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문화제에 묻힌 것들
    2008년 05월 14일 11: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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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 꽃구경은 잘 다녀오셨는지요. 꽃도 같은 꽃이요, 봄도 같은 봄이지만, 어쩐지 봄꽃을 예전처럼 마음 놓고 감상할 수 없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것은 꽃구경 가는 길에 우리가 대기 중에 내뿜는 일산화탄소, 이산화탄소, 탄화수소 따위의 배기가스(이 안에는 발암물질도 함유되어 있다고 하지요)가 먼 길을 돌아 꽃나무와 우리가 함께 사는 이곳으로 되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자각하고 있기 때문일 테지요.

하지만 우리가 얼마만큼 이러한 사태를, 무언가 범상치 않은 일들이 바로 우리의 행위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걸까요.

아시다시피, 지구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먼저 직감했던 선각자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을 발표해 인류에게 첫 경고의 신호탄을 올린 것은 1962년의 일입니다. 그로부터 30년 후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세계적 환경회의가 개최된 것 역시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침묵의 봄’에서 리우까지

하지만, 이 회의가 개최된 지 몇 달 후, 1600명이 넘는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한 목소리로 인류를 향해 경고의 성명을 발표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때 이들은, 인류가, 전에 마주치지 않았던 어떤 새로운 종류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우리에게 경고했습니다.

   
▲ 리우 환경회의의 로고
 

1992년 리우에서 모였던 이들은 계속 모였지요. 1995년 베를린에서, 1996년 제네바에서, 1997년 교토에서 모였습니다. 교토 프로토콜을 합의한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모였고, 지난해인 2007년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모였었지요.

아시다시피 지난 해 모임은 각별히 의미가 있었는데, 온실가스 감축에 관한, 2012년 이후의 국제적인 공동행동에 대해서 처음으로 합의를 도출해냈기 때문입니다.

이 과학자들의 성명이 나온 지 약 14년 후인 2006년 5월 뉴욕과 LA에 다큐멘터리 필름 하나가 발표됩니다. 타이틀은 『하나의 불편한 진실』이었지요. 이 필름은 1992년의 성명에 담긴 우려가 현실로 드러났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같은 제목의 책과 필름, 그리고 환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엘 고어는 2007년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됩니다).

한국에선 이 책이 얼마나 많이 읽혀졌는지 모르겠습니다. 필름만 놓고 보면, 전 세계적으로 이미 미화 약 5천만 달러(약 500억 원)의 수익을 올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 때문인지 어쩐지, 지구상에서 소위 밥 먹고 사는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거나 전부터 자유로웠던 이들 사이에서 모종의 경각심, 행동해야겠다는 의식만큼은 커진 것은 사실이고, 세계 곳곳에서(적어도 북부, 서부 유럽과 호주 등지에서는) 기후변화의 위기에 대한 대책 마련에 부심인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일까요. 1992년 과학자들이 모여 경고했던 인류의 위기는 어쩐지 더욱더 커져만 가고 있는 듯합니다. 빙하는 예상속도 이상의 속도로 녹고 있다고 하고, 북아프리카의 사막화는 가속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호주에서는 가뭄으로 농작물 수확량이 줄어들었고, 그 여파로 곡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하고, 미얀마에서는 사이클론으로 인해 10만 명 이상이 죽고 150만 명 이상이 극심한 위험 속에 있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시절, 우리는 자연에 들어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울적한 기분을 씻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도시를 떠나 산에 들어 꽃구경하는 일도 당당히 할 수 없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있는 것이 아닌가요.

꽃 보러 가는 길에 우리가 내보낸 배기가스들이, 사람뿐 아니라 꽃나무도 다 쓸어가 버렸던 태풍, 츠나미, 사이클론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오고 있으니까요. 만일 우리가 꽃을 찬탄하기 위해 꽃이 겪거나 겪을 고통에 기여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더러운 찬탄이 될 것이니까요.

시인이기도 했던 브레히트는 자신의 시대를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대”라고 했지요. 우리는 지금 “자연시를 쓸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내보낸 배기가스

여러분 중 어떤 분은, 저의 이 발언이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고 지적하시겠지요. 지구 온난화와 지구적 기후 변화를 일으키는 여러 요소들 중 미미한 어떤 하나를 절대적 원인인 것처럼 환원해서 말했다 하시겠지요. 그렇다고 자동차를 전혀 안 탈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고 또 덧붙이실 테지요. 맞습니다.

하지만, 온실 가스 중 가장 비중을 많이 차지한다는 이산화탄소를 진해로, 전군가도로, 섬진강으로 가는 도중, 바로 이 말씀을 하실 당신이 대기 중에 배출했던 것만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오일의 소비가 오일의 생산과 수송과정에서의 화석연료 버닝에, 그로 인한 이산화탄소 방출량의 증가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엄정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비단 오일 사용과 배기가스 방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문제를 문제로서 자각하지 않는 이라면, 문제가 될 만한 어떤 것도 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생태 발자국(ecological footprint), 탄소 발자국(carbon footprint)이라는 것을 어떻게 일상적 행동의 장에서 줄일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상태에 우리는 있는 듯합니다.

사태가 이렇다고 보지 않고서야, ‘온실 가스는 온실 가스, 꽃은 꽃’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왜 나의 행동들이 우리 전체에게 나쁜 결과로 돌아오고 있다는 이러한 사실이 한국 사회에서는 전혀 어떤 문제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지 않는 것일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우선 이것이 만일 문제로서 제기되면, 지금까지 해온 대로 욕망을 충족하며 사는 것이 갑자기 불편해지게 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 막연하게나마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모종의 암묵적이고 비가시적인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이런 문제제기는 담론 공간에서 억압되고, 혹시 문제제기가 되더라도 이내 주변적인 문제로 묵살되는 것이라구요.

그렇습니다. 많은 분들에게 “내집 마련”이 “평면TV”가 “주말 삼림욕”이 기후변화보다 중요한 이슈겠지요. 하지만, 태풍, 츠나미, 사이클론은 애써 마련한 내집도 평면 TV도 자동차도 다 쓸어갑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정보의 빈곤이나 왜곡에서 찾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태의 심각함이 잘 알려지지 않는 것, 내 행동이 어떻게 이 사태의 심각함과 연결되는지 그 관계가 잘 알려지지 않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인터넷과 영어와 정보 과학 시대에 정보가 투명하지 않게 전달되거나 혹은 전달되지 못하거나 하는 사태는 있을 수 없다고 보는 편이 보다 현명한 판단이 아닐는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이슈가 이슈로 떠오르지 못하도록 하는, 이러한 정보가 중요한 정보가 아니라 주변적인 정보가 되도록 하는 어떤 모종의 사회적 기제가 있다고 볼 수 있을 터인데, 제가 보기엔, 이러한 사회적 기제의 작동에 소위 말하는 “우리 안의 대운하” “우리 안의 MB”라는 것이 크게 순기능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촛불집회에 실망

   
▲ 사진=손기영 기자
 

고백하자면, 저는 최근에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 등장한 교복부대에 감동했습니다. ‘국민대책회의’의 신속한 결성에도 감동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글을 쓰는 것은 한편으로 감동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또다시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실망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온 국민의 관심 속에 진행되고 있는 광우병 논쟁의 구도가 “안전하다” vs “안전하지 않다”, “수입규제에 자율성이 있다” vs “수입규제를 자율적으로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재협상불가” vs “재협상” 이렇게 두 대립 구도에 국한되어왔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촛불들의, 그 많은 생각, 토론, 논거들의, 그 많은 말들과 정신들과 얼들의 힘이 오로지 이 이슈에만 집중되고 함몰될 때, 이보다 우리에게 더욱 중요할지도 모르는 이슈들은, 이참에 함께 논의해봐야 되는 이슈들은, 이 단일한 이슈에 눌려 담론의 광장으로 올라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집중과 함몰의 밑바탕에 “우리 안의 대운하”, “우리 안의 MB"인 저 거대한 웰빙의 욕망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더욱 중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슈들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연쇄적인 이슈들입니다.

① 미국산 소의 광우병 발생률이 0%라는,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가 발표되고, 소비 후 건강적 측면에서 아무런 해악이 없다는 것이 후험적으로 명명백백하게 증명된다면, 미국산 소고기의 국내 반입은 환영할 만하거나 용인할 만한 것인가?

② 미국산 소의 수입이 지금 한국경제와 국민의 삶에 과연 필요한 일인가?

③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식탁에서 먹기 위해서 키우는 초식동물인 소의 사료에 동물사료, 항생제 따위를 섞는 행위는 과연 용인될 만한, 바람직한 행위인가? 지금 한국의 축산 산업에 다른 문제는 없는가?

④ 우리가 먹고 있는, 먹을 음식 중에서 과연 소고기만이 문제인가? 혹시 광우병보다도 더 큰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도 그 문제가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은 혹시 없는가? 이를테면, 국내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된장의 원료인 콩은 미국산 대두라는데, 미국산 대두의 94%가 GM입니다.

⑤ 한국인인 내가 소고기를 많이 먹는 것은 지금 소말리아인과 하이티인의 겪는 고통과 과연 전혀 무관한 것인가? 육식 소비의 증가 → 축산 사료용 곡물 수요량의 증가, 기후변화로 인한 곡물 생산량 감소 → 일부 국가에서의 곡물 부족과 곡물가 상승에의 기여 → 전 세계적 곡물가 상승과 식량 안보 시대의 등장이라는 사이클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⑥ 식량안보시대의 등장에 식량자급률, 식품자급률을 높일 필요나 방안은 없는가?

⑦ 내가 소고기를 적게 먹으면 지구 생태계 복원에 기여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가령, 소고기 1kg 생산에는 감자 1kg의 생산에 들어가는 물의 200배의 물이, 양식용 물고기 1kg의 생산에 소요되는 사료의 약 5~7배의 사료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나아가 소고기 사육지 확보를 위해 수많은 삼림이 파괴되었다고 하지요.

⑧ 지금과 같은 식의 장거리 수송은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고, 지속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장거리 수송은 지금 과연 얼마나 지구온난화, 기후변화에 기여하고 있는 것인가? 예를 들어, 런던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왕복하는 비행기 한 대는 CO2 5톤 가량을 대기 중에 배출하는 것에 맞먹는 환경적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생태적 소운하는?

그런데 제 생각에, ①의 이슈에 대해 그렇다, 고 대답하는 분이 있다면(이런 분들은 안타깝게도 상당히 많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 분은 아마도, 정부가 애초의 대운하 계획을 수정하여, “최대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생태계 파괴를 최소화하고 생태계를 오히려 복원해가며, 경제성을 최대한 살려” 추진하겠다고 발표할 경우, 그러니까 이를 테면 대운하가 아니라 환경친화적 소운하를 하겠다고 발표한다면, 대운하 반대에서 찬성으로 돌아설 수도 있을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대운하든, 소운하든, 어떤 국가적 규모의 토건 사업을 기획할 때가 전혀 아니지 않을까요. 광우병이 걸릴 수 있든, 그럴 가능성이 전무하든 상관없이, 장거리 수송을 동반하는 식품 수입의 확대를 생각하고 추진할 때가 아니지 않을까요. 지구를 덥게 하는 데, 기후변화에 일조하면서 동시에 봄꽃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하니, 이런 시대적, 전지구적 요청에 눈뜨지 못하고, 미국산 소고기를 수입하겠다고, 대운하를 하겠다고 하는 정부 – 이 정부는 13차에 걸친 기후변화 유엔 회의(UNFCCC)에서 단 한 번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바로 그 정부인 것입니다 – 에, 국민이 돌려주어야 할 답은,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협상”, “대운하) 백지화” 따위의 소극적인 대답은 아니지 않을까요. 물론 명백히 1차적 과제는 재협상이고 백지화일 것일 테지만, 여기에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당장 요구되는 것은 사태의 유지, 재협상을 통한 안전한 소고기 수입 혹은 현재대로의 소고기 소비, 대운하 백지화가 아니라 사태의 급격한 변화, 외국산 소고기 수입금지, 로컬 푸드 소비운동, 농업보조금 지원, 생태농업 지원, 녹지의 확대, 개발규제 강화, 대체 에너지 개발, 에너지 사용량의 자율적 축소 등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되고 있고, 우리가 염려스러워해야 하는 것은 광우병이나 대운하만은 결코 아닙니다.

이슈를 확대하자

나아가 지금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정부가 추진하는 일에 뒤늦게 나서서 찬성을 하거나 반대를 하는 등속의 소극적이고 후발적인 행동이 결코 아닙니다. 세계의 식품 공장의 가공물이 내 식탁에 어떤 경로로 오게 되었는지 적극적으로 탐구하지 않는 자세로써는, 내 자그마한 행동이라는 톱니바퀴가 전 지구적 사회 공장과 자연환경 공장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자각하지 않는 자세로써는, 삼시 세끼 마음 편안히 밥 먹고, 꽃구경 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이미 도달해 있는 것입니다.

문제를 문제로서 제기하지 않는 것은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나쁩니다. 이슈를 축소하지 말고 확대합시다. 문제제기를 억압하지 말고 손을 들어 광우병과 관련된 더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분출시킵시다. 관심과 논쟁 논의의 초점을 “안전 비안전”에서 보다 넓은 곳으로, 보다 넓은 논쟁과 탐구의 광장으로 넓힙시다.

저는 이번에 촛불문화제에 교복을 입은 이들이 스스로 나온 것을 지켜보며, 4.9 총선 이후의 암울했던 마음이 풀리며, 참으로, 참으로 오랫만에, 커다란 안도의 숨을 쉴 수가 있었습니다. 유권자의 46%가 투표하는 이러한 어두운 시대에, 우리에게 우리가 보지 못했던 희망이, 지금 한창 자라나고 있는 ‘양심세력들’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 내부에도 이 ‘양심세력’은 남아 언제든 꽃필 준비를 하고 있을 거라 믿어봅니다. 이러한 꽃핌의 구경은 얼마나 흐뭇한 것일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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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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