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함께의 무오류 신화, 묻지마 주의
        2008년 03월 21일 12:20 오후

    Print Friendly

    ‘종북주의’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종북에 반대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다른 국가에 복종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북한이라는 국가의 ‘체제’를 추종하는 이들에 반대한다는 의미임을 생각할 때, 우리가 비판하는 그 ‘체제’가 어떤 것인지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과연 그 체제에 대한 비판의 내용이 다함께의 말대로 북한이라는 ‘모종의 자본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극단적으로 타락한 스탈린주의적 현실 국가 사회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얼핏 다함께의 정치에 대해서만 논하는 것 같고, 현실과 무관하기에 불필요한 것으로 보이는 이 논쟁 아닌 논쟁은 논쟁 당사자인 다함께와 정다신이 아닌 이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신당파에게, 의회주의자를 넘어 심지어 국회의원 자리에 연연한 행태라고까지 규정하는 폭력적 언사를 남발하는 등 다함께는 신당파에게 근거 없이 ‘우경화, 개량주의’를 남발했고, 그제서야 비로소 자주파들도 이 구호들을 자신의 언어로 무기 삼아 신당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독 자주파에게만 너그러운 …

    이번 글에서야 비로소 다함께의 폭력적 억측과는 달리, 필자는 자신들의 모 조직의 개량주의와 우경화에는 무지와 맹종으로 일관하고, 심지어 동거하는 자주파들의 ‘우경화, 개량주의’에 대해서는 눈을 감으면서 신당파에 대해 근거도 없이 비난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자 한 것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자 한다.

       
    ▲ 3월 18일 중국대사관 앞에서 열린 ‘중국의 티베트 시위 무력진압 규탄 한국 시민사회단체 공동기자회견’ 중의 다함께 피켓들 (사진=다함께)
     

    글을 시작하기 전에 한 마디 하겠다. 국가 사회주의 사회에서 시장 체제로 질적으로 전환한 모든 사회 경제 단위에서의 변화에 대한 연구와 논문들 작성에도 시간이 턱도 없이 모자란 필자에게 ‘소련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라는 오래 전 쓰레기통에 버린 3류 창작 소설을 다시 꺼내 확인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현실 국가 사회주의 체제의 시장 체제로의 전환에 대해 공부를 하러 왔기 때문에 과거 수집했었던 소련 자본주의론에 대한 소설 책들은 당연히 한국에 놓아 두고 온 것이니 김문성은 필자가 한국에 귀한 자료라도 있다는 듯이 발뺌했다는 등 호들갑을 떨지 않기를 바란다. 현재 각 조직에 자료를 요청한 상태이니 조만간 그의 거짓 주장은 다 드러날 것이다.

    매번 달라지는 논자들이 필자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거나 핵심적인 부분에 대한 왜곡과 무지 탓에 똑 같은 말을 매 번 반복해야 하는 것은 필자에게나 독자에게나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반복되는 부분이 있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다음부터는 논의의 진전을 위해 한 사람만 상대하고 싶다는 것만 밝혀 둔다.

    먼저, 김문성은 필자 글의 짜깁기를 통해 본인이 비독립적으로 변했다고 왜곡하기에 다시 설명한다. 이번에 등장한 김문성을 포함한 다함께 회원들은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연구를 하지 않고 클리프 등의 SWP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기에 필자의 이 표현에는 문제가 없다.

    반면, 본인이 이야기한 ‘본인 외 수 천 개 이상의 연구 결과들’이란, 다함께 같이 ‘특정 주장과 이론에 입각한 것이 아닌’ 철저한 현지 실증 조사에 의한 연구이자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한 개개인들의 독립적 연구물들이다.

    그 ‘수천 수만 개의 논문과 연구물’들은 우리네 삶의 구석구석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가사회주의 체제 사회에서 시장 체제 사회로의 변화에 대한 연구들이다. 이는 다함께가 시비를 거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사실’들에 대한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독립적이며 자주적인 연구 활동이다.

    필자의 연구 역시 이론에 끼워 맞추기 위한 왜곡된 연구가 아닌, 사실과 역사와 현실에 근거한 수천 수만 개의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연구의 틀 안에 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김문성은 ‘소련 등지에서는 사적 소유와 시장이 존재하지 않아 개개인의 자본가 계급은 존재하지 않지만, 국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집단적 관료 지배 계급이 존재한다’고 하는 자기 자신들의 이론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여 전후가 바뀐 주장을 길게 늘어 놓고 있다.

    시장, 소유, 계급

    ‘사적 소유와 시장이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자본주의적 축적과 경쟁이 의미를 갖는다는 기초적 사실’과 ‘사적 소유와 시장의 부활로 자원으로의 집단적 정치적 접근 정도에 따른 권력의 소유 여부가 아니라 생산 수단의 소유 여부를 기반으로 하는 사적 계급 권력이 부활했다’라는 필자의 너무나 정당한 글까지 재인용하며, 그 뜻을 왜곡하고 반박하는 그의 논리의 모순은 글 전체에 걸쳐 널려 있다.

    “개별 자본의 경쟁적 축적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기본 동력이라는 것은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의 출발점 … 자본주의 시장이 전 자본주의 시대의 시장과 다른 것은 시장이 바로 경쟁적 축적을 통해 끝없이 생산관계와 생산력을 혁신해 가는 데 있다.” – 김문성, 「다함께에 대한 저주는 수명을 다했다」

    김문성이 놀라운 필자의 주장이라고 비아냥거리며 인용한 부분에서 필자는 ‘축적과 경쟁은 자본주의 이전 생산양식에서도 존재했었고’ 하지만, ‘사적 소유와 시장이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자본주의적 축적과 경쟁의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는데, 이 주장과 위 자신의 주장이 다른 점이 어디에 있다는 건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놀랍게도 김문성은 이 부분에서 스스로 자신의 주장이 현실과 맞지 않음을 드러내고 만다. 즉, 소련에는 사적 소유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개별 자본이란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개별 자본에 근거한 계급은 없었기에 경쟁적 축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 주는 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소련에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시장이 경쟁적 축적을 통해 생산관계와 생산력을 혁신해 갈 수가 없었다는 사실도 스스로 폭로해 주고 있다.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모종의 자본주의로 선험적으로 규정하고 마르크스의 어구들을 마구 들이 대다 보면 이러한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사적 소유와 시장을 그저 단순한 현상 형태로 규정하다 보면 마르크스가 곳곳에서 한 주장과 늘 모순을 가져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련이 자본주의라는 것을 증명한 후 이러한 주장을 해야지 거꾸로 이 주장을 한 후, 그러므로 소련은 자본주의라는 식의 논리는 그 순서가 뒤바뀌어도 한참 뒤바뀐, 논리의 기본을 갖추지 못한 논리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순서가 뒤바뀐 비논리적 주장은 군비 경쟁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자본주의 시장 경쟁이 군사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지적한 레닌의 제국주의론의 인용은 먼저 소련 등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 국가라는 것을 증명한 후에 인용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다.

    ‘자본간 경쟁이 일국 범위를 넘어 국제적 경쟁으로 발전하면서 제국주의 군사 경쟁으로 발전하는 자본주의의 생리’ 역시 소련이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힌 이후 늘어 놓아야 하는 앞뒤 바뀐 엉터리 주장이다. ‘인민의 필요가 아니라 소련 국가의 이윤을 위해 경제가 작동했다’는 등 이론적 기준만으로 그 체제를 아예 자본주의라 규정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그리고, 필자는 그가 왜곡하듯 군비 경쟁을 상품 수출로만 이해하여 서술한 적이 없다. 그러한 군비 경쟁으로 국제적 수준의 가격의 압박을 받았던 소련의 상품 가격이 왜 그 가치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 한 채, 엄청나게 낮은 가격을 유지했는지에 대해, 소련 경제의 특징을 자본주의로 이해하는 한 그는 어떠한 설명도 할 수가 없다.

    ‘낮은 가격과 막대한 보조금’의 의미

    그러하기에 그는 막상 소련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한 채, ‘소련이 지원한 타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낮은 가격이란 그저 소련 제국의 유지를 위한 막대한 보조’라는 말 외에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소련 자체 내에서도 막대한 보조금을 대어 가격을 낮게 유지했다는 이야기라면 그는 본의 아니게 소련 경제는 국제 경제로의 편입 정도가 약했음을 증명하는 꼴이 되며, 진정한 자본주의적 체제 유지나 경쟁과는 거리가 먼 것을 증명하는 꼴이 되는데 참 난감할 듯싶다.

    김문성은 예까지 들며 ‘해괴한 경제’를 설명하려 하는데, 그는 ‘자본주의 소련’은 여타의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그러한 경쟁 속에 다른 나라의 생산 비용과 비교하며 항상 자문했다는 그냥 자본주의도 아닌 제국주의 소련에서 왜 소비재 기술 혁명은 없었고, 질적으로 저열한 상품들만 생산해 내었고, 다품종 생산을 하지 못 했는지, 소비재는 늘 결핍 상태였는지 등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못 한다.

    국가 경쟁력을 위한 발전은커녕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인 제국주의 소련은 그야말로 ‘진짜’ 자본주의적 축적을 해 오지 않고, ‘괴상한’ 형태의 경제 정체에서 허덕이다가 마침내 붕괴하고 ‘진짜’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김문성의 황당한 왜곡과는 달리, 필자는 단 한 번도 ‘국유화=사회주의’라는 주장을 한 적도 없고, 현실 국가 사회주의 사회를 진정한 사회주의라고 한 적이 없다. 또한, 마치 필자가 시장 근본주의자인양 시장 경제 체제가 전적으로 우월하기에 시장 경제 체제 그 자체를 주장한 것처럼 묘사한 ‘모 아니면 도’식의 전형적인 다함께 논리를 반복하는 김문성의 의도적 왜곡에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시장 경제가 선천적으로 생산성 면에서 우월하다 뭐다 하는 게 틀렸다는 그의 길고도 긴 필자에 대한 비판은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것이다.

    그가 소련 붕괴 후, 사적 소유와 시장의 부활, 자본주의적 계급 부활에 대한 필자의 의도를 철저하게 왜곡한 부분에 대해 항의하며 다시 서술한다. 필자는 ‘사적 소유와 시장이란 그저 현상 형태일 뿐’이라고 하는 다함께의 주장은 현실 사회주의 사회와 그 이후 이행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할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사적 소유와 시장의 부활과 그로 인한 자본주의적 계급 관계의 부활은 소련 시대와 질적으로 다른 어마어마한 사회 경제적 질적 변화를 가져 왔다는 증거들을 보여 주고자 노력하였다.

    『자본』 등 마르크스 저작의 곳곳에서 반복 강조되는 사적 소유와 시장을 껍데기로 치부하는 등 다함께는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에, 일부 기업이 민영화된 것이 아닌 전 사회 경제적 단위에서의 소유 체제의 대전환이 가져다 준 사회와 경제와 계급의 질적 대변화를 알 턱이 없으니, 이를 두고 필자가 단순히 ‘국유화=사회주의’라고 주장했다는 식으로 우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 있겠다.

    문제는 주요 메커니즘

    그러니 다시 한 번 더 강조한다. 국유화된 부분이 아무리 많고 국가에 의한 시장의 왜곡이 많더라도 사적 소유와 시장의 원칙에 바탕을 둔 국가들과 사적 소유와 시장의 원칙을 폐기하거나 주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지 않은 국가들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체제라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그 차이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을 엉뚱하게 ‘국유화=사회주의’라는 단순한 규정으로 오도하지 말기를 바란다.

    한 예를 들었던 상속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예 중 한 가지만 물고 늘어진 것도 황당하지만, ‘소련 시대 관료 집단이 서방 자본가들과 달리 왜 그토록 오랫동안 기이한 형태로 간신히 비효율적인 축적을 해 왔어야 했나?’에 대한 필자의 되물음을 이해하지 못 하고, 상속을 그저 개개 자본가의 재산 상속에 대한 것으로 착각하는 무지는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다.

    소련에서는. 사적인 영역이 존재하지 않아 개인들이 자신의 기업과 가게와 회사를 만들지 못 하니 이윤을 남기는 것은 물론 자본의 축적이 불가능했었다. 이러저러한 생산 수단을 개인이 소유할 수 없었으며 혹 정치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상속과 같은 방법으로 부분적으로나마 개별 기업이나 공장, 상점 등에 소유권이나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었다.

    이와 같은 현실 사회주의 사회 경제의 특징의 기초 중의 기초조차 알지 못 한 채 주변을 맴도는 김문성의 반박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지난 글에서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발생한 수많은 질적으로 새로운 각종 현상들에 대해 나열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도 없다.

    현상 형태일 뿐(?)인데도 그 사적 소유와 시장이 존재했던 누구나 다 아는 자본주의 사회는 붕괴하지 않았는데, 자신들만이 아는 자본주의 사회만 붕괴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못 하면서,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라고 한 적도 없는 이에게 사회주의가 왜 자본주의에 졌는지에 대해 질문하는 억지 논리는 어느 세상 논리인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다함께는 억지 대립 구도를 만드는 데 용쓰지 말고, 필자가 일부러 현실 사회주의 혹은 국가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써 가며 ‘현실 국가 사회주의 체제는 분명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자본주의와는 더더욱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해 왔다는 것 정도는 알고 반박하기를 부탁하는 바이다.

    이제, 본질을 은폐하는 ‘국유화=사회주의’ 혐의를 씌우는 그의 왜곡을 벗어나 이제 노동자 통제와 시장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겠다. 논자는 바뀌었지만 이번 역시 다함께는 그저 필자가 레닌 시기를 그저 ‘비관적으로 해석’만 하는 것인 양 왜곡한다.

    후퇴는 레닌과 트로츠키로부터

    다함께는 스탈린 시기를 아예 자본주의 반동의 시대로 몰기 위해 레닌 시기는 전무후무한 진정한 사회주의 체제였다며 이론적으로만 보았을 때 명백한 이 시기의 반사회주의적, 반노동자적 조치들에 대해 아예 무지하거나 상황적 맥락에 대한 무지막지한 과장에 근거하여 한없이 옹호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하지만, 이 시기야 말로 노동자들의 통제를 비롯한 사회주의 원칙들과 시장(그리고 이의 폐지 여부)에 대한 중요한 고민들과 실험 실패의 역사를 보여 주기에 매우 자세하게 고찰될 필요가 있어 제한된 지면이나마 지난 글들에서 필자가 자세히 묘사했던 것이고, 수 차례 질문을 던졌던 것이며, 이 시기에 대해 무지한 그들은 정확한 대답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것이다.

    즉, 레닌과 트로츠키 등이 노동자 통제에서 경영자, 테일러 시스템 도입, 노동의 군사화 등 원칙으로부터의 명백한 후퇴, 시장의 전적인 철폐 여부와 동시에 전 공업의 국유화에 대한 고민, 그리고 전시 공산주의 이후 시장 요소를 도입한 신경제 정책의 도입 등의 과정에서 명백한 반사회주의적 조치들을 도입한 것에 대한 필자의 질문에 대한 답을 철저하게 회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일련의 초기 혁명 러시아에서의 명백한 사회주의 이론에 반하는 조치들을 비판함과 동시에 그러한 조치 시행의 불가피성을 인정한다. 그것은 다함께가 주장하는 것 같은 상황 맥락적 차원이라는 전형적인 소련 교과서적 변명이 아니라, 이론의 현실에 있어서의 비적합성을 체감한 융통성 있는 볼셰비키의 현실 정치적 노력이라고 보는 차원에서 인정한다는 것이다.

    즉, 진정한 사회주의 원리인 노동자 통제 등의 실험이 전적인 시장 철폐 등의 조건 속에서는 현실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으며, 소련의 역사가 보여 준 그대로 사적 소유와 시장 철폐의 다음 단계란 당시 수준에서 전 산업의 국유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음을 강조해 왔다.

    그리고, 그러한 체제는 세계 시장과의 경쟁과는 완전 무관하게 그 체제 자체로 비효율성과 국가 과부하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으며 필연적으로 정체에 이어 붕괴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세계 혁명이 없을 경우 사회주의 실험이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의 의미는 단순히 지배 집단의 의식적 반동에 의한 자본주의 반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 면과 효율적 면이 공존하는 시장이지만 그 체제가 집단적 소유 체제를 압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예상을 뜻한 것일 수 있다.

    이는 생산력을 늘리기 위할 때마다 시장 요소를 도입했었던 레닌과 볼셰비키 자신들조차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설사 세계 혁명이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철저하게 계획이든 생산자 통제든 ‘인간’이나 ‘인위적 제도’가 시장을 모든 단위에서 대체하는 실험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위적 제도가 모든 시장을 대체하지는 못해

    더군다나, 유라시아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 국가는 물론 인구가 10억을 넘는 국가, 농민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 자영업, 상인 등 비 노동계급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에서는 더더욱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강제적 노동력조차 이용하기 힘들어진 순간’이라는 의미는 현실 사회주의 경제 체제의 특징을 의미한 것을 아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설명 불가능하다며 언급한 ‘초기 소련 경제가 수십 년간 급속하게 성장한 사실’은 사회주의 동원 경제의 특징의 틀로 충분히 설명되고도 남는 것이다.

    시장 경제 사회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모든 사회주의 경제에서의 해괴한 비시장적 생산성 향상 독려 운동은, 이 체제는 진정한 노동자 국가와 상관없다는 증거임과 동시에 사적 소유와 시장과는 거리가 먼,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와는 거리가 멀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60~70년대 이후의 소련 등 현실 사회주의 체제에 가해진 압박은 그가 과장한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의 외부로부터의 압력 이전에 비시장 경제라는 현실 사회주의 고유의 자체 메커니즘에서 비롯된 위기와 정체, 붕괴였다.

    또한, 서구 복지 사회에서의 복지 축소는 단순무식하게 자본가들에 의한 신자유주의의 공격 때문만이 아님은 물론이요, 서구 복지 국가들이 겪었던 복지 후퇴 등의 변화 등은 체제 붕괴 이후에 진행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혼동하지 말기를 바란다.

    필자가 시장 우상화나 시장의 우월성을 주장했다는 김문성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은 다함께 특유의 지독한 편협성의 산물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전 경제 영역을 노동자 통제만으로 조절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전통적 노동자 계급이 다양하게 분화되고 있고, 임노 관계와 직접적인 연관을 갖지 않는 다양한 직업이 존재하는 현대 사회에서 100여 년도 더 된 노동자 통제 잣대의 절대화는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

    각종 사회적 소유의 실험과 노동자 경영 참여 등 소유의 평등화에 대한 실험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하지만, 철저한 시장 철폐가 전제된 노동자 통제 실험은 더 이상 이론적 적합성 없이 지지될 수는 없다. 이를 두고 시장 우상화라고 주장하는 것은 몽상가임을 스스로 드러내 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설픈 정치 경제적 논리를 맛깔 나게 하기 위해 다함께 이데올로그들은 종종 ‘어찌 사회주의 사회가 그럴 수 있는가?’라는 도덕적 어구들을 덧붙이곤 하는데, 그 역시 그러한 예들을 교묘히 배치해 놓았지만, 전 세계 좌파가 소련의 반사회주의적 행태에 대해 비판을 행해 온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마치 ‘소련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이들은 곧 소련을 사회주의 사회라고 옹호하는 이들’이라는 식의 왜곡된 구도에 독자들은 말려들지 않을 것이다. 또한 소련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 마치 자신들 외 좌파들이 비판하지 않거나 침묵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에 현혹될 사람은 없다.

    ‘사회주의 인정 = 소련 지지’라는 도식

    다함께가 왜곡해 마지 않는 여타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들 역시 그 이상의 비판을 해 왔음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트로츠키 자신조차 생전에 추방과 협박과 심지어 생명에 대한 위협까지 당하면서도 정치적으로 관료 집단에 대해 맹비난을 퍼부음과 동시에 소련 체제를 방어했었는데, 이런 식으로라면 다함께가 추종한다는 그 트로츠키도 소련이 행한 반사회주의적 행위와 불평등에 대해 옹호했다고 해야 하는 게 옳은 것 아닌가?

    혁명을 주장하지 않는 좌파라도 얼마든지 마르크스든 레닌이든 트로츠키든 그들의 역사에 있어서의 분석 틀을 이용하고 그에 따라 비판할 수 있다. 그들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정신인 사회주의 혁명을 외치지 않는 이들이 많은 맑스 꼬뮤날레 등 각종 좌파 운동, 행사 참여자들 혹은 수많은 각종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조리 다 마르크스를 모욕하는 것인가?

    트로츠키의 소련 등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비판의 틀과 역사에 있어서의 그의 분석틀 자체는 너무도 올바르다. 그러나 그와 그의 추종자들의 전망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갖는 것은 너무나 타당하다.

    더군다나, 국가사회주의의 실험 실패에 그를 포함한 볼셰비키들의 실험에 상당한 원인이 있었다는 것이 명확하게 된 시점에서조차 ‘묻지마 트로츠키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민중에 대한 명백한 죄악이다. 지난 번에 강조했다시피, 트로츠키의 정신은 물론 그의 근본적 사상마저 왜곡하면서 자칭 트로츠키주의자라고 하는 것이야 말로 명백한 모순이며, 트로츠키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다.

    베네수엘라와 베트남에 대한 예 역시 그 진정한 의미를 왜곡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베네수엘라 등지에서의 실험을 지지하며, 몇 가지 이유만으로 타도해야 할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할 생각이 없다.

    다함께는 크게 착각하고 있는데, 필자는 다함께든 어디든 어떤 조직의 민중 운동과 개혁에 대한 지지 혹은 비판 자체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즉, 베네수엘라 실험 지지, 비판의 구도가 아니라, 모든 현실 사회주의 국가 체제를 아예 타도해야 할 자본주의 체제로 규정할 수 있는 일관된 잣대가 있다면, 베네수엘라에 대해서도 똑 같은 잣대로 평가를 하라는 주장이다.

    쿠바는 ‘마르크스주의도 모르는 극소수 게릴라들의 쿠데타 후 자본주의 정권 수립’ 정도로 폄하하면서, 쿠바와 더불어 중남미 좌파 실험을 좌지우지하는, 그대들이 주장하는 모든 사회주의적 원칙에서 벗어나 있는 베네수엘라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무슨 모순인가에 대해 물은 것이다.

    베트남 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국제사회주의자 그룹은, 북한 방어를 포기한 1950년 한국 전쟁보다 무려 4년 전에 일어난 1차 베트남 전에 대해서는 한국 전쟁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대리전으로 규정, ‘제국주의 대리전을 내전으로’의 구호를 외치며 프랑스의 월맹 공격에 대해서 방어를 명백히 포기했었다.

    상식적으로도 4년 뒤에 일어난 한국 전쟁은 제국주의 대리전이라며 방어를 거부했는데 그 보다 먼저 일어난 유사한 전쟁에서 월맹을 방어하라는 구호를 내세웠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세계 혁명의 전망이 부재하니 베트남에서든 베네수엘라에서든 어디든 설사 혁명 세력이 권력을 획득해도 곧바로 자본주의 체제가 되어 타도의 대상이 되는 모순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필자가 엄청난 비밀을 폭로는커녕 엄정한 비판을 한 자유주의 야당 지지에 대한 김문성의 변명은 읽기조차 거북하다. 당시 전노협이 그렇게 결정해서 따랐다는데 노총이 노동 정당이 아닌 정당 지지해도 그대들은 이를 옹호할 것인가?

    백선본은 있었다

    당시 전노협 내부에서 주사파를 제외하고 자유주의 정당을 지지하자는 결정에 얼마나 반대하던 이들이 많았는지에 대해서는 알고나 있는가? 당분간 그러기는 힘들겠지만 민주노총(혹은 그 중 가장 선진적인 단위 연맹에서)이나 비정규 노조와 같은 곳에서 혹 신당이나 타 당을 지지하면 그대들은 소속은 민노당이지만 이에 따를 것인가?

    당시에도 ‘당’적 형태는 아니지만 백선본 등 분명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도모하던 이들이 있었다. 독립적 노동자 정당이 부재하면 그를 조직하기 위해 만들어 가야지 부르주아 야당을 지지하라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부르주아 야당을 지지하면 탄압이 줄어 든다고 믿었는가? 독립적 노동자 정당은 저절로 형성되었는가? 독립적 노동자 정당이 생긴 뒤부터는 지지하기 시작했다니 노동 정당에 무임승차한 역사를 스스로 보여 주어 놀라울 따름이다.

    필자는 바뀌어도 대표 유학국에 대한 본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집요하게도 물고 늘어지며 지엽적인 것을 비겁하게 지금까지 끌고 오는 것은 그대들이다. 그대들은 진정으로 그의 유학국이 중요한 핵심이라고 생각하는가?

    실수했다고 했는데 이렇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만큼 대표의 전기가 그대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한가? 그대의 필자에 대한 비판들은 실제와 다른 게 넘치고도 넘치는데 필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묻는다. 한 지역으로 명령에 의해 대거로 한꺼번에 이동, 머리수로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는 것이 평범한 노동자 민중의 정당 활동 방식인가? 필자는 도덕률만 강조한 적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사랑하지도 않은 ‘스탈린주의 정당’ 민주노동당에 숙주로 기생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고, 좌파적 ‘도덕률’ 위반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부탁하건대, 자유게시판의 폐해를 주장하려거든 타 조직들의 폐해적 자유게시판들에도 자신들의 광고를 중단하고, 자신들의 사이트에만 올리는 것이 자신들의 논리에 맞는 행동일 것이다.

    필자의 주장은 저주가 아니라 정당한 비판이다. 남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우기 전에 자신들을 성찰하라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필자의 주장이라는 것 잊지 말기를 바란다. 다함께 운동의 정당성과 신뢰는, 김문성과 같은 이들이 강변하는 무오류의 신화를 위한 치졸한 변명이 지속된다면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것 명심하기를 바란다.

    진정으로 유능한 활동가와 제대로 된 급진적 청년들은 언어와 관념의 급진성이 아닌 과학으로 자신의 정치 노선을 선택한다. 이 판에서 혁명을 외치지 않으면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논쟁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현실 국가 사회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마르크스주의적 잣대로든 다른 잣대로든 보여주어야 하는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