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5번째 병역거부자
        2008년 05월 15일 12: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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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9월 18일, 한국 정부는 전격적으로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 허용 방침을 발표했다. 2001년 12월 오태양의 병역거부선언 때부터 2007년 9월까지 6년 간 모두 30명이 병역을 거부해 감옥으로 갔고, 그들의 수감기간은 37년, 1만 3,500시간에 이른다. 물론 이 수의 수백 배 많은 여호와의 증인의 젊은이들이 병역을 거부하고 있다.

    ‘전쟁없는 세상’이 엮어 ‘철수와 영희’에서 5월 하순경 출판 예정인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1만 3500시간을 담고 있다. <레디앙>은 5월 15일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아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에 실린 병역거부자들의 글 몇 편을 게재한다.

    정부가 대체복무 허용 방침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병역거부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다. 그것은 대체복무라는 제도를 둘 것인가 하는 문제를 넘어 우리 스스로가 동원국가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 글들이 평화에 대한 우리의 감성을 일깨우길 기대한다. – 편집자 주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준비하라
    – 2001년 12월 17일 오태양 병역거부 선언

       
    ▲ 오태양은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첫 병역거부자다. (사진=불교정보센터)
     

    2001년 12월 17일 오후 1시까지 논산훈련소로의 입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저는 올해 27살의 아주 평범한 대한민국 젊은이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자 청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신성한 병역의무의 이행’이라는 제 삶에서 더 이상은 유예시킬 수 없는 종착역을 바로 눈앞에 두고 이 글을 씁니다.

    17일 입영일 아침에 저는 논산행 버스가 아닌 안국동행 지하철 3호선에 몸을 싣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동안은 훈련소에서 군복과 총을 지급 받고 훈련을 하는 대신, 서울의 어느 복지시설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거나 노숙자 분들의 시중을 들며 저에게 다가 올 삶의 시련을 담담히 받아들일 터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오래 전부터 종교적 신념과 평화·봉사의 인생관에 따라 군사훈련 대신 사회봉사로서 국가와 이웃의 안녕과 행복에 기여하고 싶었고, 그것을 제 삶에서 직접 실천해 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저의 행동은 명백히 현행 실정법을 어기는 것이기에 범죄자로서 처벌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기꺼이 저는 양심적 행위의 대가를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가혹한 것이어서 제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오점을 남기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제 양심의 울림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국가와 이웃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라는 평소의 소신을 지키는 것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또한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내면의 진실을 좇아 살아갈 때 진정 행복할 수 있으며, 사회정의와 공공의 이익과도 부합될 수 있다는 제 나름의 믿음에 기초한 선택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웃에게 봉사하고 싶다

    저와 같은 이들을 두고 세상에서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 혹은 ‘병역 기피자’ 라고 일컫습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에 담긴 개인의 진실, 혹은 사회적 진실에 귀 기울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저 또한 그 길을 가야할 것이 분명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에는 정확히 1594명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범죄자로 취급되어 어둡고 차가운 감옥에서 짧게는 2년, 길게는 3년의 수형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17일부로 1595번째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등록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20대의 혈기왕성한 대한민국 젊은이들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헌정 이래 60여 년 동안 이 땅에는 무려 1만여 명에 달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 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입니다.

    대한민국 재판자료에는 이들의 양심적 행위가 ‘단일한 죄목으로, 단 한 차례의 감형이나 사면복권 조치가 없었던 극악한 범죄’로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가슴 아픈 것은 그 범죄의 붉은 사선이 재판기록과 주민등록증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1만여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인생기록과 그들의 가족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있겠으나, 우리 사회에서 꼭 필요한 일원으로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20여년이 넘게 소중히 키워왔던 인생의 꽃망울을 마음껏 터트려야 할 시기에, 사회적 편견과 침묵의 감옥에서 고통스러워 하거나 혹은 죽어갔던 그들에게 청춘의 삶이란, 사회의 정의란 과연 무엇일까요?

    올해 2월, 그들의 존재와 인생에 지워진 멍에를 발견하고서 저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죄란 과연 무엇일까?’ ‘양심을 저울질하는 사회정의란 도대체 무엇일까?’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 끝에 나에게 돌아온 것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실존적 고민과 스물 일곱 내 인생에 대한 통절한 성찰이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타협하거나 회피할 수 없는 이 삶의 화두를 두고 끝없이 방황하며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뭇 오래된 일이지만 올 2월 20일, 그 끝간 데 없이 뜨거웠던 오후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 또래의 젊은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직면하는 문제로서 ‘군입대’는 자기 인생을 기획함에 있어 매우 본질적인 문제일 듯 싶었습니다. 3대 독자로서 어릴 적부터 ‘남자라면 자진 지원해서라도 군대는 다녀와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자란 저에게 있어서도 그러했습니다.

    “남자라면 군대 갔다 와야”

    94년 병역법이 개정되면서 저에게 주어졌던 특혜가 사라지자,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군대는 현실의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본격적인 배움과 인생설계를 해야 할 20대 초반에 2년이 넘는 군생활은 적지 않은 부담과 인생의 단절과도 같게 느껴지기도 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이런 저런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스물 일곱 나이가 되었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종착점에 이르러 3년간 산업기능요원을 할 생각으로 병역특례 국가시험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시험을 한창 준비하던 어느 날 우연히 한 인터넷 토론방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한 토론 내용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살생을 목적으로 하는 일체의 전쟁과 군사훈련을 거부함으로써, 항명죄로 구속되어 3년의 감옥생활을 한다는 여호와의 증인의 이야기는 내 존재를 뒤흔드는 충격이었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아픔이 자욱이 베어 나오는 눈물 어린 수기들을 읽어 내려가며, 저의 가슴과 눈에서는 쉼없는 통한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오로지 ‘살인하지 않겠다’는 개인의 양심을 지켜내기 위해 다른 수감자들보다 훨씬 부당하고 가혹한 3년의 감옥생활을 기꺼이 감수함은 물론이거니와 출소 후에도 범죄자와 종교적 이단자라는 멍에를 지고 편견과 소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기구한 삶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가슴 아팠습니다. 그들을 도울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것이 내가 누군가를 돕는 차원 이전에, 내 문제가 선결되지 않고서는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이 온전히 전해질 때, 사람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나 봅니다. 그것이 내 존재와 인생의 문제로 다가오자, 공부는 물론이거니와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그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살인하지 않겠다는 죄

    저는 94년 서울교육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대학초년 시절부터 이 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제 힘 닿는 데까지 봉사하며 살고픈 나름대로의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 대학에 들어가면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 농촌 봉사활동과 공부방(야학) 활동이었습니다.

    그러한 경험은 ‘이 세상에서 전쟁과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 보겠다’는 꿈을 키워가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아마도 저의 유년시절의 경험에서 영향받은 것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저희 가정은 아버지의 알콜증독 증세로 인해 폭력과 이별이 일상화되어 있었고, 굶지는 않았지만 근근이 연명할 정도로 가난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좌절이 아닌 삶의 원동력의 작용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대학 1학년 때부터 산동네 빈민지원활동이나 농촌봉사 활동 등을 자원해서 하곤 했었습니다. 물론 학과 공부는 다소 소홀해졌지만, 나의 작은 노력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기쁨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보람과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3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이런 봉사활동을 개인적 차원이 아닌 보다 많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학생회 임원으로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1997년 봄 무렵, 북한에 극심한 식량난이 발생하여 어린이는 물론이거니와 어른들까지도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고서 국민적인 지원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교사를 꿈꾸며 서울교대에 입학했던 저에게 특히 안타까웠던 것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이었습니다.

    배고픈 어린 시절을 겪었으며, 장차 통일이 되었을 때에 내가 가르칠 수도 있는 아이들이 지금 당장 먹을 게 없어서 태어나자마자 죽어간다는 소식은 참으로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는 뜻있는 친구들과 힘을 모아 그 당시로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하는 활동을 사회구호단체와 함께 하였습니다. 그런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저는 그 동안 맛보지 못했던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삶이 나에게도 유익하고 진정 행복한 것이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은 사회봉사활동을 하면서도 ‘아무리 좋은 일이라지만, 결국 내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힘들고 괴로울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런 마음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들을 일방적으로 돕고 구제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인생의 참된 보람과 행복감을 가슴 절절이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마음이 들자 한 끼 밥 먹을 수 있음이 참으로 감사했고, 지구상에서 배고픔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에 조금이라도 동참하고자 시작했던 ‘금요일 점심굶기’가 5년이 지난 지금은 생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참으로 놀랍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불교를 접하게 된 건 그 즈음의 일이었습니다. 그간 봉사활동을 하며 풀리지 않았던 의문들이 있었는데 ‘왜 이 세상에는 끊임없이 고통받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일까?’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는데도 그것 때문에 왜 힘들고 괴로운 것일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자비의 이타행’이라는 가르침

    그러한 의문들에 명쾌한 해답을 주었던 것이 바로 한 인간으로서 평생을 ‘자비의 이타행’을 실천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이었으며, 불교적 가르침이었습니다.

    ‘타인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지 말라’, ‘세상 만물은 연관되어 존재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봉사하는 삶이 곧 자신의 행복이고, 자신을 닦는 것이 세상의 이로움으로 나아간다’는 불교적 세계관과 그런 삶을 몸소 실천해 보여 주신 부처님의 삶은 저에게 인생의 비전과 희망을 보여 주었습니다.

    부처님의 삶을 닮고 싶었고, 그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나에게도 이익이 되고, 이 세상의 평화와 정의를 위하는 길이라는 확신이 섰습니다. 그것은 지금껏 사회활동을 해 오며 추구하여 왔던 ‘전쟁과 가난이 없는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는 나의 소망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었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교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어쩌면 그 형식을 뛰어 넘는 보편적인 진리에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즉시 저는 삼보에 귀의하고, 얼마 후 오계를 수계함으로서 진실한 불자가 되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며, ‘전쟁과 가난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는 일에 행복한 마음으로 봉사하며 살겠노라’는 소망을 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계수계를 받던 날, ‘불살생계’를 지키며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다음과 같이 서약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살생하지 말라 함은 생명을 존중하라는 뜻이기에 폭력, 살인, 고문, 사형, 전쟁, 공해, 핵무기 등을 반대함으로써 인권을 존중하고 평화를 애호하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저는 참으로 그 가르침에 견주면 부족함이 많아 부끄러웠지만, 그 지향함을 잃지 않고 한 걸음씩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아 왔습니다. 나름대로 매일 5시에 일어나 기도와 명상으로 아침을 시작하고자 하였고, 채식하는 식습관을 갖도록 노력했으며, 주변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였습니다. 하지만 군대생활을 통해 이러한 삶의 방식이 쉽사리 허용될 수 있을지 종종 의문스럽기도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생애와 가르침은 어느덧 제 생활의 가장 근본적인 지침이 되었고, 그것은 봉사하는 삶, 평화로운 삶을 살고 팠던 신념을 더욱 굳건히 해주는 밑거름이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늘상 ‘부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저는 총칼을 들고 있는 부처님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일체의 전쟁행위에 반대한다

    저는 이렇듯 ‘불살생’의 종교적 신념과 평화·봉사의 인생관에 대한 확신의 이유로 도저히 군사훈련과 집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일체의 전쟁행위에 대한 반대이며, 그런 확신에 따른 일체의 군사훈련 참여에 대한 거부인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대한민국의 한 구성원으로서 ‘병역의 의무’를 부정하거나 회피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는 사회구성원으로서 수많은 이들의 도움과 헌신적 노력 속에 이렇게 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영하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군생활을 하고 있는 현역 군인들에게 진심으로 경의와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저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며, 그 헌신적 노고가 더욱 ‘신성한 의무’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병역을 이행하는 행위가 진실로 신성함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것이 자신의 소신과 양심적 결단 위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저는 병역의 의무가 단지 ‘군사훈련의 필수적 이수와 전투분야에의 복무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저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오지의 초등학교에서 무보수의 교직생활을 한다던가, 길거리의 노숙자들을 보살피는 봉사를 통해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고 싶은 것입니다. 서울교대를 졸업한 저는 교원의 부족으로 폐교될 수 밖에 없는 지역의 소외받는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교사로서 봉사하고 싶습니다.

    한편으로 지금처럼 어느 추운 겨울 행려병자로 길거리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직장과 가정에서 버림받고 길 위에서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노숙자분들을 도와 삶의 희망을 찾아드리고 싶습니다.

    ‘그 어떠한 명분으로도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따라서 전쟁과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어떠한 군사훈련에도 참여하지 않겠다’는 개인적 서약은 제 삶에 있어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그것을 지키고자 할 경우에 저에게 돌아올 대가를 기꺼이 감수하고자 합니다.

    다만 작고 평범한 대한민국의 한 젊은이가 한번도 만난 적 없는 1594명의 양심적 병역거부 수감자들과의 정신적 교감을 통해 이야기하고픈 것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세상에 알려진다면 그것으로 족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저에게는 진정 꿈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꿈을 향해 걸어갈 것 입니다. 지구상에 전쟁과 가난의 고통이 사라지고, 세계의 젊은이들이 총 든 군인이 아닌 자원봉사자로서 만나 인류의 꿈과 희망에 대해 지구의 생명과 평화에 대해 웃으며 어깨동무 할 수 있는 그 날까지 말입니다.

       
    ▲ 2008년 3월 22일 평화행진 (사진=전쟁없는세상)
     

    희망이란 마치 땅위의 길과 같은 것
    – 2004년 9월 성동구치소에서 –

    이 곳은 성동구치소입니다. 오늘로 꼬박 보름이 지났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함께 해 주시는 마음이 있어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침식사 전 40분가량 평소대로 기도와 명상을 합니다. 하루 세 끼 밥을 두둑히 챙겨 먹고 세 번 점검을 받습니다. 30분 주어지는 운동시간엔 바지런히 운동장을 서른 바퀴를 달리고 있습니다.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을 정독하며 제 삶과 운동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사색합니다.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3.45평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의 공간에서 24시간 살 부비며 함께 먹고 자고 노는 10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20대 초반에서 환갑에 이르신 분까지 저마다의 사연은 다르지만 정드니 어느새 친구입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하루가 가을처럼 익어갑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창살에 익숙해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익어가는 가을 하늘과 나무들, 건너편 기결수 사동에서 스며드는 목탁소리에도, 소리 없이 창문 비집고 방 한 켠 자리 잡은 아침햇살에도, 먼 길 찾아 반가운 소식 전해주는 정겨운 벗들, 그리고 차마 눈빛 마주치지 못하는 어머니의 눈물에도 창살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익숙해진 그 경계를 마주하며 오히려 일상과 사소한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느낍니다. 창살, 그 것은 당분간 제 삶의 일부일 것입니다. 썩 자연스러운 곳은 아니지만 콘크리트 벽과 창살 사이에서도 꿋꿋이 피어나는 꽃들은 반갑고 아름답습니다.

    바깥 소식을 들었습니다. 동혁·치윤·성환의 선고공판 있었다구요. 이 곳에도 이미 60여 명의 병역거부자들이 수감되어 있고 매주 거르지 않고 들어오고 있다고도 합니다. 저도 벌써 여러 명의 병역거부자들을 만났고 한 방에서 같이 지내기도 합니다. 대부분이 20대 초반인데, 오래도록 마음의 준비가 있었던 때문인지 매우 자연스럽고 적극적이며 활기차게 생활을 합니다 얼굴빛만으로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국회에서 대체복무 입법안이 통과되기까지는 병역거부자들의 감옥행은 줄을 이을 것입니다. 오래도록 익숙한 행렬이며 예견했었기도 하지만 바깥에서 보내는 것과 감옥에서 맞이하는 것은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4년 전 처음 병역거부 문제를 접했을 때 ‘감옥에 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 첫 마음 이었습니다.

    오고가며 젊은 눈빛들과 선하게 마주칠 때면 어김없이 그 첫 마음이 심장을 두드리곤 합니다. 하지만 이 곳은 감옥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제 몫이라면 이 곳에서 시들지 않는 꽃이 되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라도 맡겨주시기 바랍니다.

    나머지는 함께 하는 여러분들과 조금씩 나누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현재 진행 중인 대체복무입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을 모아주셨으면 합니다.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후원활동을 부탁드립니다.

    벗들의 방문과 편지는 자칫 나태해지고 관성에 빠지기 쉬운 감옥생활에 활력과 자극을 주는 주는 반가운 가을바람이 될 것입니다. 대법원을 거쳐 UN인권위에 제소까지 갈 길이 만만치는 않지만 우리의 희망 길은 계속 될 것입니다.

    루쉰 선생께서 이르셨죠.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콘크리트 사방과 창살 아래서 꽃 피우고 지고 썩어 다시 열매 맺고 꽃 피우기를 반세기. 선배들이 걸어갔던 도전과 희망의 길 따라 저도 결코 시들지 않는 꽃으로 살아가겠습니다.

    2004년 9월, 성동구치소에서, 오태양 두손모음 

                                                                * * *

    * 불교신자인 오태양은 ‘좋은 벗들’이라는 평화통일단체에서 활동하다 평화주의 신념으로 병역을 거부했다.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첫 병역거부자로 한국의 병역거부운동의 새로운 시기를 열었다. 성동․서울․충주구치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지금은 ‘정토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인도에서 평화활동을 하고 있다.

    *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와 지지자들의 모임으로 2003년 5월 15일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에 결성되었다. 다양한 평화의 신념을 이유로 집총과 군사훈련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지원하고 병역거부와 군대문제를 한국 사회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http://withoutwa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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