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진보정당 없는 민주주의로 가나
        2008년 04월 28일 07: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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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2008년 4월 30일 열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주최 토론회에서 발표될 박상훈 대표의 발제문을 요약한 것이다. 이 글의 바탕이 된 문건은 사전에 토론자의 토론 준비를 위해서 만들어진 자료로서 발표 때까지 내용이 수정, 보완될 수 있다.

    연구소 창립 13주년을 기념해서 열리는 이번 토론회 주제는 ‘노동자 정치세력화 살릴 것과 버릴 것’이며, 박 대표와 함께 신광영 중앙대 교수가 발제자로 참여한다.

    토론자는 이영희 민주노총 정치위원장(18대 총선 후보), 양정주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장, 이수호 민노당 비대위원, 전재환 진보신당 인천시당 공동대표(금속연맹 전 위원장),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 조희연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 등이다. <편집자 주>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이후는?

       
     
     

    “한국이 미국이나 일본처럼 ‘진보정당 없는 민주주의’ 유형으로 고착될 것인가, 계층 이념별로 분화된 사회적 조건에 조응해 진보정당이 중요한 정치적 역학을 하는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 유형을 갖게 될 것인가,”

    진보정당과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전망을 담은 주목할 만한 논문 한 편이 발표됐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오는 30일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주최한 ‘노동자 정치세력화 살릴 것과 버릴 것’이라는 제목의 토론회 발제문을 통해 이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한국에서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의 미래가 지금 매우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 발제문에서 “한국의 진보파가 현대 민주주의 그리고 현실적 표현으로서 정당이 중심이 되는 대중정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한 문제”가 이 같은 평가의 근본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적하며 이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하고 있다.

    그는 “요컨대 ‘현실의 실패’ 이전에 ‘이론의 실패’가 먼저 있었다는 점, 따라서 이 차원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진보적 정치학을 확립하는 변화 없이는 앞으로의 상황도 크게 달라지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노동 참여 기반한 강한 진보정당이 핵심

    그는 “민주주의가 가져온 사회적 성취가 나라마다 다른 이유는, 조직 노동에 바탕을 둔 진보정당의 존재 내지 그 영향력과 매우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며 “조직 노동과 진보정당의 영향령이 클수록 투표율이 높고, 사회경제적 불평등 정도가 작고, 빈곤율이 낮으며… 문화적으로도 풍요롭다”고 밝혔다.

    그는 따라서 “노동의 참여와 그에 기반을 둔 강력한 진보정당을 만드는 문제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 프로젝트를 만드는 데 중심 문제 중의 중심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의 진보파가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지지할 사회적 기반과 유권자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로부터 정치적 신뢰를 얻지 못했다”며 이는 진보파가 “자신들이 원하는 가치와 이념의 실현을 위해 민주주의를 이용하려 했지만, 거꾸로 민주주의와 정치를 가난한 서민대중의 이익실현을 위한 효과적 무기로 전환하기 위한 노력은 크게 기울이지 않았던”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박 대표는 “요컨대,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대중정치에 적용하는 문제는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진보정당의 대중적 발전에서 매우 중대하고도 핵심적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보수 양당 체제가 지배적인 현실에서 진보정당이 제3당의 대중적 입지를 만들어가는 것이 점점 힘들어 질 수 있으며, “이 체제가 공고화돼 새로운 가능성에 문을 폐쇄하기 전에 진보정당이 밀고 들어갈 시간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고 경고했다.

    다음 지방선거와 총선이 마지막 기회될 수도

    그는 이어 “05년 지방선거, 07년 대선, 08년 총선에 이어 2010년 지방선거와 2012년 총선에서도 지금까지와 같은 관성이 지속된다면 진보정당 없는 정당체계의 공공화는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 사회가 진보정당 없는 민주주의 길로 고착화된다는 뜻이다.

    박상훈 대표는 “지금까지 역사에서 정당 체계의 변화가 만들어진 사례는, 기존 정당체계 밖에서 정당의 충격, 즉 외생정당의 충격 이외에 다른 경로가 없었다”는 ‘제3당 충격이론’의 실제를 강조하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진보파들이 새로운 제3당의 충격을 조직할 만한 정치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결정하는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박상훈 대표의 발제문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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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와 관점

    이 발표문의 목적은, 오늘의 시점에서 한국에서 조직노동에 기반을 둔 진보정당의 도전이 어떤 제약과 가능성을 갖는가 하는 문제를,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의 긴 정치변화의 맥락에서 살펴보는 데 있다.

    논의의 맥락을 넓게 설정하려는 이유는, 지난 대선과 뒤 이은 분당 그리고 이번 총선을 거치면서 빠르게 국지화 내지 게토화되고 있는 진보정당 문제를 다시금 사회화하고, 이를 정파적 언어를 넘어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문제를 재조명해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현재의 일본처럼 진보정당 없는 민주주의 유형이 고착될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으로는 이미 분화되어 있는 계층적·이념적 차이에 상응해 진보정당도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하는 정당체계 즉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 유형을 갖게 될 것인가는, 향후 한국 민주주의가 어떤 내용과 질을 갖게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후자, 즉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의 미래가 지금 매우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는 현실이다.

    이 발표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 중의 하나라고 생각되는 것, 즉 한국의 진보파가 현대 민주주의 그리고 현실적 표현으로서 정당이 중심이 되는 대중정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한 문제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요컨대 ‘현실의 실패’ 이전에 ‘이론의 실패’가 먼저 있었다는 점, 따러서 이 차원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진보적 정치학을 확립하는 변화 없이는 앞으로의 상황도 크게 달라지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발표자가 우리사회 진보파들에게 갖는 가장 큰 불만은, 분명 그들 역시 권력정치를 하고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를 위해 다투고 있는데도 늘 언어의 구사에 있어서는 이런 현실을 회피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다보니 모두가 스스로를 권력과 이해관계에 초연한 역사적 역할자로 정의하거나, 자신은 안 그런데 상대가 권력과 이해관계를 다툰다고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또 자신은 원치 않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권력과 이해를 다투게 되었다는 식의 자기 위선과 자기 변명의 문법이 일상화되었다.

    정치의 현실을 다룰 언어가 없다면, 갈등을 합리적으로 다룰 수 없고, 기껏 누가 더 도덕적으로 규탄받아야 하는가를 따질 수밖에 없다. 그것도 공론의 장에서 이루어질 때는 상호 자기파멸적 효과를 가져올 것이기에 은밀한 방법과 보이지 않는 배타성 내지 내부자라면 누구나 이를 감지할 수 있는 집단적 분위기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가져오는 부정적 결과는 거의 파멸적인 것에 가깝다. 그러니 진보정치의 영역 내부에서 갈등과 균열이 생길 때마다 도덕주의적인 집단 선택이 강요되고 결과적으로는 스스로의 사회적 기반을 끊임없이 축소시키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악순환을 끊지 않는 한 진보정치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논의들은 같은 결과를 낳지 않을까 한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문제

    많은 연구자들은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제한적인 민주주의’라고 정의하거나 ‘종속적’, ‘파시즘적’, ‘(신)자유주의적’, ‘개량적’ 등 접두사를 붙여 설명했다. 다시 말해 아직 실현되지 않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전제하면서 아직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였던 것으로 이해했다.

    적어도 90년대 초반까지 민주주의는 급진적 사회변혁의 가능성과 중첩되는 의미를 가졌고, ‘민주 변혁’이란 용어가 광범하게 사용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민주주의는 불완전한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낭만적 모멘트 혹은 변혁적 운동의 계기로 받아들여졌다.

    그만큼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문제에 있어서 한국의 진보파는 매우 무력했고, 현실에 밀려 과도한 기대와 때 이른 절망을 반복하는 데 그쳤다고 할 수 있다. 대체 민주주의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 발표자에게 민주주의가 가져온 사회적 성취가 왜 나라마다 다른가를 묻는다면, 그러한 차이는 조직노동에 바탕을 둔 진보정당의 존재 내지 그 영향력과 매우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대체로 조직노동과 진보정당의 영향력이 클수록 투표율이 높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정도는 작고, 빈곤율도 낮으며, 소비사회로 경도되는 정도도 덜하고, 사회가 성장과 경쟁의 논리에 의해 일방적으로 내몰리는 정도가 작고, 폭력의 정도나 범죄율이 낮으며, 문화적으로도 풍요롭다.

    반대로, 노동운동이 이념적으로 공격받고 그들이 지향하는 사회적 가치가 정치적으로도 과소대표 될 때 그 나라의 민주주의의 질은 낮고, 공동체적 관념은 취약하며,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토양 역시 척박하다.

    한마디로 말해 노동의 참여와 그에 기반을 둔 강력한 진보정당을 만드는 문제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 프로젝트를 만드는 데 있어서 중심 문제 중의 중심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은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 모델을 가질 수 있을까? 이른바 ‘미국적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로 일컬어지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노동에 기반을 둔 진보정당이 없는 정당체계)의 경로를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신자유주의 세계화 때문에 어쩔 수 없다거나, 남북한의 분단을 먼저 극복해야만 진보정치가 열릴 수 있다거나 하는 식의 외재적 환원론은 근본적으로 미국 예외주의적 접근(즉, 다른 나라와 다른 미국적 예외에서 그 원인을 찾는 접근)의 한국판일 뿐이다.

    사실 미국의 진보정당 없는 민주주의 모델이 1920년대 이전에 이미 확립되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사후적 관점에서의 이야기일 뿐 이미 예정된 대로 결과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1901년 창당한 사회당은 1912년 선거를 전후해 2명의 연방 하원의원과 70여명의 시장을 배출했다. 그랬던 그들이 정당으로서 존립하지 못하게 된 중심적인 이유는, 원내 진입 이후 민주정치에 적응해 강력한 대중적 정당 조직을 발전시키는데 실패했다는 데 있다.

    지금의 한국 진보파가 겪고 있는 어려움 역시 민주주의를 정치의 무기로 활용하는 방법에 있어서의 무능력, 당조직을 응집력있게 재편, 강화하는 데 있어서의 무능력에서 비롯되는 바 크다고 생각한다.

    대다수 진보파들은 민주주의와 대중정치를 이해하고 적응하기보다는 기존의 자신들이 견지했던 이념의 언어로 현실을 재단하고 대중을 계도하려는 태도가 더 두드러지기도 했다. 혹은 권력과 권위, 갈등과 대립, 리더십과 통치의 기능을 부정하는, 일종의 정치의 현실을 초월한 급진적 운동론으로 정치조직의 통합력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가치와 이념의 실현을 위해 민주주의를 이용하려 했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거꾸로 민주주의와 정치를 가난한 서민대중의 이익 실현을 위한 효과적 무기로 전환하기 위한 노력은 크게 기울이지 않았다.

    ‘어떤 민주주의인가’를 이해하는 문제

    사회갈등의 파당적 집약과 경합의 조건 없이 다수 지배와 공동체의 통합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현대 민주주의론의 알파이자 오메가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가 해결해가야 할 과제는 양심적인 정치가나 공익적인 대통령을 뽑는 사인화된 문제로 환원될 수 없고, 시장원리와 법의 지배, 전문가주의 등 초당파적 원리가 지배하게 하는 것이 될 수 없으며, 모든 정치행위자들의 이익 추구의 경향을 없애고 모두가 공익에만 봉사하게 하는 의식 개혁 운동으로 치환될 수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계층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지극히 협애한 정치적 대표 체제를 변화시키는 문제, 그 중에서도 지금의 정당체계에서는 대표되지 못한 사회의 하층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심적인 생산자 집단인 노동자의 이해와 열정을 실현할 수 있는 정당이 한국 민주주의의 구조와 특징을 설명해주는 주요 정당으로 기능할 수 있게 하는 문제로 모아질 수밖에 없다.

    기존의 지배적 접근은 초당파적 지식인과 전문가, 운동, 시장원리, 법의 지배 등을 강조하면서, 민주주의란 사회 갈등에 기초를 둔 파당적 대표체제의 기초 위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에 따른 다수지배적 원리로 운영된다는 사실을 자주 부정적인 것으로 억압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로의 전환은 곧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정당’을 필요로 한다. 민주화 이후 집권당이 된 과거의 야당이 반독재 정당으로서의 역할을 해 왔다고는 하지만, 정당 조직의 차원에서 근대적 대중정당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의지나 능력을 갖지 못했다.

    민주화를 가져왔던 운동은 정당으로 전환하지 않았고 ‘통일 전선 운동’에 매몰되면서 스스로의 역량을 서서히 소진해 갔는데, 사실상 그 다른 이면은 운동권 엘리트들이 개인적 차원의 결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제도권 정치 엘리트로 변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현실정치에 운동권이 많이 참여하게 되었지만 이들로 인해 정치가 달라지기보다 역으로 이들이 먼저 기존 정치의 낡은 틀에 통합되어 버렸다. 기대를 모았던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정당들 역시 넓게 보면 교육받은 중산층의 정치관이 지배하는 엘리트 정당의 유형이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다.

    아마도 혹자는 ‘정당의 위기’, ‘정당의 쇠퇴’를 말하는 여러 논의를 인용하면서,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의 길 자체를 부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복지국가의 위기를 말하고 신자유주의가 대세임을 강조하면서 복지국가로의 노력을 시대착오적인 것이라 공격하는 논리들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민주주의가 민중적 내용을 갖기 위해 반드시 발전시켜야 할 정치적 조건을 부정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갖기 쉽다.

    한스 달더가 강조하듯, “대개 정당의 위기라는 주장은 정당을 싫어한다는 것을 달리 말하는 것일 뿐”인 경우가 많다.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가 충분히 발전한 뒤 새로운 도전과 요구에 맞춰 변화해 왔고 또 계속해서 변화의 압박을 받고 있는 서구의 정당과는 달리, 이제 정당 민주주의의 단계를 거쳐야 할 우리의 경우 ‘정당 없는 민주주의’의 경로를 강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정치와 정당의 세계를 이해하는 문제

    당내 정파는 한국 사회 진보파를 괴롭혀 왔던 대표적인 문제였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정파의 존재 때문에 문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파의 존재와 이들 사이의 경쟁이 당내 활력과 에너지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정파의 문제를 그렇게 다루지 못한 것, 다시 말해 리더십이 기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였던 것이다.

    막스 베버는 ‘지도자가 있는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지도자가 없는 민주주의’에서는 대중권력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정파와 붕당이 지배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대중과 대표를 연결하는 수직적 책임성(vertical accountability)이고, 이는 이념과 집단, 조직 등의 차원에서도 이루어져야겠지만 구체적 인물과 지도자를 초점으로 한 직접적 대표성(direct representation)의 원리에 의해서도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진보정당은 정치적으로 더 강해져야 하고, 그러려면 사회적 요구를 구체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리더십 형성이 시급하다. 과거 민주노동당의 사례로 볼 수 있듯, 한국의 진보정당은 개인으로 상징되는 리더십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정당조직 모델을 고집했다. 아마도 이 점은 다른 나라에서도 유사 사례를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진보정당이 갖는 자원과 잠재력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빈약한 성과로 이어졌다.

    그간 한국의 진보정당은 보수정당과는 달리 ‘인치의 과잉’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기대와 대중적 열망을 응집시킬 수 있는 ‘인치의 부족’ 즉 리더의 부재 때문에 더 많은 문제를 낳았다.

    아데나워 시대의 독일기민당, 브란트 시대의 독일사민당, 맥도날드 시대의 영국노동당, 미테랑 시대의 프랑스 사회당, 베를링게르 시대의 이태리 공산당을 말하듯, 진보정당도 리더십의 특징과 결합된 직접적 책임성의 구조를 발전시키는 데 소극적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은 얼마나 열려 있는가

    한국의 유권자는 현실에 만족하기보다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 따라서 기대는 크고 그것도 매우 빠른 기간 안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불만으로 전환하는 시간은 매우 빠르다. 한마디로 기대효용에 대한 시간할인율이 매우 높다.

    반면 정당들 역시 조직적 기반은 안정되어 있지 못하며, 당내 여러 세력들 사이의 정치적 자산을 다투는 경쟁이 치열하고, 선거 때마다 유동성과 불안요인을 매우 크게 갖는다. 당명 변화와 세력 교체 및 이합집산이 잦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도 보수양당체제는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향후에도 진보정당이 이러한 정당체계를 파열해 들어오지 않는 한, 정권이나 정당들은 불안정하고, 유권자의 불만은 더 커지더라도 보수양당체제는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사례가 보여주듯, 보수 양당체제가 갖는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정당들이 이념적으로나 정책적으로 매우 유연하다는 데 있다. 달리말해 지지표를 늘릴 수 있다면 양극화든, 민생이든, 비정규직이든, 88만원세대든, 진보든 생태든, 웬만한 이슈에 반응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제3당의 대중적 입지를 만들어가기는 점점 힘들어질 수 있다. 이 체제가 공고화되어 새로운 가능성에 문을 폐쇄하기 전에 진보정당이 밀고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2005년 지방선거, 2007년 대선, 2008년 총선에 이어 다음 번 지방선거와 총선에서도 지금까지와 같은 관성이 지속된다면 진보정당 없는 정당체계의 공고화는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피터 마이어는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정당체계의 변화가 만들어 진 사례는, 기존 정당체계 밖에서의 정당의 충격 즉 외생정당(externally originated party)의 충격 이외에 다른 경로는 없었다고 강조한다.

    한국의 사례로 정당체계 변화 이론을 테스트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적어도 실천적인 차원에서 중요한 것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진보파들이 새로운 제3당의 충격을 조직할 만한 정치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답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민주주의와 정치의 언어를 진보의 자원으로 바꾸고 매우 강력한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해 현재와 같은 분열을 극복하고 대중적 신뢰를 확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기존 정당들에 대해 불만과 비판을 갖고 있는 다수의 유권자들에게 보다 나은 정책적 대안을 공급할 능력을 갖춘 새로운 엘리트와 활동가를 양성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원내외에서 여러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정치세력과 사회집단 등과 능동적으로 경쟁하고 연합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의 문제, 그리하여 당장은 어렵다 해도 집권의 의지와 비전을 대중들이 신뢰할 수 있게 할 능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 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 발표문 전문은 <레디앙> 독자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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