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곳엔 이건희만 나온 게 아니었다
    By mywank
        2008년 04월 04일 06:2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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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일 오후 2시 한남동 삼성특검 사무실로 소환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사진=손기영 기자)
     

    취재기자 :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때 계열사의 실권을 직접 지시했나요?"
    이건희 : "기억 없다"

    취재기자 : "계열사 비자금 조성 직접 지시한 사실이 있나요?"
    이건희 : "한적 없다"

    취재기자 : "경영권 불법승계 과정에 대해 직접 보고를 받았나요?"
    이건희 : "아니요"

    4일 오후 2시, 한남동 삼성 특검팀 사무실에 도착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그를 둘러싼 ‘3대 의혹’을 묻는 질문에 답한 말이다. 채 1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오전부터 특검 사무실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이 씨~”

    이건희 회장을 취재하기 위해 기다리던 기자들, 정리해고 된 삼성 SDI 노동자들, 오전 ‘이건희 구속수사 촉구 기자회견’ 기자회견을 마치고, 이 회장을 보기위해 기다리던 진보신당 관계자들. 그리고 삼성그룹에 대한 특검의 수사를 반대하던 보수단체 회원들의 입에서 터진 짧은 감탄사는 모두 같았다. 예상 못한 바는 아니지만 실망감 때문이었다.

    장면 #1- 굳은 표정의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

    우선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노원병)이다. 노 후보는 지난 17대 국회에서 삼성비자금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또 이를 위한 ‘삼성 특검’을 공식 제안한 바 있다.

       
      ▲ 노회찬 후보가 이건희 회장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이건희 회장의 특검 소환은 남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노 후보는 진보신당 주최로 이날 오전 11시 반부터 열린 ‘이건희 구속수사 촉구 기자회견’에 참가했다. 기자회견장에는 노 후보를 비롯해, 김석준 공동대표, 정종권 부집행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노 후보는 시종일관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성명을 발표하며, 다시 한 번 ‘삼성 문제’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노 후보는 이날 성명에서 “이건희 회장을 이제야 소환하는 것은 그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며 “불법경영권 승계․불법비자금 조성 불법 로비 등 삼성을 둘러싼 ‘3대 의혹’에 대해, 현재까지 밝혀 낸 사실만으로도 이 회장은 이미 사태의 중심에 있다”고 말했다.

    이어 노 후보는 “삼성 특검팀이 삼성의 불법경영권 승계 의혹 관련 ‘e-삼성’ 사건을 무혐의 처리했고, 불법비자금 조성의혹과 관련해 이미 확인된 비자금들이 이병철 회장에게 물려받은 것이라 했다”며 “정관계 불법로비 의혹 역시, 물증 확보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노 후보는 또 “특검이 이 회장을 무혐의 처분하거나 기소하더라도 일부만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면, 삼성을 국민기업으로 바로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는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삼성특검은 삼성의 특별 변호사였다는 사실이 폭로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노 후보는 지역구 선거유세 관계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을 기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머지 당 관계자들은 이건희 회장이 삼성특검에 소환된 오후 2시 넘어서까지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장면 #2- 부산에서 올라온 ‘삼성 SDI’ 해고자들

    같은 시간 귀 밑에 스티커형 멀미약을 붙이고, 삼성 특검 사무실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아침 일찍 멀리 부산에서 올라온 삼성 SDI(구 삼성전관) 해고노동자들이었다.

       
      ▲ 삼성 해고노동자 이충희씨.
     

    이 날 피켓시위에는 25명의 해고 노동자들이 참석했다. 그 중 삼성 SDI에서 20년 넘게 근무하다 해고된 이충희 씨(48)와 허병찬 씨(45)를 만나봤다.  

    이충희 씨는 “처음에 정규직으로 입사해 고용보장을 받으면서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갑자기 얼마 전 일방적인 해고통보를 받았다”며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가 앞장서서 IMF 시절부터 시작한 ‘해고열풍’이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어 “브라운관 TV에서 PDP 사업으로 전환되는 시점을 경쟁사에 비해 늦게 잡아 발생된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국내 생산공장의 물량을 해외로 옮기면서 대규모 인원감축이 이뤄졌다”며 “이 모든 것이 삼성의 미숙한 경영으로 발생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허병찬 씨는 “삼성 SDI는 얼마 안 되는 퇴직금만 받고 나가든지, 아니면 근로여건이 열악한 하청업체로 전근 가든지 알아서 하라고 으름장만 놓고 있다”며 “이런 모든 문제는 ‘무노조 원칙’을 고수하는 삼성그룹의 잘못된 노사문화에 기인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그동안 삼성에 몸담고 삼성을 사랑한 ‘삼성 맨’으로써, 최소한 이건희 회장에 대한 예의는 지키고 싶다”며 “오늘 이건희 회장이 그동안 삼성에 있던 잘못된 문제를 솔직히 인정하고 문제를 해결의지를 보여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면 #3- 이건희를 ‘범털’로 모시겠다는 시민

    ‘둥두둥 둥~ 둥두둥 둥’

       
      ▲ 이건희 회장 구속을 촉구하는 시민.
     

    오후 12시 반 갑자기 삼성특검 사무실 앞이 요란해졌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누군가를 향해 쏠렸다. 빈 정수기 물통을 북으로 삼아 열심히 두들기는 서울 명일동에서 온 어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한쪽면엔 ‘기쁘다 회장님 빵에 오셨네, 범털(돈이나 힘이 있는 재소자를 부르는 은어)로 모시겠습니다’라는 문구가 다른 면에는 ‘아름다운 구속, 이건희’가 적혀 있었다. 

    그가 계속 빈 정수기 물통을 막대기로 두들기자, 주변에 있던 경찰들이 다가왔다. 그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더욱 물통을 두들겼다. 그리고 삼성 특검 사무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다.

    “건희야 건희야, 어서 나와라! 나 너만 보면 열 받아 죽겠다”

    아직 오지도 않은 이건희 회장을 애타게 찾던 그는 “평범한 시민들이 삼성그룹과 이건희 회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 회장에게 알리기 위해, 소품을 들고 오늘 이 자리까지 나오게 되었다”며 “이건희 회장의 조사가 끝나는 늦은 시간까지 이곳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장면 #4- ‘삼성특검 반대’ 외치는 보수단체 회원

    한편 같은 시각. 삼성특검 사무실 주변에서는 보수 성향의 ‘삼성특검 반대 범국민연대’가 주최한 삼성특검 반대 집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에 참여한 단체회원들은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 김용철 변호사를 구속해야된다는 어느 노인.
     

    회원들은 들고 있던 피켓에는 삼성비리를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사진이 붙어있었고, 김 변호사의 얼굴을 볼펜으로 낙서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회원들은 과격한 표현까지 써가며 주변 시민들에게, “삼성특검이 중단되어야 한다”며 소리쳤다.

    ‘삼성특검 반대 범국민연대’ 회원인 이득봉 (73) 씨는 “지금 빨갱이들이 다시 나타나서, 우리나라의 대기업들을 죽이고 있다”며 “삼성은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회사인데, 특검 수사를 하면 삼성은 망하고 나아가 대한민국이 망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이 씨는 “예전에 삼성으로부터 비자금을 관리해온 김용철 변호사부터 감옥에 집어야 한다”며 “오늘 이건희 회장의 수사를 막고, 삼성을 구하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나오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이 날 삼성 특검수사와 이건희 회장소환 대해 찬성하는 단체와 이에 반대하는 단체들 간에 물리적인 충돌은 발생되지 않았다.

    장면 #5- ‘학수고대’ 중인 기자들

    한남동 삼성특검 사무실 앞에는 이건희 회장의 소환을 취재하기 위해, 200명 정도의 내외신 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하지만 특검사무실 앞 좁은 도로에 일부 언론사 취재차량들이 도로 한편을 점령했다.

       
      ▲ 이회장을 기다리고 있는 취재기자와 사진기자들.
     

    오후 1시 15분부터 취재기자들 사이에 본격적인 자리경쟁이 시작되었다. 미리 이곳에 온 기자들은 자리를 쉽게 잡았지만, 삼성특검 사무실 로비가 매우 비좁아 나중에 온 기자들은 자리를 잡는데 애를 먹는 모습이었다.

    이 회장의 소환시간이 다가오자 몇몇 기자들 간에 승강이가 벌어지도 했다.

    “떴다”

    오후 2시. 이건희 회장의 고급승용차가 삼성특검 사무실 앞에 도착했고, 이 회장이 모습을 보이자 취재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던 로비 한편에서 터져 나온 말이다. 그리고 포토라인에 선 이건희 회장을 향해, 그를 둘러싼 ‘3대 의혹’을 묻는 질문이 이어졌다.

    “기억 없다”, “한 적 없다” “아니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아침부터 그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던 기자들을 뒤로 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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