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정치’에 주목하라
    2008년 04월 08일 12:1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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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지식연구회는 시장권력에 휘둘리는 한국 지식사회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 공동체의 상을 모색하기 위한 젊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모임입니다. 대안지식연구회는 이를 위한 실천의 일환으로 ‘정치-사회비평’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레디앙>은 대안지식연구회가 주 1회 발표하는 정치-사회비평을 게재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관심과 성원 기대합니다. 정치-사회비평은 지행네트워크 홈페이지(http://www.jihaeng.net)에서도 볼 수 있으며, 메일링 리스트 서비스도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내일이 4.9 총선이다. 결과를 예측하기는 어렵겠지만(?), 진보정치의 끈질긴 희망이었던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4년 전 총선에 비하자면, 자못 실망스러운 지지율을 얻게 될 확률이 높다.

4.9 총선, 민주주의 왜곡 프레임의 재확인

   
  ▲ 지행네트워크 사람들. 오른쪽이 필자.
 

사실 이번 총선의 희비를 가르게 된 프레임은 ‘안정론’과 ‘견제론’이었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적 의제가 오직 ‘국가권력’을 중심으로, 그것도 중도나 보수라는 프레임 안에서만 뱅뱅 돌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런 반면,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권(民權)’에 대한 사유는 더욱 후퇴하는 양상을 보이게 될 것은 분명한 일이다.

사실 민주주의는 그 어원 자체가 ‘민(民)’이 ‘주(主)’가 되는 정치-사회모델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정치적 상상력의 지평은 ‘국(國)’이 ‘주(主)’가 되거나, 성장주의의 프레임에 갇혀 ‘자(資)’가 ‘본(本)’이 되는 사회로의 이행이 당연시되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근원적 기초와는 상관없이,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대한 ‘공동상상’이 얼마나 왜곡된 프레임을 형성하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성찰하게 만든다.

권력독점의 욕망의 도구가 된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공동상상’에 있어 또 하나 왜곡된 프레임을 제공하는 것은 ‘대의제’라는 선거 메커니즘의 불가피성에 대한 온순한 인정 경향이다.

그러나 대의제로 표상되는 민주주의의 현행 형태는 만고불변의 진리이기보다는,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어려운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대의제라는 메커니즘을 통해서야 실현될 수 있는 기왕의 지배엘리트들의 권력독점에 대한 권력의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고안된 ‘근대적 장치’일 뿐이다.

오늘날에도 희미하게나마 그 흔적이 남아 있는 ‘두레’나 ‘민회(民會)’, 그리고 비서구 지역에서 여전히 끈질기게 유지되고 있는 ‘마을공화국’ 모델들이 보여주고 있는 긍정적인 민주적 내용물들은 이런 것이다. 이러한 직접 민주주의의 모델 속에는, 오직 ‘대의’를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주체성을 확인받는 ‘유권자로의 타자화’ 경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들의 경제적 격차와 교육 정도, 그 밖의 다채로운 신분적 표지의 차이와는 무관하게, 마을공동체 공동의 의제와 현안에 대한 책임 있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태도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 작은 공동체의 민주주의는 ‘대변자’를 요구하지 않으며, 명목상의 ‘대표’는 존재하지만 이조차도 자연스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환하는 것이니, 권력독점에 대한 욕망이 번성하기는 어렵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굳이 ‘공동상상’을 필요로 할 것도 없이, 논의되는 정치적 의제들이라는 것이 구성원의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맞닿아 있으며, 의사소통의 범위라고 하는 것이 직접적인 접촉에 의해 가능한 작은 범주로 제한되어 있고, 정치적 실천과 봉사의 의무가 구성원 모두에게 잠재적으로 부과되어 있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정치참여에 대한 준비와 각오를 일상적으로 벼려나가는 주체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고전적 모델로 흔히 언급되는 그리스 민주주의 역시 폴리스의 시민 각자는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정치적 참여와 봉사의 순간이 돌아오면 기꺼이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적 의무를 다했다는 점도 이 부분에서 상기될 필요가 있다.

무관심 양산하는 대의제 넘어 ‘시민직접정치’ 모색 필요

요컨대 중요한 것은 ‘대의제’로 상징되는 현대 민주주의의 모델이, 실질적으로는 정치적 주체화에 대한 공동체 구성원 그 자신의 정치적 참여의무와 책임, 그리고 이에 따르는 번거로운 일상적 관심 모두를 회피하게 만드는 기묘한 ‘무관심 구조’를 영속적으로 구조화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선 투표율이 60% 내외에서 간신히 결정되고, 총선의 경우 이보다 낮은 50% 내외의 투표율을 보여주는 현상은 일차적으로는 이러한 ‘대의제’ 정치의 무관심 구조가 초래한 결과이다.

동시에 이러한 현상은 다른 사실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것은 오늘의 평범한 유권자들에게 대선을 통해서 관철되는 ‘국권’이건, 총선을 통해서 실현된다고 주장되는 ‘민의’이건 간에, 도대체가 그러한 정치적 행위 모두가, 자신의 직접적인 이해관계로 상징되는 일상과는 무관하다는 ‘무의식’이 팽배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것은 오늘의 시민들이 국가권력은 물론 의회권력 모두에 대한 불신을 노골화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른바 진보정치와 관련해서도 이러한 태도는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오늘의 심화된 ‘경제적 양극화’ 구조를 단순하게 이해하면, 그 어느 때보다도 진보정치에 대한 관심이 확장되고 심화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정은 차라리 정반대여서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오히려 심화되어 가는 것은 보수화이다. 동시에 오늘날 진보정치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는 세력들은 노동자를 포함한 대다수 민중세력이기보다는, 정치적 계몽의 수준이 높고, 이데올로기 지향성이 강하며,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에 속하는 진보성향의 지식인들이라는 점은 차라리 아이러니다.

반면 보수정당에 대한 유력한 지지계층은 진보정당의 지지층이 되어야 할 대다수 민중들이라는 아이러니도 부정하기 힘들다.

홍세화식의 계몽주의로는 안된다

이런 현실에 대해 가령 홍세화 선생 같은 경우는 민중들의 ‘정치적 각성’이 필요하다는 식의 계몽주의적 태도를 자주 드러낸다. 자신이 처해 있는 계층계급적 상황에 대한 명료한 이해에 기반한 계층계급의식이 형성된다면, 또 진보적 의식을 지속적인 계몽과 각성을 통해 활성화시켜 나간다면, 오늘과 같은 진보정치 지형에서의 존재와 의식의 괴리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는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홍세화 선생과 생각을 달리 한다. 대다수 민중들이 그 자신이 속해 있는 계층계급적 한계상황에도 불구하고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계층계급에 대한 명료한 자기의식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오늘의 민중들은 명료한 계급의식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끈질긴 욕망의 상승구조, 즉 ‘계급무의식’에 충실하기 때문에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이다.

대선정국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던 많은 수의 민중들은 ‘747 공약’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그것을 강렬하게 ‘욕망’했기 때문에, 이명박을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진보정치를 지지해야 마땅할 민중들이 오히려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현상은, 오늘날 대다수의 민중들이 진보정치에 대한 인식의 미숙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계급무의식으로 상징되는 계층계급적 ‘상승욕망’이 훨씬 더 강력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정치적 무의식의 욕망구조 변화가 핵심

그러니 진보정치 세력이 한국의 정치지형 안에서 폭넓은 세력화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힘써야 되는 것은 ‘정치적 의식화’에 기반한 추상적 정치담론이기보다는, 이러한 대중들의 ‘정치적 무의식’과 욕망구조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예리한 문제의식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렇게 거론하고 있는 ‘욕망’이나 ‘계급무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정치적 각성보다 더 어렵고 힘겨운 과제이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그것을 멈출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가능할까. 나는 진보정치세력들이 정치공학에 속하는 다채로운 대중사업을 수행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과 함께 일종의 ‘인문정치’에 대한 인식을 높여나가는‘ 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시대 대다수 민중들을 장악하고 있는 ‘계급무의식’에 해당하는 ‘성공 이데올로기’나 ‘물질주의적 행복’, 또는 ‘경제성장주의’와 ‘국익이데올로기’와 같은 ‘공동상상’의 의제들을 대체할 수 있을, 인문적 가치를 체계적으로 의제화하고, 이를 일상적인 교육서비스의 형태로 민중들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인문정치’의 실험은 즉각적이면서도 가시적인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부자나라’와 ‘부자국민’으로 상징되는 욕망 충족의 캐치프레이즈에 대한 쏠림도 크지만, 최근에는 ‘욕망의 거절’로 보이는 ‘보살핌의 철학’과 생태적 전망에 입각한 ‘풀뿌리 자치운동’, 그리고 ‘인문적 대중교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물질적 욕망을 거절하고 다른 욕망을 촉진하는 ‘인문정치’에 주목하자

이는 오늘의 민중들이 한편에서는 ‘물질주의의 복음’이 뿜어내는 유혹에 거세게 휘말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한 의혹과 불신 역시 다른 한편에서는 자못 끈질기게 견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의 진보정치가 이 정처 없이 흔들리는 ‘계급무의식의 밤 바다’ 저 건너편에 반짝이는 ‘등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없는가. 보수정치세력들의 천박한 물질주의의 ‘공동상상’을 대체할 행복한 인문정치의 다채로운 실험과 모색은 그래서 필요하다.

이 인문정치 실험은 물질주의에 고착된 민중들의 ‘공동상상’과 ‘계급무의식’의 거처를 뛰어넘어, 보다 인간적인 삶의 전망이 가까운 데 있다는 행복한 상상력과 ‘다른 욕망’을 촉진하는 즐거운 정치실험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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