많은 부분을 공감한다. 아마도 지난 10년의 경험을 돌아보면 많은 해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추첨제’가 되었든, ‘노동자 당원의 독자적 활동체계’가 되었든 지금 제시되는 구상은 몇몇의 아이디어일 뿐이다.

나는 ‘까발리야호’와 같은 독창적이고, 다양한 새로운 시도들이 아래로부터 조직될 수 있는 구조에 더 주목한다. 문제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다.

내가 생각하는 새로운 당의 형성 및 발전과정은 이런 것이다. 노동자, 농민, 여성, 환경, 장애인, 학생,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자발적인 ‘추진위원회’를 만든다. 새로운 진보정당에 동의하는 다양한 정치세력도 하나의 단위로 모여도 좋다.

밑으로부터 의견을 수렴하고, 민주적 절차를 통해 10명당 1인, 혹은 100명당 1인씩의 대표를 선출하고 이들의 집합으로서 당의 대의 체제를 만든다. 당의 진로와 방향에 대해 각 추진위가 책임지고 논의를 시작한다.

지역 활동에 대해서는 이런 다양한 추진위가 모여 새로운 질을 가진 지역운동에 대한 모색을 한다. 이 경우 노동자가 다수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일정한 제한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비정규노동자 등에 대해 노건추 등에서 의결권을 할당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추진위에 결합하는 사람들은 총선 전 진보신당에 가입했든 안했든, 현재 진보신당의 당원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다.

이제 새로 출발한 배를 짓기 시작하는 마당에 먼저 배에 탔었다는 기득권은 소용이 없는 것 아닐까? 이 경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재정일 것이다. 현장에 일정 정도 혼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만 일치된다면 이 모든 건 정리가 가능하다.

아는 게 노동자밖에 없으므로 노동자를 중심으로 얘기해 보자. 총선 전 신당에는 반대했으나 노동자 정치가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지금의 진보신당으로 포괄할 수 있다고 본다면 오만이다. 계급정당을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곡된 민족주의자와의 동거가 파경으로 끝났다면 현재 시기 연대하고, 함께 고민할 대상이 누구인가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계급정당을 추진하는 사람 중 하나가 노건추 보고 들어오라는 인터뷰를 한 것을 보고 좋은 생각이라고 봤다. 고민의 폭은 좌우를 거쳐 넓게 잡아야 한다. 이게 제2창당을 우선하고, 재창당을 나중에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더 나가 보자. 지금의 조건은 진보신당이 노동자 당원을 조직적 방침에 의해 모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내 책상 위에 진보신당에서 보내 온 유인물이 쌓여 있지만 대중조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조직적 결정이 없는 한 활동에 한계가 있다. 대중적 물줄기가 터지지 않는 한 힘들다는 얘기다.

어떤 노조는 운영위원회의 결정으로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을 철회했다. 많은 당원이 탈당했지만 진보신당을 바로 연결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노건추와 같은 경우라면 조직적으로 참가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점을 함께 보아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잔치를 시작하자

탈당 과정에서 다양한 토론들이 있었다. 왜 그게 지금은 안되는가? 진보정당의 미래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의견을 들어보자.

패권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문제, ‘전진’을 비롯한 정파의 문제, 당의 중심에 비정규 노동자들을 둘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민주노총 안에 당원은 있지만 당 안에는 민주노총 조합원이 없다”는 반성을 넘어설 대안,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을 결합시킬 수 있는 방안, 당원이 주체가 될 수 있는 방안 이 모두에 대해 지도부가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의견을 듣는 구조를 만들자.

“당원들은 단지 당비를 내는 것으로, 노동자는 세액공제를 해 주는 것으로, 노동조합은 선거 때마다 돈과 몸을 대는 도구로 전락했다”고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주요 민주노총 산하 간부들이 기자회견에서 말했었다. “민주노동당을 만들고, 당원을 확보하는 데 급급하여 그 내용을 채우는 데 게을리 한 우리 책임이 크다”고 고백했다. 다시 당을 만드는 데 쫓기듯 할 수 없는 이유다.

조금 늦으면 어떤가? 우리가 만들 새로운 정당은 그저 선거에 대응하고, 국회의원 몇 명을 배출하는 데 급급한 그런 것은 아니지 않는가? 당비를 내되 인터넷 투표조차 참가하지 않고, 정치의식의 향상과 무관하게 세액공제를 해준다고 노동자를 설득하고, 노동자 출신으로 지방의회 등의 의원이 되긴 했지만 권력을 위해 다른 당을 기웃거리거나 당의 방침도 무시하는 그런 사례를 반복해선 안되는 것 아닌가?

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가 되었든, 시민이 되었든, 학생이 되었든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반성 없이 혁신 없다

진보신당은 발전할 것이다. 신생 정당답게 활기에 차 있고, 새로운 당원들도 많이 들어온다고 한다. 누군가 탈당 과정에서 그런 비유를 한 적이 있다. 당에 있는 사람들이야 자동차처럼 가볍게 유턴을 할 수 있겠지만 노동조합에 있는 사람들은 기관차처럼 길게 돌아야 한다는 점을 고려했어야 한다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조금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자동차보다야 기차가 더 빠른 것 아닌가?

구구절절 맞는 얘기를 통해 빨리 가지고 하지만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음을 생각하자. 무엇보다 당의 기본 구조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을 모으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출발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나는 왜 원탁회의가 다시 열리지 않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각계각층의 의견을 듣는다는 것이 그냥 시늉이었던가? 아니면 이제는 확대간부회의라는 게 있으니까 거기서 모든 걸 의논하고, 해결하면 되는 것인가?

어려울수록 돌아가야 한다. 꼬일수록 더 많은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 10년을 까먹었다면 적어도 1년은 왜 그랬는지, 현대적 의미의 정당이란 게 무엇인지, 조직구조를 어떻게 해야 자발성을 높여나갈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모색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런 구조를 형성해야 가능하다.

“치열한 반성이 없이는 혁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처절하게 반성하겠습니다. 지난 시기 민주노동당의 문제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동자 정치가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 지를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겠습니다. 비싼 수업료를 낸 만큼 이 소중한 경험을 가슴에 안고 평생을 살아겠습니다” 탈당 기자회견문에서 한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그저 해 본 말이 아니다.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