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 15일, 학교는 죽었다
        2008년 04월 16일 03:4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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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4월 15일, 학교는 죽었다

    어제(4월 15일) 한국의 교육에서 두 가지 일이 벌어진다. 하나는 덜 알려졌고, 다른 하나는 세상이 시끄럽다. 발생한 순서대로 살펴보자. 오전에 사교육 1위 메가스터디의 2008년 1사분기 영업실적이 공시되었다.

       
     
     

    메가 관계자나 메가스터디에 투자한 사람 입장에서 보면, 아름다운 숫자다. 매출액, 영업이익, 순이익 모두 30% 이상 증가했으니 말이다. 이대로만 가준다면 2008년 목표치인 매출액 2천억원, 영업이익 6백억원 달성은 식은죽 먹기다. 물론 그 돈들이 땅에서 솟은 건 아니다. 학생과 학부모의 호주머니에서 나온다.

    정오를 지나면서 두 번째 일이 발생한다. 언론에서 교육과학부의 ‘학교자율화 추진계획’ 발표가 보도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정작 교육과학부 홈페이지에는 관련된 자료가 없다. 이명박 정부 들어 두드러진 현상 중의 하나다. 우회하여 자료를 구해 살펴보니 가관이다. 교육과학부 관계자가 “우리나라 초중고 교육사에 유례없는 대사건이다”라고 했다는데, 정말 그렇다. 라이머의 책 제목을 굳이 빌린다면, 이제 학교는 죽었다.

    다음 날인 4월 16일, 장이 서자마자 사교육 관련 주가들이 일제히 오른다. 다시 한번 이명박 정부와 사교육의 밀월관계가 확인된다. 역시 2MB 정부의 교육정책은 공교육 말살, 사교육 부양 정책이다.

    신호등의 빨간불과 파란불도 규제인가

    교육과학부는 4월 15일부로 29개 지침을 폐지했다. 학교자율화를 위한 조치란다. 그러니까 29개 지침은 학교의 자율성을 저해하는 ‘규제’이니 없앤다는 거다. 하지만 공교육을 살리기 위한 원칙과 지나친 규제를 혼동한 면이 없지 않다.

       
     
     

       
     
     

    학교자율화는 되어야 한다. 학생은 다양하기 때문에, 학생에게 맞는 교육을 위해서는 교육과정 자율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평준화를 획일화로 오해하고들 있지만, 획일화는 평준화 때문이 아니라 교육과정의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국가가 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생의 교육권을 생각한다면, 교육과정에 대한 국가의 규제를 거두고 학교와 교사에게 편성권을 부여해야 한다. 여기에 학급당 학생수를 낮추어 개별화 수업 또는 맞춤형 수업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규제로 보면 곤란하다. <표 2>에 나와 있는 지침들도 과연 규제라고 봐야 할까. 0교시나 우열반 하지 마라는 게 규제이고 자율권 침해일까. 그걸 공교육의 기본 원칙이 아니라 규제라고 본다면, 신호등의 빨간불과 파란불도 규제다. 운전할 때마다 딸아이가 한창 “빨간불이니까 가면 안돼”라고 말하는데, 거기다 대고 “그건 규제야. 내 마음대로 할꺼야”라고 해야 한다.

    학교가 무슨 필요가 있나

    엄밀히 말해 교육과학부가 지침을 폐지했다고 해서 양성화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지침 폐지의 의미는 그 권한을 시도교육청으로 이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과학부 생각대로 하면, 시도교육청이 조례 등으로 자기 지역에 맞는 규칙을 만들면 된다.

    하지만 시도교육청들이 합의해서 10년 만에 일제고사가 부활한 게 엊그제다. 비싼 돈 들여 사교육의 뻔한 효과를 다시 확인한 일제고사 결과가 발표되자, 시도교육청들이 주말에도 학교 나오라고 하는 게 지금이다. 학력신장을 모토로 내건 시도교육청도 상당수다.

    또한 작년 일이긴 하나, 학교납입금 징수 권한이 시도로 이관되자 “수업료 안 내면 징계한다”고 했던 곳이 교육청이다. 이런 교육청들이 과연 권한을 이양받아 사설 모의고사 보면 안되네, 심야 자율학습 하면 안되네, 아침밥은 먹여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할까. 차라리 도둑에게 집 열쇠를 맡기는 게 훨 안전하다.

    이제 학교는 없다. 오직 학원만 있다. 방과후학교는 사교육에게 맡기거나 학원 강사를 모시고, <소년 동아>니 <소년 조선>이니 하는 어린이신문사들의 수익을 보장하고, 각종 부교재 출판사와 교복 빅3에게 시장을 제공한다.

    학생은 기본적으로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학교건물이라는 곳에 갇혀 지내면서, 자율을 빙자한 보충과 야자를 빠짐없이 하고, 수업은 성적에 따라 유학반이니 SKY반이니 하는 우등반과 열등반으로 나누어 진행하며, 틈날 때마다 학원이 만든 모의고사나 정부가 하는 일제고사를 보면서 교사라는 사람에게 맞아줘야 한다.

    물론 70~80년대 사교육 환경이 거의 없던 때와 달리, 학교에 15시간 이상 앉아있으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짬을 내어 학원 봉고차에 몸을 실어야 한다. 아니면 온라인 사교육을 다운받아 빈 시간에 들어야 한다. 우등반에 들어가거나 일제고사나 모의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다. 여기에 교사나 부모라는 사람은 끊임없이 “널 사랑한다. 다 너가 잘 되기 위해서란다”라는 말로 최면을 건다.

    건물에는 분명히 학교라고 써있는데, 학원만 득실거린다. 그래서 교육과학부의 이번 조치는 ‘학교자율화’가 아니라 ‘학원화’라고 부르는게 맞다. 다만, 교육과학부나 청와대가 미처 빠트린 부분이 있는데, 학원의 교습장에는 학교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은 아이들이 앉아있다.

    일반적으로 교육개혁을 할 때 제일 먼저 손대야 하는 부분인 ‘학급당 학생수 감축’이나 ‘학교당 학급수 축소’가 이번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미어터지는 학원화’로 칭하는게 보다 정확하다.

    아동노동의 뒤엔 일 시키는 어른의 자율이 있다

       
     
     

    얼마 전에 중국에서 아동노동 사건이 터져 시끄러웠다. 그러나 그게 남의 일일까. 매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사교육비는 누가 내나.

    사교육업체의 수익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지 않은가. 한국의 학생은 오늘도 학교에 간다. 학벌사회와 대학서열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떠밀려 간다. 떠밀려 어디론가 향한다.

    앞으로 떠미는 손은 더더욱 거칠 게 없을 거다. 자율이지 않은가. 하지만 떠미는 손의 자율이 과연 학생의 자율이고, 학생의 교육권이고 인권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비인간적이고 전근대적인 아동노동의 뒤에는 일 시키는 어른의 자율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런 어른일수록 꼭 아이를 사랑한다고 한다.

    웬일인지 둘째가 유모차에 타겠단다. 그래서 오늘은 한 팔에 한 아이씩 안고가지 않아도 된다. 첫째는 걷게 하고 둘째는 유모차에 태우고 아침공기를 받으며 나선다.

    아파트 단지는 등교하는 학생들의 발걸음으로 가득차다. 첫째보다 약간 큰 초등학생, 교복이 어색한 중학생들의 활기찬 목소리와 잰 걸음이 넘친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세상은 몹쓸 짓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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