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욕망은 웃기는 걸 좋아한다
        2008년 04월 09일 11: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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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핵정국 때 KBS에 항의 방문했던 야당 의원이 “물 한잔도 없느냐”고 하자 인터넷 공간에서는 ‘물은 셀프’, ‘쳐드샘’, ‘쳐먹수’ 등의 패러디가 유행했다.

    정치 패러디들은 복잡한 상황을 압축적으로 풍자하고 의미를 변조시켜 웃기는 상황으로 만들어 버린다. 패러디 문화는 이미지 파일이 쉽게 포토샵에 변형될 수 있고 개작될 수 있는 상황에서 디시인사이드라는 사이트의 엽기문화와 맞물려 확장되었다.

    이라크 파병 시기 디시 폐인들의 ‘개죽이’ 깃발 아래에서 친구와 패러디에 대해서 토론했던 적이 있다. 친구는 패러디가 일그러진 정치현실과 문화적인 현실을 비틀고 과장하여 오히려 새로운 현실로 만들어 내는 점에 주목하였다.

       
    ▲ 디시인사이드의 마스코트 개죽이. 가장 왼쪽이 원조 개죽이, 가장 오른쪽이 촛불집회에 참가한 개죽이 깃발 (원본 사진=디시인사이드)
     

    하지만 나에게는 패러디 문화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정치현실이나 사건은 희화화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이기도 했기에 쉽게 그 문화에 동의할 수 없었다. 당시에 나는 너무도 엄숙미가 있는 정치적 의식에 익숙해져 있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 곧 친구의 말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요즘 사람들에게 정치란 사실 웃음거리나 가십거리 이상이 될 수 없는 철 지난 무대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말이다.

    패러디의 역사는 문학을 꿰뚫고 관통하고 있다. 고대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가 당대에 『개구리들과 쥐들의 전쟁』으로 패러디되었다고 한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도 기사 계급의 모습을 풍자하는 당대 문학의 패러디에서 출발하였다고 한다.

    『오딧세이』도 패러디했는데…

    정치 풍자 패러디는 정치가들에게 의해서 다시 활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정치 일반이 희극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효과를 갖고 있다. 삶과 이미 괴리되기 시작한 정치 일반의 모습들은 사실 그들만의 희극을 상영하는 것에 불과하다.

    권력과 기득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비장한 엄숙미와 권위주의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사람들은 권위적인 굳어진 얼굴을 보고 키득키득 웃음을 참지 못하며 허구적인 그들만의 게임으로 보고 이상하리만큼 엽기적인 상상력을 발휘한다. 오늘날 권위의 법정은 판관이 정숙을 요구할 수 없을 만큼 소란스러운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문화에서도 패러디는 파워를 발휘했다. 대장금이라는 드라마가 시청자들을 열광케 할 때 ‘월간궁녀’와 ‘궁녀센스’, ‘궁녀닷컴’이 패러디물로 만들어졌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재미있는 상상력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가상의 인물도 등장하였는데 이미지 파일의 합성을 통해 딸기 두 개를 들고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딸녀’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한 때 딸녀를 찾기 위한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패러디는 원본을 맥락에서 일탈시켜 새로운 맥락과 접속시킨다. 모사술을 통해 개작된 사본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원본의 권위는 사라지고 맥락과 다른 새로운 의미가 등장한다.

    이 원본에서 너무 멀어져서 의미가 달라져 버린 사본을 ‘시뮬라크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 모사술은 원본과 똑같은 위작을 만들던 복제복사와는 전혀 다른 복제복사의 과정을 보여준다.

    기존 의미의 텍스트성은 사라지고 새로운 의미가 등장한다. 상징의 권력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상상력이 대신한다. 모사는 무한한 n개의 복제, 복사를 거쳐 전혀 다른 의미를 던져준다.

    패러디 문화는 미디어몹의 헤딩라인뉴스라는 형태로 미디어에도 진출했다. 주류의 문화가 아닌 비주류의 문화가 미디어에 수용된 것은 이례적이지만 그만큼 권위주의에 대한 문화적 청산이 시작되고 있다는 지표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패러디 문화가 접합되어 있는 영역은 엽기문화 말고도 안티문화가 있다. 안티문화는 안티조선 등을 통해 하나의 문화적 영역을 갖게 되었지만 안티라는 속성이 자기긍정의 요소가 없이 ‘비판적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웃기려는 게 죄?

    그래서 안티문화에 접합된 패러디 문화는 부정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풍자하고, 비틀고, 희화화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생성적인 비판, 성찰적 비판이 아닌 비난적 비판을 만드는 요소가 있다. 그래서 정치가들에 의해서 자체 제작된 패러디물은 상당히 원색적이고, 저질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예전에 그런 적이 있었다. 쉬는 시간에 뛰어다니며 놀고 있는데 호랑이 선생님께서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일순간 교실이 조용해졌는데 선생님께서 아주 화난 목소리로 ‘네 이놈들’ 하면서 매를 드셨다. 그런데 그 순간 호랑이 선생님의 코에서 콧물이 주르륵 나왔다. 아이들은 일순간 ‘와아’하며 웃었다.

    아무리 권위적인 모습으로 정치가들이 자신의 모습을 등장시키려 해도 이미 권위주의적인 편집증을 대중들은 위반하고 그것을 웃기는 상황으로 만드는 기법을 알고 있다. 패러디는 기성문화를 위반하고 조롱하는 욕망이 만들어낸 그림들이다. 그 욕망의 그림에는 웃기지 않는 일이 없다. 잘난 사람들과 기득권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코미디언이 되며 조롱의 대상이 된다.

    기성세대의 권위주의에 맞서는 욕망의 웃음들은 유쾌하고, 엽기적이고, 신랄하다. 두 야당을 노숙자로 만들어 버린 패러디물로 구속된 한 네티즌이 경찰들 앞에 섰다. 경찰들은 명예훼손, 초상권 침해, 무단 개작 등의 이유를 걸며 배후의 인물이 누구냐고 왜 했느냐고 윽박질렀다.

    그 네티즌은 웃자고 한 일이고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권위와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을 우습게 안 불경을 저질렀지만 사실 그의 욕망에는 사람들을 재미나게 웃겨보고 싶은 욕망 이외에는 특별한 게 없었다. 웃기려는 욕망도 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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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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