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신당은 ‘있으면 좋은 남의 당’이었다
        2008년 04월 11일 12: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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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반적 보수화, 분당, 비례 경쟁 격화, 낮은 투표율 등의 조건에 비추어 민주노동당의 성과는 좋은 편이다.

    창원을에서 권영길의 신승은 그가 세 번의 대선을 통해 정치거물이 된 데 힘입은 것으로 보인다. 1년 전쯤 권 의원실과 창원의 활동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재선이 비관적이라는 예측을 내놓았었고, 그 이유는 하나 같이 ‘조직적 열세’였다.

    해석해보자면, 2004년 처음 당선될 때만큼 노동조합의 호응이 뜨겁지 않다는 것이었고, 분당까지 겹친 상황에서 비관은 더욱 깊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임기 4년을 얌전히 보낸 권영길은 지난 대선 출마를 통해 진보정당의 정치인들 중 유일하게 경력 관리를 한 정치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유권자 사이에서 권영길의 민주노동당은, 정동영의 통합민주당과는 다르고 문국현의 창조한국당과 비슷한, 대과(大過) 없는 정당임을 증명했다.

    강기갑이 친박연대 덕에 당선되었다는 평은 절반은 진실이고, 절반은 거짓이다. 박사모가 이방호 낙선을 공언했다 할지라도, 노회찬이나 심상정의 지지표 속에 박근혜의 표가 숨어 있지 않다고 확증할 수 없다면, 그런 분석틀을 강기갑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객관성이 없다.

    농촌 투표구에서 이긴 강기갑

    강기갑은 14개 읍면동 중 여덟 곳에서 승리하고 여섯 곳에서 패했는데, 승리한 정동면 곤명면 사천읍 등은 내륙이고, 패한 서포면 동서동 향촌동 등은 해안이다. 농민의 이익이 어민의 이익보다 앞서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강기갑의 농민회 경력과 이방호의 수협 경력이 투표구에서 거의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그렇다면 강기갑의 당선을, 지난 국회에서 그가 보여준 단식과 ‘2단 옆차기’, 즉 그의 농민 대표성에서 떼어놓고 보아서는 안 된다.

       
     
     

    울산 북구에서 이영희가 얻은 31%는 최악이다. 조직력이 훨씬 약한 울산 동구 노옥희의 32%에도 미치지 못하거니와, 현대자동차 출신의 ‘노동계 거물’인 그가 울산 북구에서 최용규(16대, 41%), 조승수(17대, 46%)가 거둔 성과에 크게 뒤졌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자못 심각하다.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지만, 이영희의 낙패는 민주노동당이나 개인의 탓이라기보다는 한국 노동조합운동 자체에서 연유하는 듯하다. 임금 지상주의의 한국 노동조합운동 선두부대가 갈 길은 결국 ‘현대중공업화’이고, 최근 영남 대기업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은 수도권 고소득 전문직의 보수화를 뒤따르고 있다.

    민주노동당에 있어 이번 선거는 대단히 독특했다. 근래 십수 년의 선거 중 북한 문제가 현안으로 등장하지 않은 예외적 선거였고, 선거를 빌어 이북 정권에의 돈독한 충성을 과시하곤 했던 주사파들은 놀라울 정도로 자중(自重)했다. 지레 겁먹은 그들이 감표 요인을 숨긴 것이지만, 앞으로 4년도 그리 인내하리라 보이진 않는다.

    선거에서는 한 표 차나 만 표 차나 마찬가지다. 선전(善戰)이든 무엇이든 노회찬과 심상정은 낙선했고, 앞으로 4년 동안 그들이 선전했다는 사실은 현실 정치에서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는다.

    물론 그 둘이 얻은 표는 여러모로 놀라운 것이다. 이러저러한 사정들을 되살피며 뒤척이지 말고, ‘스타 신인’ 추미애와 송파구청장으로 호평받았던 김성순이 17대에서 어떻게 낙선하고 18대에서 어떻게 복귀했는지, 1980년대 전반 정치금지에 묶인 김대중이 어떻게 활동했었는지를 살피길 바란다.

    조직력이 취약했다거나 급조했다는 조건은 진보신당의 패인이 아니다. 진보신당의 패인은 그들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민주노동당과 분당해야 하는 반북 문제라거나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과제가 공직선거에서 유권자들에게 구구하게 설명할만한 의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너희는 뭐가 다른데?”라는 질문에 답하기에 급급해 유권자들을 만나지 못했다.

    진보신당과 노회찬, 심상정의 마이너스 시너지

       
     
     

    노회찬, 심상정 인물 중심이었다는 점도 패인이 아니다. 정치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람인 유권자의 판단을 구하는 것이라면 자신들이 표방하는 바를 진보신당처럼 인격화할 수 있는 것은 패인이기는커녕 결정적 승인일 수 있다.

    문제는 진보신당이 지향하는 다원화라는 것과 인물 중심성이 마이너스 시너지 효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진보신당에 참여한 여러 세력이 민주노동당 식의 패권이나 획일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동안, 실제에 있어 당의 조직적 사상적 중심인 노회찬과 심상정은 자신의 지역구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당의 장기 구축과 단기 사업이 동시에 각각 진행되면서 진보신당이 내놓는 메시지나 보여준 이미지는 대단히 산만했다. 적녹청황의 바람개비가 뱅뱅 돌면 헷갈리기밖에 더하겠는가.

    진보신당이 가장 잘못한 것은 문화적 다양함은 보여줬으나 정치적 절박함을 심어주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진보신당은 “부유세 무상교육 무상의료의 정신과 강령을 복원하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해왔다. 이것이 옛 세부정책들을 그대로 가져다 쓰겠다는 말이 아니라면, 세상을 어떻게 보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 하는 방법을 배우겠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강령과 성공적인 정책이란 곧, 인민의 경제사회적 욕구를 정치적 동기로 끌어 올리겠다는 목적에서 설계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진보신당은 이런 문제의식의 무엇을 말했는가?

    선전력이 약했다거나 언론이 다루어주지 않았다는 핑계는 소용 없다.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주파수가 맞으면 공명(共鳴)을 일으키는 법이다. 진보신당은 ‘있으면 좋은 남의 당’이었지, ‘있어야 하는 내 당’이 아니었다.

    한나라당이 과반을 겨우 넘겼다는 평은 말 만들기 좋아하는 자들의 여의도에 국한된 평가다. ‘한나라당들’과 보수 무소속이 203석, 민주당과 민주노동당과 개혁 무소속이 96석이라는 분석이 한국 미래를 규정할 것이다.

    더 무서운 건 언제나 우리 나라 선거를 앞서 좌우하는 서울의 지표들이다. 민주당은 서울에서 겨우 7석을 얻었다. 17대 32석, 16대 28석, 15대 19석(국민회의 18, 민주 1), 14대 25석, 13대 27석(평민 17, 민주 10)에 훨씬 뒤질 뿐더러, 군부독재 치하 첫 자유선거라 할 1985년 12대 총선에서 신민당이 얻은 14석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가히 민주당의 궤멸이다. ‘배고픈 민주주의에 대한 인민의 복수’이리라. 하지만 신자유주의에 세뇌된 인민이 옛 민주주의를 버리고 더 센 신자유주의를 택하는 것은 사필귀정이다. ‘민주당들’이 인민보다 먼저 옛 민주주의를 버렸으므로 그들의 존재 의의와 역할은 이미 종언을 고했다.
    (참조 -「‘아편 정치’에 대한 보이콧」,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9371)

    배고픈 민주주의에 대한 인민의 복수

    총선이 진행된 1/4분기 동안 노원 등 강북의 아파트가 상승률과 상승시가총액은 강남의 10배 가까이 되었고, 한나라당 후보들은 뉴타운을 하겠다며 부추겼다. 열린우리당 시절 강남의 고가 행진을 뒤따르고자 하는 강북 주민과 한나라당의 투기동맹이다.

    이것은 좋게 보아주자면 부동산가 분배를 통해 소외감을 보상받고자 하는 것이고, 사실 그대로 말하자면 정치를 이용해 한몫 잡자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가 상대적 지위를 박탈하고, 진보 정치는 아직 아무 것도 못해주는 상황에서 인민이 선택한 합목적적 경제행위다.

    “고용과 소득 불안정에 대한 안전판으로 주택을 바라보는 시각은 3대에 걸친 자유주의 정부들에 대항하며 체득한 노동자들의 자구책이다. … 실수요든 가수요든 사람들이 집으로 집으로만 몰리는 것은 대한민국의 노동정책과 복지정책에 대처하기 위한 나름의 삶의 지혜이다.

    … 사람들이 집을 사고 싶어 하는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근로소득이나 금융소득을 월등히 넘어서는 부동산소득의 실례를 너무도 많이 듣고 보았고, 자신들도 한몫 잡고 싶기 때문이다. 올해의 임금인상률은 5.1%다. 그런데 강남 지역 아파트는 16.7% 올랐다. 세 배의 수익률에 투자하지 않는 바보는 세 배 손해 보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불문율 아니겠는가?

    … 한국 노동운동이 잘 안되는 것은 노동자들 재산의 89%가 부동산에 묶여 있고, 그로 인해 그들의 사회의식이 안정과 보수를 지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 이재영, 「아파트 소유욕을 추수하지 말라」, <레디앙>, 2006. 11. 22

    반동적 인민에게 욕을 퍼부어대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낙담하지는 말자. 1997년 정리해고제가 도입된 이후에도 민주노총 산하 자동차 3사 노동자들의 1/3 가량은 ‘정리해고는 필요악’이라는 식으로 설문에 답했다. 정리해고가, 튼튼한 재벌 회사에 다니는 자신들과는 무관한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재벌 회사 노동자들의 의식이 변한 것처럼 델만큼 데어 보면 수도권 시민들의 의식도 변할 것이다.

    인민의 정치사회 의식이 경험적으로 체득되는 것처럼 정당의 사상도 경험적으로 이루어진다. 진보신당처럼 이것이 좋아, 저것은 싫어라고 조합하여 스스로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계기마다에 인민에게 무엇을 말하는가가 축적되어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정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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