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은 멀고 토호는 가깝다
    2008년 04월 14일 04:5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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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본 두 편의 영화가 계속 마음을 무겁게 한다. 코엔 형제가 만든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특이한 영화는 현대를 사는 우리의 불안정한 삶을 잘 보여준다.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가난한 사냥꾼이 어느 날 마약상들의 총격현장에서 엄청난 돈을 발견한다. 돈만 챙겼으면 되는데, 목숨이 붙어있던 마약상 한 명 때문에 현장으로 돌아갔다가 사냥꾼은 마약조직의 추격을 받는다.

조직만이 아니라 공기압축기로 문을 따는 특이한 킬러가 돈을 탐내 사냥꾼을 뒤쫓고 결국에는 사냥꾼과 그 가족의 목숨을 모두 빼앗는다.

킬러에게서 사냥꾼을 구할 유일한 희망인 나이든 보안관은 그 죽음을 막지 못하고 은퇴한다. 자신밖에 믿을 수 없는 사회에서 삶은 언제나 위태롭고 나이를 먹으면 더욱더 불안해진다. 국가는 삶의 버팀목이 되지 못한다.

마이클 무어의 영화 <식코>는 아파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미국의 현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며 불안감을 부추긴다. 국민의료보험이 없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민간보험에 가입해야 하는데, 가입조건이 까다로울 뿐 아니라 민간보험회사는 수익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의료조치조차 거부한다.

보험회사들의 엄청난 로비를 받는 정치인들은 국민이 아니라 기업을 위해 정책을 짠다. 노인만이 아니라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도 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런데 무어는 나라가 없다고 얘기하지 않고 그런 나라를 만들어야 하고(『이봐, 내 나라를 돌려줘!』라는 그의 책 제목처럼) 그 주요한 방법이 선거라고 말한다.

어쨌거나 두 영화 모두 현대를 살아가는 미국인의 불안한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옛날 같으면 “쯧쯧, 불쌍한 미국인”, 혀를 차며 돌아섰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이명박 정부가 한미관계를 과거로 되돌리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한미FTA가 타결되면, 미국의 ‘현재’는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대표

그렇다면 마이클 무어의 충고를 받아들여 표를 조직하는 정치투쟁에 박차를 가해야 할까? 중앙선관위처럼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이상한 방법을 쓰거나 지금의 ‘소위’ 진보세력이 하듯이 계급투표를 외치면 세상이 변할까?

하지만 선거야말로 불안하다. 단순히 보수세력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친박연대’처럼 정당임을 부정하는 괴상한 정당이 지지를 받기 때문에, 불안한 것은 아니다. 내게는 선거를 통한 권력의 변화라는 그 발상 자체가 불안하다.

선거는 좋은 대표를 뽑아서 그들에게 정치를 맡기는 것인데, 권력은 언제나 사람을 배신한다. 선거를 통해 대표가 되는 순간 뽑힌 사람과 뽑은 사람 사이에 ‘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실 국회의원이 누구를 어떻게 대표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대의민주주의가 만들어질 때부터 제기된 오래된 고민이다. 의원은 자기 지역이나 계급을 대표해야 하는가, 아니면 나라 전체를 대표해야 하는가? 유권자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 의원이 훌륭한가, 아니면 자기 판단에 따라 공적인 결정을 내리는 의원이 훌륭한가? 어떤 답을 내리든 유권자와 대표의 거리는 좁혀질 수 없다.

이런 거리의 구조는 대표의 배신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유권자들의 이기심과 토호들의 교활함을 자극한다.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대표선수들이 낙선한 사실(물론 그들은 선거에서 떨어져도 다른 자리로 보상을 받겠지만)에서 드러나듯이 전국적으로 유명하다고 지역구에서의 당선이 무조건 보장되는 건 아니다.

무의미한 선거를 반복하면서 유권자들은 올바른 정책보다 자신의 단기적인 이익을 대변할 사람들을 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회의원이 서울의 중요한 회의보다 지역구의 행사에 참여하기를 원하고 동네를 개발하길 원한다. 바꿀 수 없다면 본전이라도 챙겨라, 유권자의 일그러진 합리적 선택이다.

그리고 이 서울과 지방의 거리를, 대표와 유권자의 거리를 교활하게 이용하는 집단이 있으니 바로 지역의 ‘토호들’이다. 토호들은 정치인이 지역의 이익을 보장하게 하고 이해관계를 보장받은 유권자들이 정치적인 지지를 보내도록 뒤를 봐 준다. 그리고 선거야말로 이런 토호들이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장이다. 이런 구조를 바꾸지 않은 채 선거가 희망이라고 얘기할 수 없다.

   
 
 

계급투표는 좋은 전략인가?

계급투표는 조금 다른 대안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마이클 무어가 기대하듯이 자신의 출신계급에 맞게 투표하면 약자들의 대표자들이 국회에 진출할 수 있으니.

가능하다면 계급투표는 분명히 정치적인 지지를 동원하는데 효과적인 전략이지만 성, 노동조건, 연령, 인종 등 다양한 균열선이 계급 내에도 존재한다.(20대 보수화나 노인들의 권력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세대효과라는 동일한 경계선에 있다) 이런 균열을 메우고 계급은 단결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계급에 속한 주체들이 유권자의 일그러진 욕망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그런 욕망의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농민과 노동자가 자신의 정당을 가지면 정치적 올바름이 보장될까? 계급은 멀고 이익을 보장해 주겠다는 토호는 가깝다.

다양한 균열선들과 거리의 구조를 활용하는 토호들의 능력을 고려할 때 계급투표를 주장하는 전략이 좋은 효과를 거둘지는 의문이다.

좋은 정치 전략이 필요하다

좋은 정치적인 전략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기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좋은 삶을 고민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맹목적으로 편리함만을 추구하거나 다른 생명을 이익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전략이 아니라 사람과 생명을 사랑하고 삶을 똑바로 보게 하는 전략이어야 한다.

<식코>에 나오듯이 국가가 집에 공공 근로자를 보내서 빨래와 요리를 해주면 삶이 풍성해질까? 공동체의 관계가 개인과 국가의 익명적 관계로 대체되면 좋을까? 아마 그런 사회에서는 더 이상 내 밥을 덜어서 다른 사람과 나눌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국가에게 얘기하시오, 따뜻한 인간적 관계는 차가운 관료적 관계로 대체된다. 그리고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언급되듯이 노인들의 연금을 갈취하기 위해 그들을 살해하는 새로운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이미 장애인들은 그렇게 갈취당하고 있다) 왜 우리의 관심과 보살핌을 국가가 대체해야 하는가?

<식코>를 보며 느낀 또 다른 불편함 중 하나는 미국인들의 비만한 몸이었다(무어도 예외는 아니다). 국가가 의료보장을 해주면 좋지만 그 이전에 그들의 몸을 보라.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며 살아야 하는 그들의 신체는 이미 과잉되어 아플 수밖에 없다. 아플 수밖에 없는 과잉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의료체계의 문제만을 지적하는 게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욕망의 구조를 깨지 않으면 변화는 불가능하다. 대중의 욕망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실현하게 해주겠다며 꼬실 것이 아니라, 왜 그 욕망의 구조가 잘못된 것인지를 얘기해야 한다.

약자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국민이나 소비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삶을 관리하려는 권력과 자본의 의도가 있을 뿐. 이제 불안함을 극복할 희망은 약자들의 공동체에 있다. 헛된 희망을 버릴 때 새로운 희망이 보인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면 투덜대는 사람이 많다. 그게 현실에서 가능한 얘기, 지식인의 공허한 얘기일 뿐이라며.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길과 진리와 생명은 하나라 했다. 누군가의 현실이 다른 이에겐 공상이다. 버려야 보인다. 나도 버리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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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안지식연구회는 시장권력에 휘둘리는 한국 지식사회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 공동체의 상을 모색하기 위한 젊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모임입니다. 대안지식연구회는 이를 위한 실천의 일환으로 ‘정치-사회비평’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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