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민운동이여, 진보신당을 부탁한다"
        2008년 04월 07일 08: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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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3년 전 내가 민주노동당에 몸담고 있을 때, 시민운동에 참여하거나 연구하는 분들의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는 초록정당을 추진하던 분도 와 있는 그런 자리였다. 그런데 다른 참석자들은 민주노동당이 녹색정치 혹은 시민사회운동과는 썩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중에 한 분은 참석자 전체가 모인 공식적인 자리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책 한 권을 소개하면서 읽어 볼 것을 권하였다. 프랑스 녹색당 활동가이자 조절이론 연구자인 알랭 리피에츠의 <녹색희망>이라는 책이었다.

    이미 난 그 책을 읽었고, 그가 그 책을 내게 권하면서 이야기하고자 한 바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책의 부제는 ‘아직도 생태주의자가 되길 주저하는 좌파 친구들에게’였기 때문이다. 난 뼈 속까지 생태주의자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겠지만, 그런 초보자 취급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얼마간은 모욕감까지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민주노동당은 그런 소리를 들을 만했기 때문에, 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민주노동당 안에서 그간 시도된 녹색정치의 시도들은 그렇게 간단히 무시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공정치 못한 일이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이라는 ‘틀’이 너무나 진부하고 낡아서 녹색정치를 담아낼 수 없다는 인식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면 심판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정치였고, 대선 이후 민주노동당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2.

    4년 전, 17대 총선 직전까지 나는 대표적인 시민단체에서 4년 반을 일하고, 마지막 1년간은 중견 간부직도 맡았었다.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출한 직후, 나는 그 단체를 정리하고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을 일하기 위해서 자리를 옮겼다. 그런 선택을 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시민운동이 내세웠던 ‘정치적 중립성’ 원칙에 대한 회의였다.

    “어디 정치적 중립이 있느냐?”라는 당위론적인 회의만은 아니었다. 보수정당의 독점체제 속에서 위치지울 수밖에 없는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것은 너무 갑갑한 것이었다. 제기할 수 있는 의제 폭과 깊이를 제한시켰으며, 그 급진성과 상상력을 펼치는데 구조적인 제약이 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성조기를 흔들며 시청 광장에 나서는 단체 회원들과 퇴행적인 정책을 지지하는 보수세력까지 시민단체를 표방하는 것을 보면서, 시민운동의 ‘정치적 중립성’은 전제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시민단체를 벗어나서 진보정당을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의제 폭과 깊이가 확장되고 운동적 급진성과 상상력이 나래를 펼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안 되었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의 진보가 심판받고 분화된 것이 아닌가.

    나는 여전히 권력감시, 특히 국회의원에 대한 감시와 같은 일부 시민운동 영역에서는 기능적으로 ‘정치적 중립성’이 중요하다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시민운동의 일반적인 원칙으로 ‘정치적 중립성’을 내세우는 것은 다른 문제다.

    당시 젊은 활동가들과 이에 대해 많은 토론을 했고, 결론은 ‘정치적 중립성’이 아니라 ‘정치적 독립성’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끝을 맺곤 했다.

    그렇지만 ‘정치적 독립성’이라는 것 역시도 미심쩍었다. 한때의 소나기를 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적인 담론이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거의 10년이 다 지나도록 여전히 ‘정치적 독립성이 해답이다’는 식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시민운동도 참 변화가 어려운 동네이구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아니면 정치적으로 독립적으로 판단해서, 계속 정치적 중립이라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지금 시민단체가 ‘정치적 중립성’이 아니라 진정으로 ‘정치적 독립성’을 향해 변화해 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함께하는 시민행동 오관영 처장이 <시민사회신문>의 좌담에서 회원들과 정치토론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 것이 하나의 출발점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의제와 입장에 따라서, 이를 대변하고자 하는 정당을 공공연히 지지해야 할 일이다.

    되돌아보면 이미 시민․환경운동 등의 운동 1세대들과 상층부들은 시실상 정치에 뛰어들면서 소위 ‘정치적 중립성의 원칙’을 실질적으로 훼손하고 있었다. 이를 더 이상 고집한다는 것은 어쩌면 위선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것이 시민운동의 탈정치화를 부추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정치에 관심 없다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시민단체 활동가들을 목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엇이 시민운동을 탈정치화시키고 있는가.

    3.

    민주노동당의 분열과 진보신당의 출현은 시민운동이 강건너 불구경할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되돌아보면, 시민운동은 노동운동․민중운동의 반정립을 통해서 확립된 측면이 강했다.

    시민사회운동은 노동운동․민중운동이 도전하지 못했던 시민사회의 공론 영역과 다양한 의제를 개척해났지만, 그 입지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기존 운동의 과격성, 급진성 등과 거리를 두면서 반사이익을 통해서 성장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면서 노동운동․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이원적 정립 구도가 어느덧 자리 잡았다. 노동운동 등은 민주노동당을 통해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에 나섰고, 시민운동은 미래구상에서부터 현재의 통합민주당의 일부세력으로, 또한 창조한국당으로 정치세력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분열과 진보신당의 출현은 이런 이분적 구도에 균열이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분명히 ‘창조적 파괴의 과정’이 될 것이다.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이 낡은 민족주의와 협소한 노동운동에 기반하였던 것을 넘어서, 시민사회의 다양한 가치인 평등, 연대, 생태, 평화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여전히 그 진정성과 실력, 무엇보다도 내부의 질곡 요소들에 회의의 눈초리를 보내지만, 진보신당이 천명한 바는 민주노동당과 결별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불가피한 혁신이다.

    그리고 진보정당운동의 이러한 변화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민사회와의 무수한 접촉과 대화를 일궈낼 것이고, 그 과정에서 시민운동의 변화도 유발시킬 수밖에 없다.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이 자신의 생존과 혁신을 위해서, 시민사회라는 중원을 향해 멈출 수 없는 대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이 선거체제로 돌입하면서 잠시 가라앉았지만, 민주노동당의 분열과 새로운 진보정당을 위한 움직임은 시민운동을 살짝 공중부양 시켰다. 즉, 정치적 민감성과 유동성을 높인 것이다.

    아직은 자기집 현관에까지 밀려오지 않았지만,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이 야기한 물결이 어떤 모습으로 퍼져나갈지 궁금하게 여겼다. 초록정치연대와 같은 시민운동․풀뿌리운동의 전위는 이런 파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이제 총선이 지나면, 잠시 중단된 새로운 진보정당을 위한 움직임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 모습과 강도가 어떨는지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지만, 점점 시민운동 활동가과 회원들이 뭔가 반응하고 이야기해야 할 상황들이 보다 자주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는 중에 자신의 운동과 의제를 대변하겠다고 나서는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참여할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나타나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만큼 진보정당운동과 새로워질 것이다.

    4.

    이제 선거일까지 몇일 남지 않았다. 시민운동 활동가와 회원들에게 호소한다. 비록 새로운 진보정당을 세우기 전의 가건물이라고는 하지만, ‘진보신당’을 지지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심상정과 노회찬을 당선시키도록 도와달라. 여성장애인운동의 박김영희와 이랜드 비정규직 비례대표 후보 이남신을 당선시키도록 도와달라. 표를 찍어주고, 회원들에게 알려주고 설득해달라. 전화하고 문자를 보내달라.

    진보신당의 총선 선전은, 총선 이후의 본격적인 재창당의 기반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시민사회 한 복판에서 함께 일궈낼 한국사회의 ‘창조적 파괴’의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시민운동이여, 진보신당을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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