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명이 아니라 말의 전략이다
    2008년 04월 22일 03: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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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표 씨의 칼럼을 잘 읽었다. 이 칼럼의 주장은 미진한 것이었으나, 나름대로의 가치는 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이 칼럼이 ‘말의 힘’, ‘말의 환기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대중 정치 전략, 대중 정치 실천에서 ‘말의 힘’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 칼럼의 주장은 독자에게 무언가 미진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그의 주장이 “진보의 재구성이 아니라 좌우의 정립이다”에서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옳은 말이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어떻게 좌우의 정립을 이루어낼 것인가가 정작 중요한 것이다.

혹자는 당황스러워하겠지만, 진보란 말은 이미 낡은 말이고, 비효율적인 말이다. 이것은 홍기표 씨가 이미 잘 지적하였다. 하지만, 경제성장이라는 지금 식으로의 진보가 전 지구적 파멸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점에서도 역시 진보라는 말은 당대의, 미래의 좌파의 가치가 될 수 없다.

어떻게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를 끌어올 수 있을까?

그렇기는 하나, 그렇게 숱한 사람들이 그렇게 숱한 시간과 장소에서 사용해온 진보/보수의 정치담론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좌파/우파의 정치담론으로 교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노동자층’을 좌파 지지층으로 끌어올 수 있을까.

어떻게 그들이 방송의 인터뷰에서 “그들이 좌파여서 나는 그들을 지지한다”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게 할 수 있을까. ‘좌파’라는 말은 어떻게 보편화되고 어떻게 그 온당한 의미로서 다수의 대화에서, 식탁에서, 공사판에서, 산에서, 노래방에서, 인터넷 블로그의 숱한 글에서, 핸드폰의 문자 메시지에서, 라디오에서, TV 쇼 프로그램에서, 지하철에서, 기업의 중역 간부 회의실에서 사용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단어 그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파를 초월해 사용되는 보편적인 말, 다수가 사용하거나 사용할 수 있는 말, 그 의미가 일정하게 왜곡되거나 오염되지 않은 말, 그리하여 코미디언도 자기 언어로 차용해서 쓸 수 있는 말들로 담론 전략과 그 틀을 재편하는 일도 지금 좌파 정치의 원대하고 새로운 출발을 생각하고 있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출발 선상에 있던 정치세력은 늘 살아 있는, 정치적 생명력이 있는 담론 전략을 구사해왔다. 전두환 정권에게 그것은 ‘정의 사회 구현’이었고, 노태우 정권은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였고, 김영삼 정권에게 그것은 ‘최초의 문민정부, 문민 민주주의’였고, 김대중 정권에겐 ‘국민의 정부’였고, 노무현 정권에겐 ‘참여정부, 개혁과 번영’이었고, 새 정부에게 그것은 ‘실용의 시대, 국민을 섬기는 정부’인 것이다. 한 정치블록은 이렇게 말의(선택과 사용) 전략에 신중해야 하고, 단어와 어구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써먹어야 한다.

그리하여, 좌파 정치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이라면, 회의석상에서 입으로 발설하거나 혹은 눈으로 읽게 되는 일련의 어휘목록을 다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을 설득시키는 바로 그 힘으로, 바로 그 말의 힘으로, 그이는 수천 명, 수백만 명을 설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에겐 기이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모호하거나 오염된 말들, 대중들의 일상생활에서 외면받고 있는 말들, 일부 대중들로부터 집단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이지메를 받아온 말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민중, 노동자, 자본가, 진보, 계급, 혁명, 좌파, 사회주의 따위의 말들을 일정하게 필요한 컨텍스트에서만 제한적으로만 사용하거나, 혹은 다른 말로 대치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다른 말, 다른 전략

그러니까 회의석상에서도 회의석상에 제출하는 글에서도,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이 선호하거나 선호할 말들, 사용하고 있거나 사용할 수 있는 말들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가령 민중은 ‘풀뿌리 대중’, ‘민초’ 혹은 ‘힘없는 시민’, 노동자는 ‘직장인’ 혹은 ‘생산자’, ‘생산직 노동자’, 악덕 자본가는 ‘독점 기업인’, ‘부패 기업인’, 진보 세력 혹은 좌파는 ‘녹색복지주의자’, ‘녹색민주주의자’, ‘혁신 민주주의자’, 계급화는 ‘사회적 양극화’, 혁명은 ‘사회적 기틀의 혁신적 재편’ 혹은 ‘혁신적 변화’, 사회주의 사상은 ‘사회적 공화주의 사상’, ‘사회적 평등사상’ 따위로 각각 바꾸어 써먹어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한정된 사례를 가지고, 임시적으로 제안해본 것일 뿐이다.)

혹자는 이것이 말장난에 불과하다 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단순히 한 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치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말의 전략의 틀을 바꾸는 것이고, 이 전략의 전환과 함께 ‘10%의 감옥’에서 나와 보편성이 숨 쉬는 대중의 바다로, ‘말의 미묘한 느낌에 예민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당명을 그럴싸한 것으로 바꾸는 게 관건이 아니라 말의 전략을 통째로 바꾸는 것이 관건인 것이다.

이것이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반드시 자문해봐야 한다. 좌파라는 말은 한국의 일간지에 왜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의미로 쓰이고, 이와 동일한 말인 좌익이라는 말은 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지를. 당신이 좌파라면, 왜 동일한 말이 이렇게 다른 의미적 반향을 일으키는가를 반드시 생각해봐야 한다. 어떤 말을 정치적 담론으로 써먹으려는 이라면, 그 말에 대한 사회적 역사를, 찬양과 선호, 기피와 탄압의 역사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말이란 사용자 공동의 것이어서, 누가 산 위에서 시민들에게 소리친다고 그 사용의 컨텍스트를, 그 문화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말이란 알게 모르게 전염되고 마는 것이다. 좌파든 우파든, 정치적으로 효과적인 담론전략을 구사하려면 말이 환기하는 힘을, 뉘앙스의 힘과 역사를 알아야 하고, 이에 기초해서 말의 전략을 짜야 하는 것이다.

기실 위에서 예로서 열거한 말들 가운데에는, 허상으로서의 아이덴티티가, 탁상 위의 혁명적 낭만과 광분이(그 낭만과 광분으로 쌓아올린 허상의 탑은 얼마나 약했던가), 이런 낭만과 광분에 대한, 세대를 초월한, 현실주의자들, 보수주의자들(백만 대군 ‘영 삼성’의 젊은이들을 포함하여)의 보이지 않는, 말하지 않는 집단적 이지메가 너무 짙게 스며 있는 말들도 있다.

그리하여 그 말들은, 그것이 대중의 말의 세계에서 사용되었을 때, 탁한 것, 과거의 것, 영광과 함께 이지메의 상처가 스며 있는 낡은 틀이라는 일정한 느낌을 그 말의 사용자에게 ‘입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안온함을 바란다

그러한 말들은 (나는 일부를 예로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보편적 쓰임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거나 잘못 사용되고 있는 것이기에 미래 대중 정치의 담론 어휘에 등재될 수 없다. 사람들 – 당신이 민중이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 모두가 원하는 것은 늘 ‘안쪽’, ‘보편성의 안온함이 있는 안쪽’이라는 것을, 한국 좌파의 생명은 이 ‘안쪽에의 의지’에 호소할 수 있는 담론전략에도 달려 있다는 것을 좌파의 재도약을 궁리하고 이라면 알아야 한다.

혹자는 ‘이 보편성의 안온함이 있는 안쪽’을 부정적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기실 내가 이 말로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보편적인 심미적 윤리적 감수성의 토대’이자 ‘내가 선택한 어떤 것이 온당한 것으로, 정당한 것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그럴싸한 것으로 인정받는 느낌’인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좌파든 우파든, 대중 정치를 실현하려는 이라면, 이 토대에 호소해야 하고, 이 느낌에의 욕망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혹자는 또 이 말을 기이하게 여기겠지만) 지금 한국의 시공간은 좌파가 대중 정치를 펼치기에 너무나도 풍부한 가능성이 잠재해 있는 시공간이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 ‘보편성의 안쪽’을 추구하는 이들이 모두 동일한 생명체라는 간단한 사실 때문에 그러하다.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노동자’이든 ‘한나라당을 지지하지 않는 노동자’이든 한 가지 동일한 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동일한 문화적 생명체라는 점이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개인적 삶의 차원에서는, 소위 말하는 ‘웰빙’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러한 보편적 추구 자체가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나쁜 것은 남을 해치거나 죽이고 나를 살리는 구조 내에서의, 그러한 구조에 기반한 ‘웰빙’이란 결코 ‘참 웰빙’이 될 수 없다는 간단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정치블록이, 이 웰빙 욕망, 가난한 상계동 주민이든, 부유한 강남 대치동의 주민이든, 울산의 생산직 노동자이든, 대구의 기업가이든, 동일하게 소유하고 있는 욕망은 생명파괴와 종국적 자기파괴를 수반할 수밖에는 허구적 웰빙 욕망이라는 보편적 자각을, 이 보편 욕망의 소유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우리가 보편적 윤리 생명체이기에 이것은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닐 터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각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상품(특히 우리가 먹는 것)의 생산과 소비 그 전체 사이클의 지도를 투명하게 드러내주는 생태학적인 지식이고 상식인데, 지금 우리가 처한 이 시대에, 생태주의자가 되지 않고, 생태학적 지식과 상식을 이야기하지 않고 좌파일 수 있는 좌파가 과연 있을 수 있는가? 또, 생태주의적 정치 실천을 생각하는 이가 좌파적 정치기획을 통하지 않고, 그 실천을 실현할 길이 과연 있는가?

좌파에게만 ‘녹색’의 사용권이 있다

하니, 새로운 좌파 정치를 궁리하는 이라면, 우리 모두가 깨끗한 음식과 물과 공기를 원하는 보편적 생명체이며, 보편적 윤리적 감수성을 지닌 존재라는 단순한 사실을, 그토록 광범위한 사람들이 웰빙을 원하는 만큼, 사람들은 남을 해치지 않는 상태 역시 원한다는 사실을, 자연과 인간의 평화로운 공생을 원하는 사실을, 바로 이 보편적 가치의 잠재적 힘을, 보편성에 호소하는 담론 전략과 대중 정치 전략을 새로 짤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녹색 정치’라는 알려지지 않은, 지금 태동하고 있고 태동할 수밖에는 없는 정치의 터전은, 지금으로서는 오직 좌파에게만 그 정당한 사용이 허용되는, 정치적 생명력이 살아 번뜩일 어휘들이 매장되어 있는 광맥인 것이다.

그리하여, 녹색의 가치는 좌파가 포괄하는 여러 가치 중 하나의 곁다리 가치가 아니라,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가치임을, 녹색의 가치 실현을 일상에서 하고 있는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물론 좌파블록에 포괄되어 있는 스스로를 향해서도 보다 차원 높은 웰빙, 참다운 웰빙을 원하고 있는 숱한 선량들에게 (선善의 실천을 원하는 많은 이들, 태안에 달려갔던 많은 이들,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을 물론 포함하여) 널리 알려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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