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게 보되 빨리 시작하자"
        2008년 05월 13일 10:2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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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선 이후 진보신당의 제2창당 작업이 탄력을 잃고 있다. 다양한 견해들이 당내에 존재하지만, 책상 위에 올려져 진지하거나 치열한 토론이 이뤄지는 것 같지도 않다. 이 같은 과정에서 제2창당 또는 재창당의 시기와 주체, 노선 등에 대한 이견들이 확인되고 있지만 공론의 장에 올라오지 않고 있다.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다수의 노동조합 활동가들이나 조합원들은 여전히 진보신당을 선택하는데 주저하고 있다. 언젠가는 같이 갈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지만, 사정이 쉽게만 전개될지는 매우 불투명하다. 진보신당이 시급하게 당면 과제를 풀어가면서 재창당을 길게 보자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견해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처럼 중요한 의제들이 진보신당 안팎의 각종 단위에서 공공연하게 토론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레디앙>은 장석준 진보신당 당원의 기고문을 계기로 다양한 토론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주>

    총선 이후 추진하기로 한 진보신당의 ‘제2창당’ 작업이, 막상 총선이 끝나고 난 지금, 의외로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총선 끝난 지 이제 고작 한 달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또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운동이 한창이어서 당분간 제2창당에 신경 쓰기가 힘들기도 하다.

    그러나 총선 전 한두 달 사이, 민주노동당이 붕괴하고 진보신당이 등장하기 직전의 그 급박하던 시기에 쏟아졌던 말들의 풍성함에 비하면, 지나치게 조용한 게 사실이다. 그래도 상임대표들은 나름대로 발언을 하는데, 당원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총선 전에 밑으로부터의 목소리들이 새로운 당 운동의 물꼬를 열던 것과는 사뭇 대비된다.

    지금은 다시 서서히 밑에서부터 목소리가 터져 나와야 할 때다. 침묵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들 자신의 견해를 돌멩이삼아 이 침묵의 연못에 파문을 일으켜야 한다. 이 글 역시 바로 그 돌멩이 하나의 몫을 위한 것이다.

    재창당은 길게 보는 게 맞다

    이미 조현연 교수도 <레디앙> 지면을 통해 지적한 바 있지만, 진보신당의 ‘제2창당’ 안에는 여러 내용이 혼재돼 있다. 우선 총선 전에 선거 대응을 위한 형식적 창당 절차만을 거쳤으므로 내용적 창당 과정을 다시 밟아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당원 토론을 통해 강령을 새로 만들고 당 조직 체계와 활동을 규정할 당헌, 당규를 제대로 짜야 한다.

    여기에 더해, 총선 전 창당에 함께 하지 못한 진보 세력들을 새롭게 규합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다. 이 글에서는 전자를 좁은 의미의 ‘제2창당’으로 부르고, 후자는 ‘재창당’이라 부르겠다.

       
    ▲ 재창당 문제를 다룬 지난 6일의 진보신당 확대운영위원회 (사진=정상근 기자)
     

    요즘 진보신당 안에서 제2창당이 주춤한 것은 주로 후자, 즉 재창당 때문이다. 진보 진영 사정을 보아 하니 몇 달 사이에 새로 규합할만한 세력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그렇게 실체가 없는데도 마치 있는 것처럼 일만 벌이다 보면 자칫 또 다른 ‘부실 창당’에 그치기 십상이라는 의견들이다. 그래서 재창당 과정을 2010년 지방선거 직전까지로 좀 길게 바라보자는 것이다.

    필자도 이런 견해에 동의한다. 우리가 추진할 재창당은 결코 기존 정파나 흐름들의 통합에 그쳐선 안 된다. 만약 이런 수준에 그친다면, 그것은 과거 민주노동당의 정파연합 구조를 되밟는 것에 불과하다. 동반자의 목록에 NL 세력이 빠진다는 것만 차이 날 뿐, 기본적으로 80년대, 90년대에 형성된 운동권 정파의 연합이라는 점에서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재창당 작업은 그런 기존 정파들 사이의 합종연횡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그보다는, 노동 현장과 지역 사회에서 사회운동의 토대를 새로 다지고 그러한 새로운 사회운동의 흐름들을 결집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생명’과 ‘안전’이 화두가 되고 10대가 항의의 주역이 되는 최근의 거리 풍경이 향후 어떤 지속적인 흐름으로 발전한다면 바로 그 흐름의 정치적 대변자로서 제2기 진보정당운동이 본격 출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2010년 지방선거 직전이라는 시점도 좀 급한 것일 수 있다. 더 길게 봐야 할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재창당에 관한 한 우리의 호흡을 최대한 길게 하자는 데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제2창당은 서둘러야 한다

    허나 이게 좁은 의미의 제2창당까지 늦출 이유는 되지 못한다. 재창당을 길게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2창당 전체를 서둘러선 안 된다는 주장으로 확대되곤 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 반대가 맞다고 본다. 즉, 재창당 작업이 장기적인 과정이 될 게 분명할수록 진보신당 자체의 내용을 갖추는 제2창당은 더욱 서둘러야 한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 모른다. 진보신당 자체의 내용을 갖추는 일을 서두른다는 것은 결국 지금의 진보신당 울타리를 기정사실화하겠다는 것 아닌가? 즉, 진보신당 바깥의 새로운 세력들을 규합하겠다는 재창당의 의지가 별로 없음을 자인하는 것 아닌가?

    진보신당만의 제2창당에 그런 성격이 일정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창당의 시간에 맞춰 제2창당의 긴장까지 덩달아 이완시킬 수는 없다. 오히려 재창당 과정이 장기화할수록 하루빨리 제2창당의 긴장을 높여야 한다.

    왜 그런가? 새로운 사회운동의 흐름들에 기반해 재창당을 추진한다고 해서, 그게 당이 사회운동의 성장을 지켜보며 마냥 기다리자는 이야기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회운동의 지반을 다지는 일에 다른 누가 아니라 진보신당 자신이 나서야 한다.

    이것은 지금과 같은 엉성한 당 체계로는 될 일이 아니다. 물론 민주노동당의 낡은 체제를 그대로 이어받아서도 안 된다. 지금부터 진보신당 안팎에서 다양한 실험들을 펼쳐야 한다. 제2창당은 곧 이러한 실험들에 본격적으로 착수하는 일이다.

    2010년 즈음에 진보 세력의 여러 흐름이 합류하더라도 그것은 저마다의 다양한 실험들의 합류여야 한다. 진보신당은 진보신당 나름의 실험의 성과를 갖고, 다른 세력들은 또 그들 나름의 실험의 성과를 갖고 서로 만나야 한다.

    2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그러한 만남이 가능하려면, 우리는 바로 지금부터 이념, 정책에서부터 조직, 활동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실험들의 방향을 토론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제2창당은 결코 태평하게 바라볼 일이 아니다. 늦어도 6월부터는 진보신당 전체에 제2창당의 긴장이 걸려야 한다. 백화제방 백가쟁명. 때로 목소리를 높이다가 서로 싸우는 일들이 생길지라도, 일단은 시끄러워져야 한다. 그게 살아있음의 징표다.

    가장 긴급한 과제들 – 대의구조를 만들고 풀뿌리 조직 체계를 정비하는 일 

    필자는 총선 전에 새로운 진보정당의 조직체계에 대한 몇 가지 제안을 글로 발표한 적이 있다(「새로운 진보정당의 조직체계 제안」, <전진> 제17호에 실림). 그 글에 실린 제안들 중에 지금 제2창당의 긴급한 의제로 주목해야 할 게 몇 가지 있다.

    그 중 첫 번째가 당의 대의구조를 갖추는 일이다. 현재의 확대운영위원회 체계를 하염없이 유지할 수는 없다. 어쨌든 당은, 비록 과도적 존재를 자임하는 당이라 할지라도, 당원들의 공동체다. 그렇다면 그 공동체를 이루는 당원의 경계가 분명해야 하고, 그 당원들의 의견을 수렴할 당내 민주주의 구조를 갖춰야 한다.

    올해 안 어느 시점까지 입당 운동을 지속한 뒤에 그 일정 시점이 되면 그 때까지의 당원들에 기반해서 당대회를 소집해야 한다. 이 당대회가 소집되기 전까지 확대운영위원회가 해야 할 일은 과거 민주노동당 경험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새로운 당원 제도를 정하는 것과, 대의원대회 및 중앙위원회(물론 명칭은 바뀔 수도 있겠지만)를 참신하게 설계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새로운 실험의 내용으로 고민해야 할 것은 추첨제다. 당 대의구조에 전통적인 선출제만이 아니라 추첨제를 적용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평당원 수준에서 대의구조에 참여할 가능성을 열자는 것. 이전의 글에서 필자는 이 제도를 당장 전면 도입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초기에는 대의원대회에 한해 일정 비율(30% 수준)의 대의원을 추첨으로 뽑자고 제안한 바 있다. 이후에 그 성과를 보아 가면서 점차 확대하면 될 것이다.

    대의구조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과제가 당의 풀뿌리 조직 체계를 정비하는 일이다. 첫 번째 당대회가 열리면 그 가장 중요한 의제로서 토론하고 최종 합의해야 할 것이 바로 이 문제다. 물론 그 전에라도 당내 토론을 통해 어느 정도 합의의 가닥이 잡히면 굳이 당대회까지 기다릴 것 없이 조직 재정비 사업에 착수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의 실험의 첫째 방향은,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과거 민주노동당과는 달리 노동자 당원들의 독자적 활동 체계를 만드는 일이다. 노동운동의 혁신에 뜻을 둔 노동자 당원들을 당 지역조직으로 분산시킬 게 아니라 광역 단위의 독자적 조직 체계로 집중시켜야 한다.

    ‘노동자 당원 협의회’로 불릴 수 있을 이러한 조직 체계를 통해 노동자 당원들이 새로운 노동운동의 방향을 찾고 이를 실천하는 데 주력하게 해야 한다. 추상적인 ‘노동계급 중심성’ 논의보다는 이러한 새로운 활동상을 만들어가는 게 진보신당이 노동자정당으로서 제 역할을 하게 만드는 데 훨씬 더 긴요하다.

    실험의 또 다른 방향은 풀뿌리 지역조직들의 활동 방향을 잡는 일이다. 일단 기초자치구 수준에 ‘지역 당원 협의회’(과거 민주노동당의 지역위원회에 해당)를 두되, 현재의 당 역량을 고려해서 몇몇 기초 자치구를 묶어 ‘권역 당원 협의회’를 설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종 조직 관리 업무는 광역시도당의 관할 아래 둬서, 풀뿌리 조직까지 관료적 업무에 매몰되는 것을 방지해야 할 것이다.

    사실 지역 당원 협의회에서 중요한 것은 조직 체계보다는 활동 방향이다. 지난 시기의 진보정당운동처럼 당 지역조직이 당원들만의 폐쇄적 동아리에 그쳐선 안 된다. 당 지역조직은 철저히 지역 사회운동의 한 부분이어야 한다.

    앞으로 몇 달 동안 지역 당원 협의회들을 구성하게 되면, 그와 동시에 이 조직들은 구체적인 지역 실천 프로그램을 하루빨리 확정해야 한다. 그래서 늦어도 올 연말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 사실 지방선거 때까지 시간이 많은 게 아니다. 연말에 시작한다 해도 불과 1년 반 동안 지역사회 안에 어떤 가시적인 흐름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금 이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제2창당 과제들 중에서 또 중요한 게 강령을 새로 만드는 일이다. 그런데 이것은 위의 문제들처럼 그렇게 서두를 일만은 아니다. 즉, 과거에 항상 그랬던 것처럼 첫 번째 당대회에서 강령을 채택해야 한다는 식으로만 볼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필자는 진보신당의 강령을 제대로 다시 만드는 과정에 대해서도 이전과는 좀 다른 상상력을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제1차 당대회를 통해 ‘강령’이라는 제목을 붙인 몇 쪽짜리 문서를 채택하는 수준으로만 보지 말자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원들이 스스로 참여해서 우리 시대에 필요한 변혁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과정 그 자체다.

    그래서 필자는 강령 작성 과정을 어떤 방식으로 추진할지, 그것 자체를 원점에서 재논의해보자고 제안한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한국 사회에서 교육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한국 사회에서 주택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같은 구체적인 쟁점을 정한 뒤에 그에 대한 당원 토론을 통해 강령적 합의를 정리하는 방식이 어떨까 한다.

    아무튼 이렇게 사고의 방향을 달리 하다 보면, 통상적인 강령 채택에 해당하는 절차는 첫 번째 당대회 이후로 미뤄질 수도 있다. 필자의 결론은, 그래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제2창당의 내용들 중 시급히 논의되어야 할 것 몇 가지를 추려서 그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제시해보았다. 부디 이 제안들이, 비록 빈약한 내용이긴 하지만, 앞으로 풍성한 당 내 토론이 시작되는 데 자극제 역할을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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