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편 정치’에 대한 보이콧
        2008년 04월 06일 09:12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유독 이번 총선만이 재미 없다고 혹평하긴 어렵다. 선거가 점차 재미 없어지고, 투표율이 경향적으로 저하되는 것은 1987년 이래 흔들림 없이 관철돼온 철의 법칙이다. 급기야 이번 총선에 이르러서는 투표율 50%마저 위태롭다고 하니,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인민의 절반이 승인하지 않은 정통성(正統性, legitimacy) 없는 의회권력이 서게 되는 셈이다.

       
      ▲진보신당의 지역구 및 비례 후보들.
     

    이런 일이 벌어진 가장 큰 책임은 물론 보수정치권에 있다. 1987년께에야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싸웠지만, 그 이후에 정치인들은 셋집 옮기듯 당을 바꾸고, 서로의 정책을 베꼈다. 두 당 사이에 정치인과 정책이 오간 것은 제도정치 안에서의 민주주의라는 큰 흐름에 ‘군부’와 ‘재야’가 수렴된 것이니 과히 탓할 바 없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제도 민주주의로의 수렴이 정치의 몰락이나 불필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에도 두 보수정치세력이 그리 행동했다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1992년에는 김영삼이, 1997년에는 김대중이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여 중원 통일을 이루었으니 마땅히 합당해야 했지만, 그들은 앙상한 민주주의와 그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가상 대결을 이어갔다.

    이는 한 공장에서 나온 같은 물건 떼다 포장만 달리 해 팔아치우는 장사지, 인민 삶을 살피는 정치가 아니다. 앞선 자들은 진작에 노무현이 이명박과 똑같다고 외쳤고, 뒤진 이들은 이제야 이명박이 노무현의 환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김대중과 김영삼, 노무현과 이명박의 가상 대결

    진보세력에게는 아무 책임 없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정치에서 한쪽의 위기는 당연히 다른 한쪽의 기회일 텐데, ‘찍을 놈 없는’ 이 판국에 민주노동당이든 진보신당이든 찍을 놈 못되긴 매한가지기 때문이다.

    지리멸렬한 두 보수정당이 되도 않는 경쟁을 벌이고 있는 지금 민주노동당이 건재하다면, 커다란 파란을 일으켜 명실상부한 3당 구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민주노동당은 ‘2중대’로 상처 입기 전, 2004년 봄의 민주노동당이다.

    사람들은 배고픈데, 민주당은 고매한 민주주의만 읊조리고, 한나라당은 그 반동으로 선동하고, 민주노동당은 오지 않을 통일을 노래했다. 한나라당과 그 전신의 종미반북수구, 민주당과 그 전신의 친미연북민주, 민주노동당 잔류 세력의 반미종북통일은 모두 앙뜨와네뜨 눈높이에서의 ‘정치’ 놀음일 뿐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배고프고, 지금 민주주의와 수구와 통일은 환멸이다. 인민의 아편이다.

    정치 몰락의 또 하나의 종범은 시민운동이니 노동운동이니 일컬어지는 인민의 선진부대다. 그들은 내내 정치를 기피했고, 인민이 정치를 혐오하도록 종용했다. 시민단체는 ‘정치는 비효율’이라는 철학 아래 의석 수를 줄이라 요구했고, 평소에는 독야청청한 척 하다가 고액 연봉과 관용차가 나오는 좋은 자리로 슬그머니 옮겨, ‘역시 정치는 나쁜 것’이라는 인민의 경험적 확신을 굳혀줬다.

    노동운동의 좌익적 룸펜들은 저는 하지도 않는 혁명을 대중에게 강요하며 정치를 멀리 하라 설교했다. 정치하지 않고, 우익적 시민운동처럼 착하게 살거나 좌익적 노동운동처럼 멋지게 사는 것으로 인류의 생활이 개선된 예는 없다. 의도하지 않을지라도 그들 역시 인민에게 아편을 던져주고, 체제를 수호하는 공범이긴 마찬가지다.

    보이콧에서 사보타지로

    이번 총선이 재미 없다는 것은 ‘아편 정치’에 대한 인민의 보이콧이다. 시간이 무르익지 않았으니 보이콧이지, 곧 사보타지로 바뀔 게다. 기능하지 못하는 정치에 대한 인민의 사보타지는 범죄이거나 폭동이거나 혁명이다.

    직장도 가족도 없는 슬럼가의 남자가 아이들을 납치하여 강간하고 죽이는 것을 보복적 엄벌로 막을 수는 없다. 부르주아 범죄학자들의 핑계거리인 ‘사이코패스’는 형벌이 약하고 복지가 발전한, 즉 정치가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발현하지 않는다. 정치가 참여하고 나누지 못할 때 인민은 아동강간범과 떼강도로 변신할 수밖에 없다.

    범죄가 개인적 일탈이나 자위(自衛)라면, 폭동은 그 집합이다. 그러나 조직되지 않았으므로 미래 없고, 삶이 아닌 피흘림이라는 점에서 폭동은 범죄와 일맥상통한다.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기적 폭동이 사라진 것은 도시의 정비, 장사정 소총의 등장, 진압 전문 군경에 힘입은 바 크지만, 지금과 같은 사회의 분절은 다시 체제의 물리력에 도전토록 인민을 내몰 것이다.

    정치가 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래서 기성 정치 바깥의 자구책을 찾아야 한다면, 그런데 범죄나 폭동이 삶을 개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남는 것은 혁명을 준비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가장 유력한 방법은 역시 정치고, 시대는 다시 분노의 정치로 향하고 있다.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