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 만에 부는 의미심장한 바람
    2008년 04월 07일 07: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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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총선 중 가장 재미없는 선거라고 한다. 유권자들의 관심은 적고, 부동층은 유례없이 많다. 결론도 뻔하다고 한다. 언론은 벌써부터 여당 의석이 과반 정도에 그칠지 아니면 개헌선을 넘어설 것인지에만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런 가운데에도 수도권 선거구 두 곳에서는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작지만 의미심장한 바람이 일고 있다. 다름 아니라 서울 노원병과 경기 고양 덕양갑에서 부는 진보신당 노회찬, 심상정 후보의 돌풍이다.

조소앙 이후 58년만에

대한민국 50여 년 역사 속에 진보정당 후보가 국회에 진출한 적은 민주노동당 이전에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당선된 사례는 하나뿐이다(5공 시절 ‘관제’ 혁신정당 민주사회당의 고정훈 후보가 강남에서 국회의원이 된 것은 셈에 넣지 않겠다).

   
  ▲임시정부 외무부장관 시절의 조소앙(1925년)
 

1950년 5월 30일 제2대 총선에서 사회당의 조소앙 후보가 서울 성북 선거구에서 낙승했던 것. 그의 상대는 놀랍게도 한민당의 명망가 조병옥이었다.

조소앙은 1만 3천 표를 얻은 조병옥을 무려 2만 표 이상 앞지르면서 전국 최다 득표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조소앙은 김구의 한국독립당에서 이론가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그래서 그를 진보 좌파로 분류하는 데 이견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창당한 사회당의 강령이 주장하고 그가 5. 30 총선에서 공약으로 내건 내용들은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만약 불과 한 달 뒤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여운형 이후의 여운형’, ‘조봉암 이전의 조봉암’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서울(이제는 단순히 ‘서울’만이 아니라 ‘수도권’으로 바라봐야 할 테지만)에서 보수 우파의 스펙트럼을 넘어서는 정치인이 지역구 선거를 통해 국회에 진출한 사례는 이게 유일하다. 그러고 나서 58년. 이제 우리는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릴 순간을 가슴 졸이며 마주하고 있다.

진보신당의 수도권 당선이 의미하는 것

허나 진보신당의 두 대표 정치인이 수도권에서 당선된다는 게 이렇게 과거 역사와의 연관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첫째, 이것은 진보정당운동이 그 자연스러운 성장의 제2단계에 접어듦을 뜻한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8할이 1인 2표 방식의 비례대표제를 도입한 덕분이었다. 노회찬, 심상정 두 전 의원도 이 때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했다. 그 후 두 전 의원은 17대 국회 4년 동안 그야말로 노력과 실력으로 성장했다. 그래서 거대 여야 정당의 그 어느 의원보다 더 커다란 관심과 사랑을 받는 데 성공했다.

지금 이들은 오로지 지난 4년의 의정 활동에 대한 평가와 인정을 바탕으로 지역구 당선에 도전하고 있다. 4년 전 진보정당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오직 정당 투표뿐이었다면, 이제는 그 정당 투표를 기회로 성장한 두 정치인이 지역구 당선이라는 새로운 출구를 열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주목할 것은 노회찬, 심상정 후보가 노원병, 덕양갑에서 쌓고 다진 30% 이상의 지지의 의미다. 선거 결과야 개표해봐야 알 일이지만, 각종 여론조사는 두 후보가 이미 30% 이상의 지지층을 형성했음을 보여주었다.

말이 쉬워 30%이지 유권자 셋 중의 한 명이라는 뜻이다. 그 중에는 정말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섞여 있을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경제’에 대한 기대 때문에 이명박 후보를 지지한 분들도 물론 있을 테고, 민주화 이후 매번 통합민주당 계열의 정당에 표를 던져온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다양한 흐름들이 노회찬, 심상정이라는 진보 정치인을 중심으로 전체 유권자의 1/3 이상 규모로 응집됐다. 항상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이라는 양축 중 어느 하나를 중심으로 형성되던 그 연합이 아니다. 전혀 새로운 축을 중심으로 한 연합이다. 이러한 연합의 등장을 과연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영남 벨트 당선과 수도권 당선, 그 사이의 심대한 차이

사실 과거 민주노동당도 두 명의 지역구 당선자를 배출했었다. 울산과 창원, 이른바 ‘영남 벨트’라고 불리는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 말이다. 이들 지역구에는 조직된 노동자가 유권자의 1/3 안팎을 차지한다. 그래서 조금만 지지층을 확대하면 지역구 당선이 가능하다. 2004년 민주노동당의 영광의 나머지 2할이 바로 이 셈법에서 비롯됐다.

한데 문제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이런 셈법이 작동하는 지역이 울산과 창원, 두 곳뿐이라는 점이다. 노동계급의 수가 적은 게 아니다. 조직된 노동자가 적다. 그래서 울산, 창원을 제외하고는 조직 노동자가 투표에서 당선을 판가름 낼 힘을 지닌 곳이 없다. “노동자는 노동당”이라는 논리의 파괴력이 극히 미약한 것.

이것은 어찌 보면 과거 민주노동당이 넘지 못한 결정적 지점이기도 하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는 노동당”이라는 논리가 당의 초기 성장 에너지가 됐던 유럽 진보정당들을 벤치마킹했다. 하지만 2000년대의 한국 사회에서 “나는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가진 노동자는 전체 임금 소득자 안에서 소수에 불과하다.

한국 사회에서 “나는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절대치와 상대치가 민주노동당의 질과 양을 제한했다. 그것은 종북주의의 잔존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무너뜨리기 쉽지 않은 벽이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서울의 북쪽 끝과 경기도의 한 베드타운에서 등장한 ‘노회찬 연합’과 ‘심상정 연합’의 의미를 곱씹어보아야 한다. 비록 그것의 지속성과 견고성 여부는 미래의 시험 대상으로 남겠지만, 어쨌든 이들 연합은 노동자와 서민의 다양한 부분과 층위를 서로 잇고 있다.

자신을 중산층이라 생각하는 사무직 노동자들, 서비스 부문을 중심으로 한 비정규직 노동자들, 영세 자영업자들, 교육 문제와 주택 문제가 머리에서 떠날 날이 없는 주부들, 그리고 심지어는 노회찬, 심상정 후보와 함께 하는 영화인들을 보고 지지 여부를 결정한 ‘문화적 좌파’들까지, 이질성이 분리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다양성으로 탈바꿈하는 어떤 결집이 진행 중인 것이다.

이것은 ‘이음의 정치’다. 외국에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대도시를 중심으로 노동계급을 파편화하고 분열시키는 와중에 그에 맞서는 시도로 ‘이음의 정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주요 무대는 세계화가 작동하는 바로 그 중심 무대, 즉 대도시였다. 우리로 치면 서울 혹은 수도권 같은 곳들.

‘진보의 재구성’의 한 길, 진보적 도시 정치를 향하여 

그래서 이것을 달리 말하면 진보적 도시 정치가 된다. 전통적인 산업도시, 즉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 과거에 형성된 공통성을 계속 유지하는 데 머무는 게 아니라 세계화의 연결 지점 역할을 하는 대도시를 무대로 다양한 관심과 이해관계, 정체성을 서로 연결해 뭔가 새로운 공통성을 만들어가는 정치.

지금도 런던 시장인 켄 리빙스턴이 이끌던 80년대 초반의 런던 시정부, 브라질 노동자당의 성장 기반이 된 포르투 알레그레의 지방정치 사례들이 이에 해당한다.

영남 벨트의 가능성과 한계를 요새삼아 그 안에 안주하던 민주노동당에서는 이러한 가능성이 단지 낯선 외국 사례로만 다가왔다. 그리고 그런 만큼, 소수의 조직 노동자를 넘어 어떻게 노동 ‘계급’에게로 나아갈지, 노동자와 서민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차이를 어떻게 넘어설지는 계속 수수께끼로만 남았다.

노회찬, 심상정 두 후보의 수도권 지역구 당선은 드디어 이 수수께끼의 한 쪽 자락이 풀리기 시작할 계기가 될 것이다. 당선 자체로 뭔가 해결된다는 게 아니라 해법을 찾을 소중한 기회가 열린다는 것이다.

진보신당은 ‘진보의 재구성’을 표방한다. 그렇다면 수도권 지역구 후보의 당선만큼 이 당의 출발에 잘 어울리는 사건도 달리 또 없을 것이다. ‘진보의 재구성’의 핵심 내용에 속하는 ‘노동자  서민의 연대의 정치’, ‘진보적 지방 정치’가 수도권 지역구 당선이라는 문을 통해 비로소 구상과 논쟁의 세계가 아닌 실천의 세계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전진 여부는 항상 양이 아니라 질에 따라 가늠해야 한다. 지금 그 질의 판단 기준은 17대 총선에서 달성한 숫자와의 단순 비교도 아니고 영남 벨트의 수성 여부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수도권 지역구에서 부는 진보신당 노회찬, 심상정 후보의 심상치 않은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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