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
    2008년 04월 09일 01:17 오후

Print Friendly

18대 총선 공식 선거운동이 끝난 9일 새벽 3시. 종로의 한 선본 사무실에서는 선거운동원 30여 명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율동을 하며 ‘희망약속’이라는 선거 로고송을 다함께 부르고 있었다.

질펀하게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연출을 요구하는 방송 카메라가 있던 것도 아니고, 로고송의 주인공인 선본 후보는 이미 귀가했고, 누군가 ‘지침’을 내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본인들도 모르게 흥에 겨워 정치적 ‘절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땀 냄새와 열기가 흥건한 작은 사무실에 뒷풀이를 하기 위해 모인 선본 활동가들은 차분히 그간의 소회를 나누고 서로 격려하며 선거운동의 마지막 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았다.  

포털 사이트 ‘다음’의 검색어 순위 1위를 기록하는 등 각종 포털 사이트 순위에 올라, 이젠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진보신당 최현숙 후보의 선본 사람들은 행복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선본에는 웃음이 공기처럼 주위를 감쌌고 제 각각 따로 또 같이 부르는 노래들이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선동도 구호도 없이

그들이 내건 선거 구호는 ‘종로, 진보와 연애를!’ 이다. 격렬한 선동이나 구호를 외친 것도 아니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한 것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진보와 어떻게 연애를 했기에 저렇게 행복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미쳤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미쳤다며 웃는다. 레즈비언 후보가 종로에 도전장을 내민 것도 모자라 선거를 완주하고(?), 목표액을 초과한 후원금도 거뒀다. 최 후보의 수행을 도왔던 ‘산하’씨는 "돈을 주고 누군가 시켰다면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명의 상근자를 제외한 30여 명의 자원활동가들이 자비와 시간을 들여가며 ‘자기신명’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미친듯이 놀았다. 수줍어서 남 앞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던 사람들이 어느새 무대위에 올라 ‘이혼녀, 레즈비언, 아줌마’ 최현숙 후보의 희망 약속을 선전했다.

무슨 마술이라도 부린 듯 사람들이 하나 둘 스스로 모여들자 제각각 지닌 재주를 발휘하더니 홈폐이지가 만들어지고 로고송이 생기는 등 역할이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갔다.

선본을 처음 구성할 때만 해도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관심을 갖고 모여들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다는 선대본부장 한채윤씨는 예상 밖의 성원에 선거의 성과를 어떻게 남겨야할지에 대한 즐거운 고민에 빠져 있다.

한씨는 "이번 선거는 단순히, 성적 소수자만의 선거가 아니라 이 사회에서 자신을 주류라 생각하지 않는 사회적 소수자들과 함께 하고, 또 그들과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며 실천한 선거였다"면서 "진보정치와 성정치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이번 선거의 성과를 통해 진보신당이 적극적으로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간 최현숙 선본은 ‘재능’ 학습지 집회에 참여해 연대 투쟁을 벌이고, 창신동 봉제 공장을 방문하고, 이주노동자 등을 만나는 등 단순히 ‘성소수자’ 로서의 대표성을 넘어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와 연대하고 대변하는 선전전을 펼쳐왔다. 오히려 성소수자임을 내세워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 노동자 등 ‘다수의 소수자’를 위한 정치에 유리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번 선거를 통해 단순히 이색 후보가 나왔다는 것 정도가 아니라 한국정치 역사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관심을 갖고 지켜보며 미래를 준비하겠다"면서 "선본 자체는 해산하겠지만, 향후 네트워크를 통해 선본의 성과를 공유하고 성소수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준비하는 모임 등을 고민 중에 있다"고 말했다.

신변의 위협 등 스펙타클한(?) 시민들의 반응을 상상하며 선본에 뛰어든 LQ씨는 전반적으로 선본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이 무덤덤했다고 전했다. 그는 "선본에 와보니 굉장히 많은 종류의 다양한 사람이 있어 깜짝 놀랐다. 그간에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어렵고 불편해, 먼저 비슷한 점을 찾아 발견해야 마음이 편해지고는 했다"면서 "이번 선거 경험을 통해 왜 특이한가라고 묻지 않고, 또 다른 것을 같게 만들려 하지 않고 각기 다른 지향점을 지닌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덤덤한 시민들의 반응에 대해 최 후보는 "성 소수자에 대한 시민들의 격앙된 반응이 별로 없었다. 시민들이 의식이 성숙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향후 어떻게 읽어야 할지 판단해야 될 과제"라고 말했다.

   
 
 

4년 후에 또 나서자

최 후보는 "인터넷 상의 토론이나 댓글을 보면 과거와 달리 레즈비언이 정상이냐 변태냐 아니냐, 라는 차원이 아니라 어떻게 레즈비언이 국민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있는가, 라는 등의 질문으로 연결되면서 성정치에 대한 의제가 한층 격상하게 됐다"고 평했다.

그는 "이번 선거를 통해 단순히 성소수자의 정체성에 매몰되지 않고 진보정치와 만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한데 반해 정작 진보정치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면서 "이런 의제를 진보정당에서도 적극적으로 함께 공유하고 나누고 싶다"고 주문했다.

최 후보가 4년 후 또 다시 19대 총선에 나설 의향이 있음을 시사하자, ‘미친’ 선본활동가들이 "4년 동안 선거 운동을 준비하자"며 또 웃어제꼈다.  ‘다수의 소수자’를 위한 진보정치와의 연애담은 새벽까지 이어졌으며, 19대 총선에는 ‘트렌스젠더’ 후보를 함께 출마시키자는 발칙한 꿈을 나누기도 했다.     

이같이 대책없는(?) 자기 신명의 근원이 뭘까? 선대본부장 한씨는 재미와 의미를 꼽았다. 한씨는 "한국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레즈비언 후보를 지지해달라고 세상을 향해 외칠 수 있었던 자긍심과 해방감이다. 자긍심이 ‘의미’였다면 해방감은 ‘재미’였다"면서 "우리는 권력이나 돈을 배분한 게 아니라 열정을 배분했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두 진보정당이  잃어버린 소중한 많은 것들 가운데, 그 중 중요한 것이  최현숙 선본에 있었다.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