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민 대신 좌파 소녀들 봉기하다
        2008년 05월 12일 12:3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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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소가 한국에 격한 논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논란의 첫 번째 원인은 이명박의 ‘입’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 대해 이명박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입장을 갖고 있다.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싫으면 안 사 먹으면 된다.”

    이명박의 고병원성 입

    가히 개인의 자유선택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정치철학계의 수장다운 발언이다. 국가의 역할을 배제 한 채 되도록 많은 것을 개인의 판단과 능력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세계관을 가감 없이 드러낸 것이다.

    이 발언이 전해지는 순간 사람들은 “정부가 나를 지켜주기 위해 별로 노력할 생각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불안감과 불만은 짧은 잠복기를 거쳐 폭발하게 된다. 사람들이 ‘광우병’ 이전에 이미 ‘광우병 걱정증후군’이라는 작은 병에 걸린 것이다. 이 증상의 감염 경로를 추적해보면 그것은 전적으로 ‘이명박의 고병원성 입’에서 비롯되었다.

       
      ▲청계천 촛불시위에 참석한 여학생.(사진=레디앙)
     

    국가의 역할을 되도록 포기하는 이러한 관점은 각종 규제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이번 시위에 중고생들의 참여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청소년층이 학교급식 등으로 광우병에 주요하게 노출되는 대상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사건 앞에 있었던 ‘학교 자율화 조치’도 한몫했다.

    0교시 금지, 강제 보충수업 금지, 우열반 금지, 촌지 금지, 교복 공동구매 지침, 부교재 선정지침 등의 규제가 모두 폐지되고 아이들에게는 좀 더 피곤한 일상이 시작되었다.

    이명박의 유물론적 세계관

    또 한가지, 이명박의 유물론적 세계관도 광우병 논란을 야기 시킨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명박은 어떤 거대한 물질적 업적만을 유일한 가치로 여긴다.

    대운하 같은 토목공사를 중심으로 권력운용을 구상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이렇게 물질중심의 사고를 나는 이명박식 유물론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식의 물질 중심론은 대중과의 소통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도 외국과의 협상을 국내에 노출시키는 전략 즉 국내소통(=내부소통) 전략을 경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부시와의 회담 몇 시간 전에 급히 통과된 쇠고기 협상을 보며 사람들은 십중팔구 이명박이 미국에 뭔가 선물로 준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외국과의 협상이 발생하면 국내적으로는 대개 전문적인 협상 능력을 발휘했을 것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애를 쓰는데 이명박은 되레 스스로 굴욕협상의 냄새를 피웠던 것이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이명박은 몸만 청와대에만 앉아있을 뿐 정작 그가 쥐고 있어야 할 정세 주도권은 거리에서 촛불을 든 고등학생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정세 주도권 고등학생에게 빼앗긴 이명박

    정부가 광우병 문제를 자꾸 확률문제로 바꿔서 이해하는 것도 이런 이명박식 유물론의 연장이다. 정부 측 논리는 광우병 발생 확률이 현실적으로 매우 낮기 때문에 그 낮은 가능성에 일일이 대비하느니 차라리 그냥 걸리는 사람이 ‘에이 재수 없어!’ 생각하고 죽는 것이 총소비자 잉여 차원에서 훨씬 효율적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총투입량’에 대비해 ‘총산출량’이 우세하면 모두 용서가 되는 기업식 세계관을 보여준다. 이명박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넘어서 아예 ‘기업으로서의 나라’를 만들고 있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사장님 입장에서 보면 내부 구성원은 단지 구조조정의 대상이고 일단 잘 보여야 할 것은 외국의 바이어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 같은 효율성 중심 세계관은 환경운동의 예고 기능을 거의 무시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환경운동은 그 동안 사회가 닥칠지 모르는 재앙을 미리 경고하는 기능을 해왔는데 정부와 일부 언론은 이를 ‘괴담’으로 비하하거나 광우병으로 죽을 확률은 담배 피워서 죽을 확률보다 훨씬 낮다는 확률론을 펴왔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어떤 재앙에 대한 경고 기능은 무척 중요한 영역이다. 이를 경시한다면 혹시 만에 하나 북한이 쳐들어올까 무서워서 1년에 십수조 원의 국방예산을 쓰는 것이나, 혹시 만에 하나 대통령이 죽을까 몰라서 1년에 수천억 원의 경호예산을 쓰는 문제를 설명하기 어렵다.

    지난 50년간 미국 교포들이 광우병으로 죽은 사례가 한 건도 없듯이 지난 50년간 우리나라에서는 한건의 전쟁도 안 일어났고 지난 50년간 외부 침입에 의해 대통령이 죽은 경우도 한 번도 없기 때문에 정부가 주장하는 확률론에 의하면 이 가능성들을 대비하며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쓰고 있는 것은 무척 한심한 일인 것이다.

    확률론의 함정

    광우병 논란을 야기시킨 이명박의 제조업식 세계관은 투입 대비 산출, 원가 대비 이윤에 가치를 둘 뿐 인간이 갖고 있는 내면의 고유한 불안감이나 만족감, 추구하는 특유의 가치 따위를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 문제도 안고 있다.

    그러나 흔히 ‘웰빙’이라고 부르듯이 요즘은 단순히 값싼 고기에 대한 욕구보다는 되도록 믿을만하고 질 좋은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하다못해 운동권들이 T셔츠를 만들어도 보기 좋아야 산다. 즉 일방적인 성장보다도 삶의 질을 추구하는 새로운 경향이 밑바닥에서 흐르고 있는 중이다.

    이 웰빙 풍조를 다르게 말하면 ‘초록사회에 대한 잠재된 소망’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식품안전 문제는 이러한 초록 사회와 관련하여 최근에 사람들의 관심이 대두된 부분이다. 이 부분을 간과하는 바람에 정권 초기에 재앙을 불렀다.

    ‘한반도 대운하’라든가 ‘수입 쇠고기 검역기준 완화’ 문제는 이런 초록사회에 대한 소망을 거스르는 것들이다. 대중의 잠재된 초록욕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단순한 성장주의는 시시때때로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쇠고기 문제가 축산농가의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을 뒤엎고, 이례적으로 좌파 여고생의 등장을 촉발시킨 배후에는 이런 사회적 초록 욕망이 흐르고 있다.

    이명박의 딜레마

    이번 사건 속에서 이명박 정권은 집권 초기에 3대 강적과 맞닥뜨렸다. 그것은 10대 중고생, PD수첩, 인터넷 세 가지다. 우리나라에서 통제가 안 되는 대표적인 것들이다. 만약 이명박 정권이 박정희와 별 차이가 없다면 곧바로 이번 사태를 촉발시킨 이명박의 3대 강적에 대한 통제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에 박정희 같은 국가주의자들이 하던 짓이다. 사실 지금 존재하는 여러 가지 사회규제들의 실질적인 기원은 박정희 때라고 할 수 있다.(주민등록번호의 기원을 생각해보자!) 따라서 신자유주의와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 다른 규제들은 다 축소하면서 이것들만 통제하기에는 뭔가 자기 철학에 반하는 것 같다.

    이명박 정권이 진정으로 자유주의 정권이라면 10대들이 대통령 탄핵서명을 받건 좌파소녀들이 핸드폰으로 여고괴담을 퍼뜨리건 상관할 일이 아니다. “쇠고기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된다!”는 철학이 일관성을 지니려면, 자기 자신에게도 “여고괴담 듣기 싫은 놈은 촛불시위에 안 나가면 된다!” 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논점의 진화에 대비해야 한다

    향후의 우리 사회는 어떤 ‘권력 간의 대결구도’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사회문제에 대한 ‘해법간의 대결구도’로 가게 된다. 좌파는 주로 공공성의 개입을 통한 해법을 제시하는 반면 우파는 주로 개인의 개별적 선택에 의존하는 해법을 제시하게 되는 구도가 반복될 것이라는 얘기다.(나는 이를 좌우의 정립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우리는 광우병 문제로 촉발된 이 문제가 결국 ‘공공성의 확보’라는 일반적인 문제에 부딪힐 것이라는 전망을 가져야 한다. 즉 논점의 진화에 대비해야 한다.

    결국 광우병 논란은 이명박과의 싸움이 아니라 어떤 종합적인 가치 체계와의 대립이다. 공무원 축소, 공기업 민영화, 대운하 추진, 학교에 대한 기초 규제 폐지, 쇠고기 검역조건 완화, 의료보험 민영화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일관된 철학과 세계관 위에서 진행 중인 사건들이다. 어쩌면 다음 투쟁은 의료보험 민영화가 될지 모른다.

    우리는 이제 구조조정으로 직장에서 잘린 날, 값 싼 소꼬리 곰탕이랑 소주를 먹고난 뒤 광우병 걸렸는데 의료보험 민영화 때문에 병원도 못 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지 모른다. 한마디로 교육, 의료, 식생활 같은 기초생활의 공공성에 대해 전방위적인 위협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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