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우파 혁명 앞에서
    2008년 04월 10일 12:08 오후

Print Friendly

거품 빠진 진보정치,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

   
▲ 사진=김민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2008년 4월 총선 결과는 한 마디로, ‘자본의 권력이 주도하는 세력의 승리와, 이에 대항하는 세력의 새로운 싸움’을 의미한다.

그런 차원에서, 일단 현실적으로 승패는 결정되었지만 어떤 목표를 향해 갈 것인가를 놓고 진보정치는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말고 주저 없이 비상한 위력을 발휘해야 한다. “실체 없는 소모적 논쟁과 비현실적 전략전술이라는 거품”이 빠진 진보진영의 진정한 결집과 성숙은 지금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다.

이번 선거는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체제의 의회 파시즘적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한나라당이 압도적인 다수로 의회권력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그에 가까운 힘을 가지게 되었고 이에 더하여 적극적 협력의 자세를 가진 보조세력의 존재가 있다.

자유선진당과 친박연대는 한나라당과 서로 정쟁의 수준에서는 갈등할지 모르나 태생적으로나 본질적으로나 한나라당과 같은 세력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의 보수 연대적 결집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보수 우파의 신자유주의 체제 혁명과 괴물 권력 ‘리바이어던’

‘여전히 극복되지 못한 냉전적 사고와 자본의 힘에 대한 확신’은 이들 우파혁명 세력의 정치적 신앙이다. 그것은 구시대적 파시즘의 역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자유를 굳건히 확보하는 ‘신자유주의 체제 혁명’을 의미한다.

자본의 특권은 새로운 신분 질서가 되고, 노동을 비롯한 서민들은 체제 내부로 편입시키기 위해 ‘따뜻한 보수’를 내건 우파 혁명 열매의 아주 작은 ‘부스러기 적선의 대상’이 될 것이며, 신자유주의 체제 혁명에 반기를 드는 세력은 강도 높게 진압되는 고통을 겪게 될 수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른바 ‘실용적 선진’은 이들의 깃발이고 ‘시장’은 이들의 종교이며,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는 신자유주의의 보루다.

내전을 겪은 16세기 영국의 현실에서 일종의 사회계약적 기초 위에 위기관리의 책임을 맡기면서 거대한 괴물이 되어버린 권력을 토마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이라고 불렀다. 오늘의 우리 현실에서도 한나라당을 축으로 하는 보수 세력은 선거라는 사회계약적 토대 위에서, 21세기 한국의 ‘리바이어던’으로 등장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 혁명은 일체의 사회적 저항과 문제제기를 압박하면서 자본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그와 같은 권력을 구조적 전제로 한다.

신자유주의 시장체제에 대한 대안 없는 중도세력 패배

노무현 정권 때부터 이러한 길을 미리 깔아놓은 셈인 열린우리당 후신 통합민주당 세력은 정책적 차별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한 채 예정된 패배를 맛보았다. 대선에서 일단 승세를 굳힌 우파 혁명의 기세 앞에서, 입장이 명료하지 못한 중도세력의 패배는 정해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국제적 틀을 규정할 한-미 FTA를 주도한 노무현 정권의 노선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은 통합민주당의 다수가, 이를 보다 강력하게 밀어붙일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과 어떻게 날카롭게 대결해나갈 수 있었겠는가?

다시 말해서, 자본이 중심이 된 시장의 권력을 구축하는 일에 지속적으로 협력해온 구 열린우리당 세력으로서는 신자유주의 체제 혁명을 보다 확고하게 밀고 나갈 세력을 이길 방법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대선 시기 때부터 매우 명료하게 드러난 진실이다. 그러나 통합민주당 내에도 그와는 달리 나름대로 진보적 의지를 가진 세력이 일정하게 있다는 것은 그나마 남아 있는 희망이다.

한편,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후보가 보인 선전은 한나라당이나 통합민주당이 보인 신자유주의형 시장주의적 선택과는 다른 대안에 대한 갈망이 존재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그건, 전체 기업의 99.2퍼센트, 고용인구 80퍼센트를 차지하는 중소기업과 자영업 종사자들 그리고 사회적 안전망에서 배제된 비정규직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메시지였다.

문국현의 대안도 주목할 필요 있다

이 대목에서 한국정치는 진보의 새로운 발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시적 목표와 이념적 방향성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한국사회의 자원을 어떻게 배분해나갈 것인가를 놓고 정책적 세밀함을 보인 문국현 후보의 정치적 내용은 의미 있게 검토되어야 한다.

한편, 그와 창조한국당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려면, 진보의 영토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지 보다 깊게 고민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제도권에 진입한 만큼 ‘편협한 정치적 순혈주의’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인상을 어떻게 앞으로 극복해나갈 것인지도 과제다.

자, 그렇다면 나름의 선방으로 이번 선거에서 진보정치의 본산임을 일단 가까스로 입증한 민노당과, 이번 총선에서 지지율의 미진으로 정당으로서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게 된 진보신당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노회찬, 심상정 낙선, 진보정치의 자산 분실

이를 논하기에 앞서 노회찬, 심상정 두 사람의 낙선은 진보정치 전체 판도에서 매우 쓰라린 자산 분실임을 토로한다. 분당하지 않았다면 결과가 달랐을 것이라는 사후 평가도 가능하겠지만, 전후사정이 어떻든 간에 이 두 사람이 가진 정치적 상징과 그간에 보여 왔던 역량은 진보정치의 미래를 위해서 매우 소중한 터에 그 패배가 더욱 아프다.

진보신당으로서는 더욱 그 고통이 클 것이다. 깊은 위로와 재기를 위한 뜨거운 격려를 보낸다.

이번 선거의 결과가 그렇다고 해서 진보신당의 실험이 무의미했거나 더 이상의 가능성은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거나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민노당과 분당 이후 진보신당에 모여든 세력은 과거 민노당이 적극적으로 담아내는데 역량을 제대로 보이지 못했던 여성, 생태 등의 가치들을 자신 안에 새롭게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정당 내부의 소통이 가져야 할 민주적 구조와 정책생산의 전문성도 돋보였다. 그것은 진보의 영토 확장으로서 중요한 성과다.

진보신당의 실험, 분명 가치 있다

뿐만 아니라 진보신당의 이러한 도전적 실험은 민노당이 구태의연하게 낡은 모습으로 남아 있도록 하지 못하게 했다. 민노당에서 혁신의 정치적 상징과 구심점이 된 이수호 위원장이 이끄는 혁신-재창당 준비위원회의 가동은, 분당이라는 현실과 그에 따른 진보신당의 등장이 기여한 바가 결정적이다.

‘대중적 진보정당’으로서 새롭게 출발하고자 하는 것은 그래서 진보신당이나 민노당에게 공통의 과제가 되었고, 분당 이후 두 진보정당이 내놓은 의제는 한반도 문제에 대한 접근을 제외하고는 거의 유사했던 것에서 이는 확인된다.

이에 더해 진보신당은 민노당이 포괄하는 데 그간 한계를 보였던 중산층 진보세력과 진보적 지식인을 비롯한 문화인들을 상당한 정도로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데 적지 않은 실력을 보였다. 이 대목은 민노당이 부러워할 만한 성취였다는 점에서 그 평가가 결코 인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진보신당 실험의 패착과 한계

그러나 진보신당에게도 패착은 있었다.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분당을 결행, 선거기간의 전략전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현실 판단의 착오는 물론이고, 분당해 나온 민노당과의 차별성 확산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그리 대단한 대중적 관심사가 아니었던 ‘종북주의 논쟁’이 정치적 에너지를 비생산적으로 소모시켰고 정작 공세를 펼쳐야 할 주 모순 내지 주적의 문제를 명료하게 만들어내지 못하게 했다. 진보진영 내부의 싸움에 몰두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또한, 현재 진행형의 변화에 대한 철학적 자세의 결여로 민노당의 혁신 노력을 다소 지나치게 폄하, 민노당의 실패, 붕괴, 파탄 등의 표현을 너무 쉽게 쏟아내었던 것은 돌아볼 바가 아닐까 한다. ‘민노당 실험의 실패’라는 표현은 고스란히 ‘진보신당 실험의 실패’라는 말로 역전되다시피 하니 말은 보다 진중하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에 더해 민노당에 대해 민노총 당이라고 비판한 것은, 계급적 기반을 유실한 진보정당의 한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결과라고 보여 진다. 문제가 되어야 할 바는 민노총의 정치적 행태에 대한 비판이지, 계급적 기반의 조직적 구성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한 석도 건지지 못했으나 비례후보 순위에 있어서 장애, 노동 등의 우선권 배치가 진보정치의 의미를 가지긴 하나 이를 자칫 변경할 수 없는 교리로 여길 경우, 그나마 없는 살림에 의회진출에서 대중들의 기대를 집결시킬 수 있는 다른 선택이 제한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바가 있다.

이는 민노당에게도 동시에 해당하는 문제다. 향후 의회진출을 염두에 둘 때 자신의 정치적 손발을 잘못하면 스스로 협소하게 묶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정치의 가치도 살리면서 탄력성 있는 선택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한편, 분당의 정치적 문제와 관련해서 한 가지 옆으로 빠지는 이야기가 될지 모르나, 문국현 후보 유세장을 찾은 나를 알아본 어느 팔십에 가까운 할머니가 민노당과 진보신당 분당에 언급하면서, “분당은 대중적 요구에 맞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에 너무나 놀랐던 경험을 들려주고 싶다. 말 그대로의 인용이다. 표현도 예상을 넘은 것이었다.

어떤 할머니 말씀이

차이가 있어도 안에서 싸우지, 갈라져 나오면 저 거대한 이명박 정권과 어떻게 상대하겠느냐는 주장이었다. 간단한 대화였지만 그 고령의 할머니가 진보정치의 분열에 대해서도 알고, 그 사정을 꿰뚫어보면서 말씀하시는 것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문 후보의 유세장에서 엉뚱하게도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문제를 논하는 할머니가 있다니, 하면서 대중의 마음에는 진보진영의 단결을 통한 통쾌한 승리를 기대하는 바가 적지 않았던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북한에 대한 인식 문제가 자신도 모르게 사고틀의 민감한 경계선이 되었는지, 한반도 문제를 보다 유기적이고 국제사적으로 파악해 들어가는 작업에 사회과학적 정밀도가 낮아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민족 문제에 대해서도 이른바 세계화 구조 안에서 제국주의체제의 민족의식 해체전략과 맞물려 돌아가면서 민족주의의 배타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있으나, 그것이 반제 투쟁의 저항적 역량으로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상황과 그로써 보편적 인류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너무 일찍 외면해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북한 인권 문제와 관련한 논의는 적어도 이 세 가지 차원 검토해야

한편, 이 기회에 북한 인권 문제를 거론하자면 이런 대목을 우리는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자리에서 길게 말할 수 없으니, 3가지만 짚는다.

북한 인권문제는 보편적 인권가치라는 차원에서 진보세력이 제기해 나가야 할 바이나, 거기에는 인권문제의 진상 파악이 기초가 되는 것을 전제로 우선 (1) 문제제기의 수준과 (2) 제기시점의 맥락, 그리고 (3) 인권문제의 요소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첫 번째 ‘문제제기의 수준’ 문제는, 특정사안에 대한 요구에 그칠 것인지 아니면 김정일 체제 자체의 문제로 제기해나갈 것인지, 두 번째 ‘제기 시점의 문제’는 미국의 패권전략이 강도 높게 진행되고 있거나 남북 간의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 들어갔을 때 그런 문제보다는 인권문제 제기가 우선권을 가질 적절한 시점인지의 여부.

셋째, ‘무엇이 인권문제를 가져오는가?’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체제 자체에 본질적 요인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국제적 환경 변화와 함께 연동되어서 달라질 가능성이 있는 사안도 존재하는지를 따져 묻는 일이다.

이러한 것들이 진보진영 내에서 신중하고 깊이 있게 토론되고 검증되어 나가지 않으면 북한 인권 문제 논란은 진보세력의 정치적 판단을 넘어서서 ‘남북의 평화적 융합과정’에 의외의 역효과를 가져올 가능성도 있다.

진보진영이 인권문제로 북한과 대결주의적으로 부딪혀 나가면서라도 이 문제를 돌파해나갈 것인지, 아니면 국제적 환경의 평화적 조성을 통해서 체제 내부의 억압적 요소가 작동할 이유가 없도록 만들어 가면서 이 문제를 접근해나갈 것인지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보신당의 새로운 자산 + 민노당의 혁신 재창당 노력 서로 결합해야

아무튼 진보신당은 이제 중대한 기로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진보신당이 짧은 기간 안에 모은 사람들은 모두 소중한 진보정치의 자산이다. 언젠가 말했듯이, 민노당과 진보신당은 상대의 문제의식을 자기화하는 치열한 과정이 필요하다.

진보신당 세력의 민노당 비판과 민노당의 진보신당 세력에 대한 비판은 모두 일정한 정당성과 의미가 있다. “너는 낡고 나는 새롭다” 아니면 “너는 진보정치 우경화의 산물이다, 나는 중심을 잡고 간다”라는 식의 상호 적대적 논쟁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소모적 말싸움에 불과하다.

서로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것들을 어떻게 하나로 싸안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큰 집을 지어나갈 것인가는 이제 진보진영 전체의 숙제가 되었다. 선거기간 중에 불가피했던 충돌과 감정 대립의 찌꺼기는 이제 통 크게 내려놓아야 한다.

진보진영의 무대는 더 넓고 커야 한다

마틴 스코지 감독이 지휘하고 레오나르도 드 카프리오와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주연한 영화 <뉴욕의 갱들(The Gangs of New York)>은, 뉴욕을 서로 자기 판으로 만들기 위해 격돌했던 아이랜드 이민자 출신 갱들과 뉴욕 본토박이 네델란드계 갱들이 남북전쟁이 터지자 졸지에 그들의 싸움이 초라해지는 현실을 보여준다.

진보진영의 무대는 서민 대중들의 삶이 겪는 구체적인 현실을 포함해서, 한반도 전체와 적어도 동북아시아의 미래다. 그런 차원에서 민노당은 자신의 혁신 속에 진보신당의 문제의식을 담아내면서, 이번 총선의 결과에 결코 안주하지 말고 치열한 변화의 길로 거침없이 내달려야 한다.

총선의 일정한 성과, 민노당에게 독 될 수 있다

아래는 총선이 있기 전인 지난 4월 3일, 민노당의 <진보정치>에 기고했던 글의 일부다.

“분당 사태 이후 민노당은 총선이라는 비상한 시기를 맞아 일단 단결과 조직 정비로 회생의 계기를 잡았다. 현재 상태로 가면, 분당해나간 진보신당은 정당적 차원에서 존립하기 어렵고 민노당은 살아남아 진보정치의 본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도리어 독이 될 수 있다면? 분당의 충격이 민노당의 혁신-재창당 의지를 구체화하는 데 도화선이 되었다면, 총선에서 나름대로 생존하는 것은 혁신-재창당의 요구를 절박한 것이 아니라고 여기게 할 수 있다.

… 당의 진정한 변화를 목표로 하고 대중적 진보정당의 건설을 이룩하는 일에는 장애다. 그건 이미 문제가 너무나도 드러난 기존질서의 유지라는, 악마의 유혹에 빠지는 첩경이다.

…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 생각이 맞아떨어져서 무리 없이 일을 진행해나가는 것은 아무래도 편한 방식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에 익숙하다가는 결국 편협한 서클주의에 물들고 새로운 발상과 문제제기와는 멀어지는 정치적 근친상간이 된다. 그건 시간이 지나면 열성인자의 유전만이 주도하는 상태가 되고, 진화가 포기되는 것이다.

정치적 근친상간은 열성인자의 유전, 진화의 포기

같은 풀을 뜯어먹고 비슷한 곳에서 너무 오래 살게 되는 생물체는 종 자체가 늙어가게 된다. 변화의 자극도, 다른 종의 충격도 없는 상태에서 생물체 내부의 응전능력은 도태되고 그 나물에 그 밥이 되는 식이다. 진화의 계기가 없다. 지루한 존재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새로 이동해온 종자와 만나거나 또는 서로 섞이면서 교배하고 쟁투하는 과정에서 매우 작은 차이들이 발생하고 축적되어가면서 새로운 종의 진화와 탄생은 이루어진다. 거기에서 생물체의 다양성이 이루어지고 자연의 활기는 확산된다. 조직도 마찬가지며, 정당 역시 다르지 않다.

사상적 순혈주의에 묶이는 조직은 결국 폐쇄적이 된다. 겉으로는 강한 듯하지만 내적으로는 작은 충격에도 쉽게 무너져간다. 현재 진행형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왔기 때문이다. 집단적 패권주의는 기득권의 수호와 사상적 순혈주의에 빠진 세력의 무지를 폭로할 뿐이다. 목이 길어서가 아니라, 진화하지 못하기에 슬픈 생물체의 비극이다.

혁신-재창당의 본격 시동은 이제부터다

혁신-재창당은 이제 본격적인 시동을 걸어야 한다. 민노당의 혁신으로 그칠 일이 아니라, 민노당의 변화를 이루어내는 것이 곧 이 나라 정치의 혁신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혁신의 주체가 되는 일은 자신부터 비롯된다. 총선이 끝나면 다시 힘차게 달려갈 길이 보이지 않는가?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파죽지세로, 그러나 겸허하게 혁신-재창당의 동력을 뿜어낼 일이다.

그리하면 저 높은 하늘에 독수리가 날고 저 너른 들판에 사자가 포효하며, 그 가운데 오늘의 민노당은 내일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대중적 진보정당으로 마침내 우뚝 서게 될 것이다.”

한국사회의 진보정치 또는 진보정당이 어떻게 자신의 이상을 펼쳐져나가야 할 것인지, 많은 고민과 성찰,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의 분단 상황을 명확하게 담아내는 동시에, 적어도 유럽형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의 수준 정도는 포괄할 수 있을 때 진보정치의 큰 집은 넉넉한 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노동에서 권영길, 그리고 특히 농민의 강기갑 민노당 의원의 당선은 이 큰 집을 지어나가라는 역사의 명령을 감당하는 출발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중적 진보정당의 새로운 진화를 의미해야 한다.

보수 우파의 신자유주의 체제 혁명 이겨낼 진보정치의 미래

당장에는 쉽지 않겠지만, 꼭 이루어내야 할 바다. 진보정치의 희망은 보수 우파의 신자유주의 체제혁명 앞에서 더욱 빛날 것이며 더욱 절실해져갈 것이다. 민노당의 혁신-재창당은 진보진영 내부의 주도권 차원이 아니라, 역사 앞에서 겸허한 책임의식과 이번 총선에서 분당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새롭게 획득한 자신감을 가지고 길고 넓게 실천해야 할 일이다.

모든 아름다운 색깔들이 공존하면서도 그로 말미암아 더더욱 훌륭한 작품이 되는 무지개 같은 그런 집, ‘진보정치의 재창조’를 힘차게 희망한다. 광활한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될 것이다.

* <프레시안>에도 함께 기고되었습니다.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