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방적 욕망을 급진적 욕망으로
        2008년 04월 29일 12: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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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2008년 4월 30일 열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주최 토론회에서 발표될 조희연 교수의 토론문을 요약한 것이다. 연구소 창립 13주년을 기념해서 열리는 이번 토론회 주제는 ‘노동자 정치세력화 살릴 것과 버릴 것’이며, 박상훈 박사와 신광영 중앙대 교수가 발제자로 참여한다.

    토론자는 이영희 민주노총 정치위원장(18대 총선 후보), 양정주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장, 이수호 민노당 비대위원, 전재환 진보신당 인천시당 공동대표(금속연맹 전 위원장),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 조희연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 등이다. <편집자 주>

    다양하게 열린 한국정당정치 질서의 가능성

       
     
     

    한국정당정치 앞에 열려진 다양한 가능성은 다음과 같다
    i) 보수(우파)정당이 패권적 지위를 갖는 일본형 정당정치 경로
    ii) 진보정당이 착근하지 못하고 보수정당과 중도자유주의정당이 경쟁하고 정권교대를 하는 미국형 정당정치 경로

    iii) 보수(우파)정당과 진보(좌파)정당이 기본축으로 경쟁하고 거기에 다양한 군소정당들이 경쟁하는 유럽형 정당정치 경로이다.

    한국의 진보정당은 제도정당이면서 동시에 사회운동이기도 하다. 제도정당은 주어진 ‘사회적・계급적 지형’ 내에서 더많은 지지를 받기 위해서 경쟁하는 집단이며, 사회운동은 바로 그 지형 자체를 바꾸고자 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국의 진보정당은 양 측면에서의 병행적 실천전략을 구사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명박 정부를 한국형 ‘신보수정권’이라고 규정하는데, 영국에서는 80년에 대처 신보수정권이 출현한 이후 17년 동안 신보수정권이 연속집권하였다. 그러다가 97년에 정권교체가 되는데 그때 ‘전면적인 좌파정권’으로 이행한 것이 아니라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과 같이 더욱 ‘우경화된 노동당’으로서 집권하였다.

    이 말은 신보수의 영향력이 재집권한 좌파의 ‘우경화’를 동반하는 식으로까지 작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5년 후에 한국정치와 한국사회는 한나라당의 재집권이냐 ‘우경화된 중도자유주의개혁 정당’이냐의 선택에-진보정당의 성장수준에 따라-다시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

    자유민주주의적 개혁단계에서 사회(적)민주주의 개혁단계로의 병목

    그렇다면 한국사회가 어떤 지점에 있는가. 단적으로 지난 20년 동안 한국사회는 ‘자유민주주의적 개혁단계’를 거쳐 왔다고 생각하고 이제 ‘사회(적) 민주주의적 개혁단계로 이행하는 ’병목지점‘에 처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는 그 병목지점에 서 있고 이러한 병목지점을 돌파하지 못하고 ‘신보수정권의 출현’이라고 하는 우회로도 들어섰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 단계 높은 대중적 추동력을 형성하고 한 단계 높은 한국사회의 업그레이드를 위한 동력을 형성하는 시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있어야 만이 정당정치구도 자체도 더욱 전향적인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진보정당은 제도정당으로 원내외의 기반을 활용하면서 또한 사회운동정당으로서 이러한 기반형성을 성취해내야 한다.

    사회경제적 개혁주의를 실현하는 새로운 ‘반신자유주의 정치’의 강화와 급진적 민생정치

    위와 같은 한 단계 높은 진보를 위한 정치적・사회적 동력은 가장 핵심적으로는 ‘반(反)신자유주의적 정치’의 강화와 그것의 대중화 속에서 마련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신보수 정권 하에서 급진진보적 정치세력과 사회세력이 사회경제적 개혁주의를 내부화한 ‘반신자유주의 정치’를 대중화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전면적인 신자유주의적 경쟁국가’를 지향하며 ‘경제살리기’와 줄푸세(“세금과 정부규모를 ‘줄’이고, 불필요한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자)라는 이명박 정부의 슬로건에서 드러나듯이 전면적인 조야한 신자유주의정책의 담지 정권이다.

    이것은 분명 60・70년대의 ‘파쇼적 보수’와는 다른 것이지만, 우리가 신자유주의라고 명명하는 어떤 현상에 대해서 대중들의 수준에서 그 문제점과 모순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내는 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어떤 의미에서 반신자유주의적 정치의 대중화와 그 속에서 진보적・급진적・좌파적 세력들의 대중적 기반을 형성하기가 용이할 수도 있다.

    이러한 반신자유주의적 정치는 현실적으로는 ‘급진적인 민생정치’로 표현된다고 생각한다. 이번 총선에서도 보여졌듯이 대중의 사회경제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의제들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사실 주거, 보건의료, 교육, 노후생활 등 핵심적인 복지영역에서 지난 10년과는 다른 대치선을 쳐야 한다.

    이에 대해 새로운 급진적 지평을 열어야 한다. 2004년 총선에서 ‘4대 개혁입법’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 자체는 분명 중요하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가 돌파하지 못한 장애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제 ‘4대 사회경제 개혁입법’ 같은 것을 사고해야 한다.

    우리에게 복잡한 정세는, 뉴타운 개발 등으로 표현되는 대중들의 새로운 물질적인 ‘욕망’은, 사실 민주화과정에서 억압된 소외된 정서가 표현된 것이라고 하는 점이다. 자신들을 소외시켰던 개발독재 시대의 수혜자들의 개발을 자신들이 향유하고자 하는 ‘모방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공적・사회적 대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기존의 개발프레임 속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이번 총선에서 표현된 뉴타운 개발 선풍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방적 욕망’을 어떻게 ‘급진적인 욕망’으로 전환할 것인가 하는 데에 급진적 민생정치와 반신자유주의적 정치의 과제가 존재한다.

    이러한 작업을 가속화하기 위하여, 진보적 정당 내부에서도 다수의 정책의견그룹들이 존재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일사분란함’을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급진적 지향을 공유하면서도 하위수준에서의 차이를 보장하는 것도 정당활동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필요할 수 있겠다.

    진보정당의 ‘분열’과 ‘분화’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분당반대론에 입장에 서 있었다(역사적으로 2008년 2월 3일의 사태를 어떻게 평가될 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나는 NL이나 PD 등으로 상징되는 노선이나 이념의 ‘차이’가 현실에서 어떤 조직적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어느 하나의 방향만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분화가 오히려 두 진보정당 내부에서 PD는 ‘NL적 PD’로 확장변화하고 반대로 NL은 ’PD적 NL’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자주파와 평등파가 경쟁집단의 의제를 자기 방식대로 ‘전유’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분화가 보기에 따라서는 ‘NL과 PD의 상호침투’와 자기확장이 일어나는 계기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정당으로의 분화는 불가피하게 양자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하게 된다. 차제에 민주노동당 내부에서도 더욱 다양한 분화들이 나타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NL은-PD도 그러한데-더욱 분화되고 ‘분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자의 표현대로 NL은 ‘NL들’로 분화되어야 한다. NL적 정치 내부의 다양한 차이들이 주목되고 ‘남한 독자적인 NL적 흐름이 확산되어야 한다(물론 현실적으로 당내 권력관계나 패권주의의 문제는 별개의 차원에 존재하지만, 이념적으로는 최소한 그렇다).

    NL의 반식민주의적 행동주의는 단지 ‘민족-민족주의’적 범주 속에서 고착되어 표현될 필요는 없다. “식민화의 흐름에 대항하는 반식민지 행동주의는 국가 내부에, 국가 외부에, 우리들 내부에서 다양한 식으로 관철되고 있고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식민주의적 힘은 남한 내부로 본다면 ‘민족적 외세’로서의 미국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며 이미 남한의 친미적 세력들, 남한 내부의 자본세력들 등으로 ‘자립’하여 존재하고 있다(남한의 대자본은 이미 독자적으로 남한민중에 대한 식민화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별히 남한에서 변혁운동의 복원은 북한과는 구별되는 ‘반외세적 남한진보역량’의 독자적 존재를 가능하게 했다. 이런 점에서도 NL은 결코 이른바 ‘종북적 흐름’이 대표할 수 없으며 오히려 남한의 ‘복합화된’ 식민주의적 힘에 대응하는 ‘복합적’ 저항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민주노총당과 노동자당, 사회운동당이라는 ‘낙인’에 대하여

    현재의 난점은 초기산업화 단계의 계급형성이 ‘중단’되고 어떤 의미에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2차 산업화과정에 의해 노동자계급의 ‘해체적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87년 체제’ 이전 반독재 운동의 과정 속에서, 그리고 ‘87년 체제’ 이후의 노동운동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 ‘97년 체제’ 이후 새롭게 역전(逆轉)의 흐름에 놓이게 된 것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적 보수혁명’의 영향과 한국에서의 보수가-과거의 ‘파쇼적 보수’에서-‘신보수’로 전환하면서 노동자계급과 대중들의 새로운 순응을 촉진하면서 그들의 개별화와 파편화를 촉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조건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재구성적 강화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진보정당이 노동자계급의 정치화의 선도부대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재구성적 강화의 촉진역할을 담당하는 방식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민주노총당, 노동자당, 사회운동당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어느 지점에서의 혁신지점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명예로운 별칭’이며 그것을 부정적인 낙인으로 만드는 조건을 ‘돌파’해야 하는 것이지 우회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진보정당과 노동조합의 운동의 동맹관계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배타적 지지와 부문 할당제의 구도를 해체하기보다는 유지하는 바탕 위에서 문제점들을 보완해가는 것이 좋지 않은가 생각된다.

    i)현재의 배타적 지지를 유지하면서 노동조합원의 획득을 위한 경쟁을 벌이는 방법
    ii)다음으로는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의 합리적 핵심을 계승하면서 ‘선택적 진보정당 지지‘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보수정당이나 중도리버럴 정당에 대한 지지를 배제하면서 경쟁하는 진보정당들 내부에서 선택하여 지지하도록 하는 방안 같은 것이다. 만일 다수파 지위를 가진 지도부가 ‘배타적 지지’를 ‘기득권’의 형태로 활용하고자 한다면, 진보신당은 그 배타적 지지를 허무는 식으로 경쟁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장기적으로는 일반 노동조합원들의 진보적 지지 철회나 무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노동자 정치세력의 분화로 그것이 많은 노동자대중의 침묵, 중립적 태도로의 변화, 냉소 등 다양한 부정적 반응을 동반할 수 있다.

    따라서 다수파가 ‘배타적 지지’ 원칙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당 분화의 현실’을 인정하고 ‘진보적 개방투표’같은 형태를 사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노동자계급 급진주의와 중간층 급진주의의 긴장

    그런데 물론 이러한 노동조합의 동맹적 관계가 중간층 지지 획득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 고민이 존재한다. 특히 생태, 평화, 자율 등의 가치를 가지고 신좌파적 진보성을 결합시키고자 하는 진보신당의 경우에는 고민이 더 클 수 있다.

    사실 문국현 공간의 획득이나 민주노동당의 ‘대중적 혁신’의 과제는 사실 중간층을 포함한 일반대중의 획득문제라고 생각되기 때문된다. 현재와 같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중도리버럴 정부의 실패로 대중생활의 위기상황에서 중간층도 급진적인 요구를 수용할 공간이 커지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이 양자 간에 긴장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 양자가 긴장이기는 하지만 모순과 대립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렵지만, 노동자계급의 계급정치적 급진화와 새로운 진보적 가치를 통한 급진적 중간층의 획득이라는 것을 결합시켜 가려는 노력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급진적 진보성을 접합(接合)・전유하는 문제에 대하여

    셋째, 어떻게 진보정당이 새로운 급진적 진보성을 결합시켜 내야 할 것인가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의 좌파와 진보는 19세기와 20세기의 좌파와 진보와 달라야 하는 지점이 있다.

    새로운 신자유주의적 경쟁드라이브가 촉발하는 신빈곤과 새로운 양극화에 대응하는 신계급적 진보성, 생태주의적 진보성, 신좌파적・신사회운동적 진보성을 어떻게 결합시켜 낼 것인가 하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진보정치운동가들과 사회운동가들의 다수는 ‘문화적 보수주의자’일 수 있다. 생활세계 내에 존재하는 각종 권위주의, 규율, 금욕적 세계관을 넘어서서 급진적 문화정치의 관점을 진보정당과 사회운동이 결합시킬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진보적 입장에서 자유와 자율을 더욱 급진적으로 확장하는 시각을 가져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급진적인 ‘가치의 정치’가 어떻게 급진적인 욕망의 정치와 결합될 수 있는가하는 고민도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구세대의 ‘금욕의 정치’를 과감하게 벗어나야 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대안적 현실전형을 만드는 문제에 대하여

    넷째, 이명박에게는 청계천이 있다. 문국현에게는 유한킴벌리가 있다. 진보정치세력에게도 바로 이러한 대안적 현실전형을 만드는 고민을 해야 한다. 진보정치세력이 이러한 보수적・중도개혁자유주의적 현실전형에 맞서는 진보적・급진적인 현실전형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민주노동당이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승리하였던 울산에서 대안적인 현실 전형을 만들지는 못했다. 아니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문제의식이 부족했다고 생각된다. 지금이라도 이런 고민을 심도 있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진보정당은 대중들에게 그래도 대안적 현실전형의 ‘맛보기’를 어떻게 제시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 * *

    * 조희연 교수의 토론문 전문은 <레디앙> 독자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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