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방적 대중적 사회주의 정당 필요”
    "주사파 도덕적 비난으로는 안 된다"
        2008년 04월 05일 04:1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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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봉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전남대 교수)와 홍세화 ‘학벌없는 사회’ 대표의 대담은 홍 대표가 몇 주제를 묻고 김상봉 후보의 생각을 풀어놓는 식으로 진행됐다. 김 후보는 진보신당과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생각을 작심한 듯 쏟아냈다.

    철학자인 김 후보는 개인 주체성과 국가 주체성을 설명하며 “주사파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시민 주체성과 국가 주체성의 통일이 진보신당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또 김 후보는 전문가주의를 비판하며 “아마추어에게 권력을 주고, 당이 견제하는 것”이 바람직한 모습이므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정치적 아마추어리즘”이라고 말했다.

    홍 대표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분당은 진보의 미성숙 상태에서의 성장통”이라며 주사파를 “성숙의 진보의식이 아니라, 반전(反轉)의 진보의식”이라고 비판했다. 홍 대표는 우리 사회의 경쟁 논리에 대해서도 ‘의식 미성숙’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김 후보는 “시민에 대한 믿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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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세화(이하 ‘홍’) 철학자인 김상봉 교수가 진보신당의 비례후보가 된 것은 적극적 정치 참여다. 우리 나라에서는 지식인이 정치와 거리를 둬야 한다는 식으로 인식하지 않나?

    김상봉(이하 ‘김’) 삶이라고 하는 게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한 것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공동체에서 정치활동을 통해 자기를 실현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정치를 통해서만 온전한 자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철학을 한다면 당연히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다만 어떤 정치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만이 남는다. 정치에서 유리된 철학이라는 것은 오류이거나 위선이다. 다른 인터뷰에서 “철학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칼을 쥐어주기 위해서”라고 말한 적이 있고, 최근 낸 책에서는 “민중이 자기 형성을 하게 하는 망치와 못이 되겠다”고 썼다.

    진보신당은 우리 역사에서 어떤 자리매김을 해야 하나?

    30년마다 거대한 봉기

       
      ▲김상봉 후보
     

    헤겔은 인류 역사가 자유 실현을 위한 과정이라 했다. 한국 근현대사야말로 다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치열하고 집요한 자유를 향한 역사다.

    민중과 지배계계급 사이는 본질적 전쟁 상태이고, 민중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이 지난 200년의 근본 흐름이다.

    우리 역사는 30년마다 거대한 봉기와 분수령을 이루었다. 동학봉기, 3.1운동, 해방과 6.25, 5.18이 그것이고, 지금은 그 다음의 순환이 다가오는 끝이다.

    앞서의 역사가 반봉건, 반제, 반독재였다면, 이제부터는 반자본의 시작이다. 이 과제를 잘 수행키 위해서는 범좌파 범사회주의 대중정당이 있어야 하는데, 민노당의 틀로는 안 된다.

    지금까지의 개혁을 이끈 정당 이름이 ‘민주당’ 계열인 것은 그동안의 시대 정신의 반영이다. 87년 시민적 민주주의가 들어서며 군부독재가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지배자가 들어서고, 자본의 지배가 시작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된 것은 이런 것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다.

    우리가 넘어서야 할 상대방이 정립된 것이고, 자본의 전일적 지배에 저항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그 저항은 밑으로부터의, 일상의 저항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은 개인의 욕망을 매개로 지배를 확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노당은 전위적 정당의 틀을 못 벗어났다. 계급투쟁의 논리, 노조에 기댄 운동만으로는 더 이상 추동키 어렵다. 좌파, 사회주의는 원칙적으로 인본주의여야 하고, 그래서 자본 이외에는 열려 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타자와 소통이 불능일 정도로 폐쇄적이었다. 거기에 북한 문제까지 겹치는 바람에 합리적 의사소통이 더 힘들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진보신당을 보고 무엇이 새로워 그리 야단이냐고 묻는데, 아직 명시적으로 보여준 것은 없지만, 반자본 보편적 투쟁을 위해 진보신당이 지향하는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사회주의 정당이 필요하다.

    최장집 선생이 노회찬을 지지하는 것은 지식인들의 마음 속에 숨겨져 있던 갈망, ‘나도 참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을 진보신당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주사파 도덕적 비난으로는 안 된다

    북한이나 주사파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종북 주사파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사파가 아닌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왜 남한 사회에 주사파가 생길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내적 필연성을 고려해야 대안을 낼 수 있다.

    남한의 경우에는 시민적 주체성을 위한 투쟁을 했고, 성과를 냈다. 그러나 여전히 반(半)식민 상태여서 국가 단위의 비주체성에 의해 개인 주체가 제약되고 있다. FTA나 파병 같은 것이 그 예다. 그런데 북한은 정반대다. 시민적 주체성은 없지만, 국가의 주체성이 상당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남한 현실에 좌절한 사람들이 북한 국가의 주체성에 매혹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주사파를 미개인 보듯이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시민 주체성과 국가 주체성의 통일이 우리의 과제다. 남의 보수화에 의해 국가 주체성에 대한 요구가 더 확대될 것이다. 북에서는 김정일이 죽고 3대에 이르러 시민 주체성에 대한 요구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때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분당은 진보의 미성숙 상태에서의 성장통이다. 그 하나가 주사파 문제다. 반북적인 제도교육만 받다가 대학에 가 선배에게 얘기 듣고는 친북파가 된다. 이 한 번의 ‘뒤집기’로 완전히 북한에 매료되는 것이 바로 미성숙이다. 그 이후에는 인식의 진전이 없지 않은가.

       
     ▲ 홍세화 대표
     

    주사파 문제의 핵심은 누구의 시각으로 바라보는가 하는 것이다. 주사파는 북한 인민의 눈으로 북한 체제를 바라보지 않는다. 제도교육을 받을 때에도, 주사파가 된 이후에도 권력지향적 시각이긴 마찬가지다.

    정치적 아마추어리즘이 필요하다

    다시, 어떻게 비례후보까지 나오게 됐는지 궁금하다.

     한국에서는 정치를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정치를 통치로 보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진보신당 후보들을 보면 ‘남루하다, 보잘 것 없다, 저까짓 것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같은 대학의 동료 한 분이 진보신당의 비례 명부를 보고 걱정 반 비판 반으로 “특정 권익을 위해 싸우는 운동권 활동가들이 전체를 아울러 국정을 운영해야 하는 의원 후보가 되는 것이 옳은가?”라고 묻더라. 여성, 장애인, 비정규직이 앞 번호에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더라.

    한편으로는 일리 있는 지적이나, 정치를 특별한 사람이 해야 한다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정치적 아마추어리즘이다. 고대 그리스에서처럼 아마추어리즘을 지향해야 한다.

    이게 진보다. 진보적 정치는 가장 약자부터 우선 순위를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추어들이 국가 운영은 어떻게 하나? 정당정치가 답이다. 고대 그리스에는 정당정치가 없었지만, 지금은 있기 때문에 훨씬 유리하게 아마추어 정치를 보장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의 최순영 의원이 그것을 증명한다. 최 의원은 공장 노동자 출신이고 교육 전문가가 아니지만, 다른 어떤 교육위원보다 바람직한 의정활동을 펼쳤다. 이것은 최 의원이 속한 민주노동당의 교육정책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아마추어에게 권력을 주고, 당이 견제하는 것이 진보정당의 모습이다. 우리는 단지 거기에 익숙치 않을 뿐이다. 가방끈 긴 사람만 의원 하려면 끝끝내 평등사회를 이룰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점점 더 무한경쟁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눠보자.

    약자에겐 지옥인 한국사회

    함석헌의 글에 “이 나라에는 이념이 없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이념 없이는 나라를 할 수 없다. 이념이 있어야 사람들이 폭력적 강제가 없을 때에도 움직이는 것 아니겠냐. 함석헌은 “이념이 없을 때 남는 것은 잘 살고 싶다는 것”이라고 갈파했고, 이런 욕망이 박정희 시대 이래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순수한 경제적 욕망만으로는 사회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런 사회에서는 고립된 주체들 사이의 온전한 만남이 불가능하고, 국가는 청원경찰이 된다. 말 그대로 만인 대 만인의 전쟁 상태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약자는 배제될 수밖에 없고, 이미 한국 사회는 약자에게 지옥인 사회다. 강자가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해 약자를 수단화하는 사회에서 약자인 여자와 어린이에 대한 폭력과 착취, 돈없고 폭력만을 가진 남자가 유아성범죄로 가는 것이다.

    우리는 경쟁이냐, 협동과 공존이냐를 선택해야 할 기로에 서있다. 그래서 진보신당의 과제는 더 적극적으로 경쟁사회가 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과격한 수단을 쓰더라도 이 경쟁을 일단 중지시켜야 한다.

    경쟁과 물질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어떻게 경쟁을 멈추자는 것을 설득할 것인가? 그것은 자발적으로 가난해지자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일만한 성숙된 의식이 있을까? 그리고 국제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서, 가령 식량의 자급률도 지극히 낮은 상황에서 국제 경쟁을 멈출 수 있을까?

    자발적 가난을 지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가난하든 부유하든 같이 먹어야 하는 것이다. 경쟁을 멈추자는 것은 경제활동이나 산업문명을 멈추자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지향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같이 나누자’이다. 있는 것을 없애자는 게 아니라, 같이 나누자는 것이다.

    구한말 때는 나라가 망해가는데도 지배계급들은 치부에만 몰두했다. 반면 5.18 때는 매점매석도 없었고, 같이 나누어 먹었다. 이런 대동(大同) 정신 없이는 더 이상 못 간다. 

       
     
     

    시민에 대한 믿음 놓아서는 안 된다 

    5.18이나 파리콤뮨 같은 옥쇄 상황에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미래 전망에 대한 일종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함께 도모한다는 약속, 불신이 아닌 확신, 요는 이런 약속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진보신당은 사회적 약속인 사회안전망과 공공성을 겨냥하고 있지만, 우리가 너무 물질과 경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반전이 가능할까 걱정이다. 곳곳에서 작은공동체들이 계속 생길 수 있겠지만, 사회적 대안일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비관적이다.

    그 가능성보다는 방향이 문제다. 방향이 정해졌다면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된다. 시민에 대한 믿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한국의 진보의식은 성숙의 진보의식이 아니라, 반전(反轉)의 진보의식이다. 제도교육만 받다가 ‘선배 잘못 만나’ 바뀐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은 그대로다. 내 아들은 사회주의자이고, 딸은 사민주의자인데, 그런 사상을 이룬 후에도 계속 성숙해 가더라. 그런데 우리는 뒤집은 다음에 멈춘다. 오만이다. 극복했을 뿐이지 성숙되지 않았다.

    관련기사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7894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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