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희씨는 체불 임금을 받을 수 있을까?
        2008년 04월 19일 01:5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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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0월 14일.

    자신의 생일도, 아이들이 태어난 날도, 결혼기념일도, 제삿날도 아니다. 면도칼 회사로 유명한 중견 기업인 도루코 문막공장에서 15년째 일하는 김금희(가명. 49)씨는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 비하면 아직 나이도 어린데, 주책맞게 자꾸 깜빡 깜빡"하지만 "이상하게 2007년 10월 14일만큼은 정확하게 기억에 남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날은 김씨가 칼 한 개당 10원에서 30원하는 ‘개당 떼기’라는 도급임금제에 참다못해 ‘노조’라는 것을 처음 결성한 날이다.

    17살 딸을 가슴에 묻게 만든 가난

    김씨는 지난 2005년 문막공장에 ‘개당 떼기’ 임금제가 도입된다고 들었을 때 ‘개당 성과에 따라 일을 부지런히 한만큼 주는 월급제’인 줄 알았다.

    여성 가장으로서 돈이 없어 병원 한 번 못 데려간 17살 딸을 가슴에 먼저 묻은 김씨였다. 한이 맺힌 김씨는 남은 아들과 가족에게 같은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일했다. 그것만이 김씨가 먼저 간 딸에게 미안함을 보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진=금속노조
     

    금희씨는 ‘부지런한 것’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개당 떼기’가 도입되자 처음에는 일한만큼 월급이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정량의 개인 생산량을 초과 달성하면 객관적인 근거 없이 사측의 주관적인 기준으로 단가가 내려갔다.

    그 주관적인 기준은 사측이 노동자들과 개별 협상을 했기에 아무도 모른다. 사측은 노동자들에게 제 각각 수당을 다르게 지급했고, 이에 대해 노동자들은 사측의 회유 등으로 인해 월급에 대해서는 서로 얘기조차 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기본급도, 법적으로 보장된 연장근로수당, 유급휴일수당 등도 없었다. 남들이 쉬는 명절이나 연휴가 되면 일감이 줄어들어 한숨 부터나왔다. 쉰만큼 빚을 내 생활을 꾸려야했기 때문이다. ‘성과’라는 미명 아래 온갖 야근과 잔업 등에 빠지지 않고 일을 했던 김씨는 항상 쫓기듯 불안하고 초조했다.

    월급은 노동자들 사이에 비밀이 되고

    동료들끼리도 월급에 대해 말하지 않고 서로 눈치를 보며 자연스레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은 곧 돈이었다. 하지만 사측이 주최하는 각종 조례나 회의에 참석하고 사측이 지시한 청소 등을 하느라 뺏긴 시간에 대해서는 아무도 보상하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됐다. 불량제품이 생산되거나 개당 수가 줄어들면 월급은 그만큼 줄었지만, 반면 제 아무리 온갖 야근과 잔업을 통해 생산량을 초과해도 월급은 105만원을 넘지 않았다. 

    기술을 가진 몇몇 남성 노동자들을 제하고 보통의 여성 노동자들은 김씨처럼 100만원 안팎의 월급을 받았다. 회사에 의문을 제기해봐도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고민 끝에 10년을 넘게 해오던 일을 버리고 새로운 일을 찾아볼까 싶어 벼룩시장 등을 뒤져봤지만 나이 50을 바라보는 사람을 구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평소 회사 방침을 따르지 않고 왜 노조 같은 걸 만들어 시끄럽게 말썽을 일으키나 싶어 인근 작업장이나 뉴스 등에서 노조 활동하는 사람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던 김씨였건만 결국엔 참다못해 동료들과 도루코문막비정규직지회를 설립했다.

    하지만 결성하는 순간까지도 ‘남은 아들에게 힘은 못될 망정 행여 피해를 주는 건 아닌지’, ‘당장 한 푼이 아쉬운데 이 직장마져도 잃어버리는 건 아닌지’ 등 심사는 복잡하기만했다. 그렇게 마음 졸이며 시작한 노조 활동이었건만 15번의 교섭은 모두 불발로 끝났고 직장폐쇄, 노조 간부 집단 해고, CCTV 감시 등 ‘뉴스’에서만 보던 ‘남의 일’이 김씨에게도 일어났다.

    ‘뉴스’에만 나오던 것이 ‘내 일’로

    김씨 또한 해고됐다가 지노위의 부당해고 판결로 지난 17일 다시 복귀했다. 김씨는 노조 활동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왜 힘들 수 밖에 없는지 알게 됐다. 97년 IMF사태를 거치면서 도루코 사측은 생산비 절감을 위해 생산라인을 구분해 4개의 생산업체에게 하청을 줘 노동자 10여명씩을 나눠 모두 비정규직으로 만들었다.

    김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청업체에서 도급제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이 돼 있던 것이었다. 비정규직이라는 것 외에 놀라운 사실은 또 있었다. 노동부 원주지청이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한 결과 도급제임금으로 인해 도루코가 퇴직자를 포함한 직원 103명(퇴직자 포함)에게 체불한 임금이 5억5719만295원인 것으로 드러났다.

    금속노조는 지난 19일 노동부 원주지청으로부터 이같은 체불임금 내역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는 3년 까지만 체불 임금을 지급키로 돼 있는 현행법(임금채권 시효 조항)에 따른 액수로 10년 전부터 도급임금제를 실시한 하청업체의 경우 나머지 7년간의 체불 임금이 빠진 금액이다.

       
      ▲사진=금속노조
     

    이 중 김씨가 현행법에 따라 연장근로수당, 월차수당, 유급휴일수당 등을 포함해 받아야 할 체불 임금은 840만원이 조금 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노조 측은 △노조 인정 및 해고자 원직 복귀 △산업안전관리 규정을 준수하며 △연월차수당·퇴직금 법적기준 지급 및 시급제, 월급제 전환 등을 사측에 요구하고 있다.  임금을 올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휴일을 늘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해 달라는 것이다.

    포괄임금제의 함정

    노동부 원주청 권기준 근로감독관은 <레디앙>과 통화에서 "수당 등이 일괄 포함되는 포괄임금제의 일종인데, 근로기준법에 따른 최저임금법 등을 참고해 적용했을 경우 5억5000만원 가량의 체불임금이 나온 것으로 조사됐다"고 확인했다.

    그러나 사측은 "현 임금제 방식은 노사가 이미 오래 전 합의한 것이고, 개당 단가에는 이같은 법정 수당이 다 포함돼 있다"면서 노동부가 확인해 준 내용에 반발하며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

    회사가 이 같은 상황에서도 ‘법’대로를 들고 나오는 것은 법원에서 ‘지역 경제 및 기업 경영 사정’, ‘노사 합의’ 등의 사측에 유리한 기준을 근거로 사용자들의 법 위반에 대해 관대한 판례를 내리고 있는 ‘현실’에 기대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권 감독관도 "관례 등에 비춰보면 현실을 법의 잣대로 들이댈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서 "검찰에 도루코를 기소한다고 해도 포괄임금제를 놓고 노사가 서로 다른 해석을 하며 논란을 벌일 소지가 많다"고 말했다.

    이같은 임금체계는 30인 미만의 열악한 영세 중소 사업장에 만연해 있다. 노동자들의 기본권인 법적 수당 등에 대해 쉽게 은폐하고 집단적 항의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파편화 된 노동자들은 법정 수당의 권리가 있는 것 조차도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노조를 만드는 것 또한 쉽지 않아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이와 관련 정명아 노무사는 "유명한 중견 기업인 도루코에서조차도 이런 임금 체계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노조가 있는 유명 기업이 이럴 정도면 노조가 없는 10인 미만의 중소 사업장의 경우에는 그 폐해가 상당할 것"이라며 "중소기업장에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노조를 만든 것 또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또 정 노무사는 "’현실’에 근거해 소극적인 자세를 보여줬던 노동부가 그 ‘관례’를 깨고 ‘근로기준법’에 적용해 체불 임금에 대해 확인해 준 것 또한 드문 사례"라고 말했다

    정 노무사는 "노동자들이 임금 체계 합의시 근로 계약서 등을 통해 구체적인 설명을 받지 못한 것과 ‘개당 떼기’에 개별적으로 어쩔 수 없이 동의한 것이지 각종 법정 수당을 제하는 포괄임금제에 합의한 적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사측과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노조 없었더라면 임금체불 사실도 몰랐을 것"

    금속노조 김종백 비정규사업부장은 "착취 방식이 너무나 원시적이다. 노조의 주장은 임금을 올려달라는 것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해달라는 것 뿐"이라며 "노동부가 발급할 체불임금 확인원을 증거로 법원에 임금청구소송을 제기하고 환노위와 인권위에 진정하겠다"고 밝혔다.

    노조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김씨는 자신과 하나뿐인 아들이 비정규직인 것도, 840만원 가량의 임금이 체불됐다는 것도 모르고 평생 살아갈 뻔했다.

    김씨는 "시골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우리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아줌마들을 상대로 그렇게 엄청나게 큰 돈을 체불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약이 올랐다"면서 "이제야 자본가들의 실체가 뭔지 알게된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가 노조 활동을 통해 알게 된 것은 또 있다.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 투쟁의 소중함이다. 원직 복귀를 요구하며 투쟁을 벌이는 동안 김씨는 밀린 임금을 받으려다 맞아 죽은 건설 노동자 고 이철복 씨의 집회 현장에 다녀오는 등 비정규직 연대 투쟁에 다니기 시작했다.

    김씨는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집회를 하다보니 큰 힘은 못되더라도 같은 처지에 있는 나마저도 외면하지 말고 함께 있어줘야될 것만 같았다”면서 “노조 활동을 통해 새롭게 얻은 세상사는 이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씨는 “건강하게 나이가 들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집회 현장에 항상 함께 하고 싶다. 나 또한 그들과 끝까지 싸워 우리 사업장 한 곳만이라도 후배들에게 정규직 사업장으로 물려주는 게 남은 생의 꿈”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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