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계급 중심성'만으로는 부족하다
        2008년 04월 15일 02: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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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선이 끝나자마자 새로운 진보정당의 밑그림을 그리자는 논의들이 시작되고 있다. 애초에 진보신당을 띄우면서 실질적 창당은 총선 이후에 비로소 시작한다고 합의한 바 있으니, 선거 때문에 잠시 중단됐던 논의들이 다시 분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데, 새 당의 밑그림을 그리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게 있다. 진보정당운동의 제1기, 그러니까 민주노동당 시절의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반성할지 짚어보는 일. 이미 총선 전에도 이러런 반성들이 제출된 바 있다. 종북주의, 패권주의 비판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체질, 중앙 상층 정치에 매몰됐던 경향이 반성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반성은 주로, 낡은 것이 왜 낡은 것인지 밝히기 위한 반성이었다. 민주노동당이 왜 해체 극복의 대상인지 따지는 게 주목적이었다.

       
      ▲ 개표하던 날, 중앙당 사무실 그리고 사람들.(사진=진보신당 이상엽)
     

    하지만 이제 새 당 건설이 현안이 된 시점에서는 그것보다 한 발 더 앞서 나가야 한다. 이제는 새로운 것이 과연 어떤 점에서 새로워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이 성찰은 민주노동당 해체 국면에서 쏟아진 진지한 반성들보다도 더 근본적인 지점을 겨냥해야 한다.

    세계 자본주의의 점이 지대, 한국 사회

    필자는 그러한 반성의 대목 중 하나로, 우리가 아직도 한국 사회에 필요한 진보정당운동의 전망과 궤도를 찾지 못했다는 점을 들고 싶다. 민주노동당 시절에 우리는 이 점을 어느 정도 느끼고는 있었지만 그것과 본격적으로 대결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막연한 답답함으로 불안해하기만 했다.

    물론 교과서들은 있었다.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하는 분들도 있었고, 보다 급진적인 사회주의의 전통에서 영감을 찾고자 한 분들도 있었다(이제 주사파는 논외로 하자). 하지만 그 어느 편도 딱히 대안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뭔가, 현실과 결정적으로 어긋나 있었다. 한국 사회의 현실은 교과서의 틀에 짜 맞추려 할 때마다 항상 거기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왜 그럴까? 필자는 한국 사회가 세계 자본주의의 점이 지대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점이 지대란 곧 세계 자본주의의 어떠한 전형적 분류에도 속하지 않는 지역을 뜻한다. 중심부도 아니고 주변부도 아닌 경계 지대. 여기에서는 세계 체제의 서로 다른 공간, 세계사의 서로 다른 시간이 공존하며 교차하고 접합된다.

    그래서 이 점이 지대에서는 교과서적인 변혁 노선이 작동하지 못한다. 이런 노선은 대개 세계 자본주의의 보다 전형적인 지역에서 발전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중심부에서 발전한 사회민주주의 노선은 자본주의의 진화론적 발전을 전제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압축 성장은 이러한 진화론적 발전관에 부합하지 않는다. 물론 저발전의 발전을 거듭하는 주변부의 역사 전개와도 거리가 멀다.

    노동계급 형성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왜 한국 사회에서는 노동계급의 성장이 지체되고 있는가? 다른 무엇보다도, 노동계급 1세대가 막 계급으로 스스로를 형성하던 와중에 노동 유연화 공세에 맞부딪힌 점에 주목해야 한다. 노동계급의 초기 형성 과정과 신자유주의적인 노동계급 파편화라는 두 시간대가 서로 조우하는 이 낯선 상황이 노동운동의 전진이 중단된 이유에 대해 상당 부분 설명해준다.

    교과서들 안에서 한국인을 찾아 헤매다

    한데 여기까지는 사실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노동운동의 침체에 대한 위의 설명에서 어느 정도 드러나듯이, 한국 사회를 ‘해석’하는 일은 그럭저럭 가능하다. 문제는, 두 세기 전 철학자에서 혁명가로 전업한 그 사람의 말마따나, 우리의 과제가 세계를 해석하는 게 아니라 변혁하는 일이라는 데 있다.

    세계를 변혁한다…. 우리는 이것을 마치 우리의 바깥에 동떨어져 있는 어떤 사물을 바꾸는 일 마냥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저 철학자 출신 혁명가는 “세계를 변혁하라”는 문구로 끝나는 문서(「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의 바로 앞 부분에서, 우리가 변혁할 세계를 어떤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 그것을 비판했다.

    바꿔야 할 세계는 또한 ‘우리’다. 세계를 변혁하자면, 세상을 바꿀 그 주역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을 우선 바꿔야 한다. 우리의 경우, 다시 말하면, 한국인, 한국의 대중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문제다. 그런데 교과서들이 전혀 답해주지 못하는 대목이 바로 이것이다.

    즉, 한국 사회가 세계 자본주의의 점이 지대이고 그래서 중층적, 복합적 모순을 지닌다는 것은 어찌어찌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복잡한 사회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복잡한 생각들을 어떻게 바꿀지는 영 오리무중이다. 이 벽 앞에서는 복지국가를 만들어보자는 호소도, 세상을 뒤엎자는 선동도 한 걸음을 더 내딛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우리의 진보정당운동은 당황하며 교과서를 이곳저곳 뒤적이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그 교과서들 안에서 동시대의 한국인들을 찾아 헤맸다.

    이제 ‘노동계급 중심성’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총선 끝나고 새 당 건설이 화제로 떠오르면서 대뜸 나온 게 ‘노동계급 중심성’, ‘진보의 다원주의’ 이런 말들이다.

    ‘노동계급 중심성’을 보장하지 않으면 진보정당이라고 볼 수 없다며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 등등’을 이야기하는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고, 반대로 이런 주장을 낡은 교조주의로 치부하면서 과거의 용어나 관행이 반복되는 데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진보정당운동에 항상 등장하는 이념 노선 논쟁이 이번에도 역시 예외 없이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

    좌파정당에서 이념 노선 논쟁이 벌어지는 것 자체를 흰 눈으로 봐서는 안 된다. 그런 논쟁 속에서 특정한 이념과 노선들의 연합이 등장할 것이고, 그것이 당의 골간이 될 것이다. 어떠한 좌파정당이든 처음 출발할 때는 다 이렇게 이념 노선 연합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다만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이 이념 노선 논쟁이라는 게 다시 한 번 ‘교과서’들의 쟁투가 되는 것이다. 새 진보정당 건설 과정이 한국 사회를 실제 바꾸는 데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보다는 또 다시 표지판 사이의 칼싸움, 푯말들 사이의 총부림이 되는 것이다.

    가령 ‘노동계급 중심성’이라는 구호를 보자. 마땅히 중심이 되어야 할 그 노동계급은 지금 한국 사회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런 노동계급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중산층의 일부로서 입시 전쟁과 집 값 상승 게임에 뛰어든 임금 소득자와, 최저임금 언저리에서 기간제 일자리를 전전하는 임금 소득자는 과연 지금 서로를 같은 편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과연 둘 사이의 강이 자본가와 전체 임금 소득자 사이의 바다보다 더 좁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래서 ‘노동계급 중심성’ 주장 자체를 타박하자는 게 아니다. ‘노동계급 중심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분들은 이제 그 푯말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기 전에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중심에 설 그 노동계급 자체를 존재하게 하는 일이다.

    즉, 현실의 수많은 파편화된 집단들을 노동‘계급’으로 통일할 구체적인 전망과 포부, 전략과 계획을 먼저 제출해야 한다. 이게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의 입장권이다.

    ‘이념 노선’ 연합이 아니라 ‘화두와 수행’의 연합을?

    상대적으로 대중성과 현실성을 강조하는 분들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스스로 개량주의자로 자처하길 꺼려하지 않는 분들이 있는데, 사실 우리에게 문제는 고전적인 개혁(량)-혁명 논쟁이 아니다. 혁명의 주체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한국 사회에는 개혁의 주체 또한 부재하다는 게 진짜 문제다.

    개혁주의 노선에서 비롯된 호소들(대개 ‘복지 확대’로 수렴된다)은 그 호소에 응할 것으로 상정된 주체들 자신에 의해 거부당하고 있다. 그 주체들은 그러한 집단적 문제 해결이 가능하리라고, 바람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이 이미 따로 있다. 그것은 입시 전쟁에 뛰어드는 것이고, 집 값 올리기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자산을 늘리고 노후 소득을 챙길 수 있다. 승리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개발 자본주의 시대에 비롯됐다. 하지만 개발 자본주의가 막을 내리고 시장 지상 자본주의 시대가 열린 뒤에도 이 유습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아니,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입시 전쟁과 부동산 투기 경쟁은 신자유주의의 만인 투기 문화와 만나 서로 접합됐고 그래서 더욱더 증폭됐다.

    새 진보정당이 다가가 설득하고 손을 맞잡아야 할 사람들은 바로 이 만인 투기 경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있는 그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어떻게 공공재의 확대를 통한 집단적 문제 해결을 설득할 수 있을까? 대중성과 현실성을 강조하는 분들 역시 ‘대중성’과 ‘현실성’을 또 다른 푯말로 들이댈 게 아니라 그 설득의 방략과 실행 계획을 제시해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교과서의 죽은 문구 하나씩을 들고 서로 다시 만나서는 안 된다. 우리가 든 것은 ‘화두’여야 한다. 민주노동당 시절 제대로 대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필생의 과제로 붙잡아, 그것들에 도전할 전략 구상과 실천 계획을 하나씩 들고 서로 만나야 한다.

    ‘노동계급 중심성?’ 좋다. 하지만 그것을 말하려면, 노동계급 통일의 전략, 이를 위해 지금까지의 노동운동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실천을 감행하겠다는 계획을 함께 보여줘야 한다.

    ‘보다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노선?’ 좋다. 하지만 그것을 주장하려면, 대중의 교육 및 주거 욕망을 파고들어 헤집고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놓을 구상과 계획을 반드시 구비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이런 생각까지 해본다. 새 진보정당은 익숙한 저 ‘이념 노선 연합’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화두 연합’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혹시 아는가? 저마다의 그 화두를 타파하려고 수행하는 가운데, 우리가 본래 부처였음을 깨닫게 될지? 그렇게, 21세기 한국 사회에 부합하는 이념과 노선, 세계변혁운동사 교과서의 한 장에 기록될 ‘우리의 사례’를 생산하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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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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