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 없는 진보’야말로 기만이다
    2008년 05월 05일 10: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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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4월 25일)과 <시민사회신문> 제 49호에 실린 이재영씨의  ‘풀뿌리는 기만이다’는 글을 읽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글은 한국 진보의 잘못된 편견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또 이런 글이 실렸네’라며 푸념하고 넘기겠지만 이제는 그런 편견에 답을 해야 할 것 같아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작년 10월 1일 열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의 활동가 집담회.(사진=시민사회신문)
 

단순한 비교의 정치적 효과는?

이재영씨는 한나라당의 이한구 정책위의장이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야권이나 노조, 시민단체들이 그에 관해 침묵하는 상황을 일본 자민당 시대와 비교한다.

지난 18대 총선으로 한나라당이 153석을 차지하고 자유선진당이나 친박연대 등의 보수정당을 합치면 전체 의석의 3분의 2가 보수성향의 의원으로 채워졌다.

그러니 한국의 정치 주도권은 보수로 넘어갔고, 여권 내의 정치적인 경쟁만이 남은 듯하다. 이런 보수의 장기집권이라는 점에서 이재영씨는 한나라당 내의 주도권 다툼을 ‘55년 체제’라 불리는 일본 자민당 구조와 비교하는 듯하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상황을 냉전 시기의 55년 체제와 단순 비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그런 비교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장기집권’을 강조해야 총선 이후 무기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소위 진보세력’이 반응을 보일 터이니.

하지만 그런 단순 비교는 매우 위험하다. 보수가 제도 권력을 독점할 가능성은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사회 전반의 보수화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특히 18대 총선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보수화만이 아니라 46%라는 저조한 투표율이다.

투표율은 낮아졌지만 무능한 대표를 통해 말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늘어나고 있다. 만일 투표율이 떨어지는 것을 정치적인 관심의 퇴조로만 분석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부르주아 정치의 틀 안에 갇힌 사고이다.

이미 쇠고기 협상이나 대운하와 관련해 민심은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다. 권력을 좇는 집단들이 우왕좌왕하며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에, 무능한 그들을 대신해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변화의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다만 그 변화의 방향을 어디로 맞출 것인가에 관한 합의가 부족할 뿐이다.

체제의 풀뿌리?

이재영씨는 현재의 보수정국을 벗어나는 방안으로 얘기되는 풀뿌리에 불만이 많은가보다(그의 말처럼 “모두들 ‘풀뿌리’를 이야기한다”면 차라리 좋겠다). 그는 한국에서 논의되는 풀뿌리가 미국과 일본의 탈사회주의적 비정치 사회운동이라는 점에 불만을 품은 듯하다. 심지어 그는 “인민의 파괴적 도전을 완충시키는 ‘체제의 풀뿌리’”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지 않기 때문에 ‘그가 우려하는 풀뿌리’가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다. 하지만 권력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고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풀뿌리의 정치 전략이 탈사회주의, 비정치라는 해석은 어떻게 가능한가? 오히려 그런 운동이야말로 정치적인 게 아닌가?

더구나 그는 ‘소개된’ 풀뿌리를 얘기하고 있는데 그 역시 잘못이다. 그동안 한국에는 풀뿌리 운동이 없었단 말인가? 동학운동, 3.1운동, 빈민운동과 야학운동, 협동조합과 공동체 운동 등 이미 한국에서는 다양한 사건과 영역에서 풀뿌리 운동의 흐름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것에 대한 관심 없이 외국의 경우를 얘기하며 ‘체제의 풀뿌리’라 규정하는 오만함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사실 풀뿌리의 영역인 지역사회에서 진보정당만큼 취약한 세력은 없다. 2006년 민주노동당 지방의원들에 대한 한 설문조사는 ‘해병대 전우회’나 ‘향우회’보다도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이라는 점을 밝힌 바 있다(양희선, 「노동자여, 학교갑시다!」 <노동사회> 제 110호).

잘난 이념을 빌미삼아 외부정치의 무능함을 변명하고 내부정치에만 몰두하고 있는 게 소위 진보정당의 현실 아닌가. 그런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성찰 없이 다른 운동을 헐뜯는 것이 진보정당의 앞날을 위해 긍정적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지금 진보가 취해야 할 시급한 전략은 자신의 풀뿌리 기반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일본의 혁신자치체 실험이 실패로 끝난 것은 그런 기반 없는 혁신정치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를 증명한다. 55년 체제 이후에 진행된 다양한 정치실험에 주목하지 않고 자민당 시대에만 초점을 맞추면 외부의 경험에서 배워야 할 점이 없다.

풀뿌리의 이념이 필요하다!

이재영씨는 이렇게 충고한다. 자신의 정치적 에너지를 오로지 집권을 위해서 사용하는 ‘이기적 정치’를 하라고. 고매한 이상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라고.

그런데 마키아벨리가 말한 것이 고작 인민의 미래를 위해 제 얼굴에 똥칠을 하라는 건지는 모르겠다. 더구나 인민은 바보인가? 여전히 누군가가 자신의 미래를 대신 고민하며 똥칠을 해야 할 정도로. 사실 내가 민중을 대신하고 민중보다 훨씬 더 그의 이익을 잘 대변할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대의제도에 갇힌 정치의식이고, 공화주의자 마키아벨리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편견이다.

그리고 집권을 위해서 당위나 대의명분같은 것을 야멸차게 버려야 한다면 그것이 왜 진보인가? 당위나 대의명분이 없다면 왜 운동을 하는가? 단지 집권을 위해서? 만일 그런 세력이 집권하면 지금과 무엇이 다를까? 지금이야말로 제대로 된 이념을 세워야 할 때이고 그 이념은 몇몇 이념가의 머리가 아니라 민중의 가슴에서 나와야 한다. 풀뿌리는 바로 그 점을 얘기한다.

독설은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줄 때에 빛을 발한다. 하지만 정확한 진단 없이 무차별적으로 퍼붓는 독설이라면 상처만 남길 뿐이다. 지금은 다른 이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겠지만 결국은 그 자신도 상처를 피할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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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시민사회신문>에 기고한 글로, 필자와 <시민사회신문>의 동의를 얻어 함께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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