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신당은 우리를 이용하지 말라"
        2008년 03월 14일 11:0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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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과 한을 풍선에 담아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간직했다가, 바늘로 툭 건드리면 아마 그렇게 터져 나올지도 모르겠다. 옆에 사람이 볼까 창피해, 흐르는 눈물을 참고 또 참다가 기어이 옆 사람 신경쓰지 않고 통곡했던 조합원들이 이제 좀 진정이 됐나 싶다.

    이랜드 노조 김경욱 위원장이 눈동자가 시뻘건 채로 마이크를 잡고 마지막 말을 했다.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모르지만 생계비를 지급하겠습니다.”
    잠시 반색을 하는 조합원, 그리고 이어지는 나쁜 소식.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생계비는 홍윤경 사무국장과 이남신 부위원장의 퇴직금으로 나눠드리는 겁니다.”
    또 한번 소리치며 기겁하는 조합원들. 그리고 몇몇 조합원들은 절규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생계비를 받아야 해요. 퇴직금까지 나눠서 생계비를 받아야 하냐고요.”
    그렇게 마감된 총회장 복도에서 안면이 있는 월드컵분회의 한 조합원이 인상을 구기며 내게 말한다. 난 아무 말도 못한다.

    “우리가 어떻게 결정하는지 보셨죠. 진보신당에서 잘하셔야 합니다.”
    아직도 충혈 된 눈동자의 김경욱 위원장이 내게 건넨 말. 단어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힘주어 얘기한다. 듣는 사람을 위압한다.

       
      ▲지난 해 열렸던 이랜드노조 총회 모습.(사진=이랜드 노조)
     

    시간이 흘렀다. 글을 쓸까 말까 망설이기도 했다. 총회의 장면, 분위기, 그 사람들의 어떤 울컥거림의 만분의 일이라도 내 짧은 글이 옮길 수 있을까. 절규하면서 반대의견을 주장한 조합원의 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진보신당 우리 이용하지 마세요. 왜 우릴 정치적으로 이용합니까. 민주노동당도 우리 이용하지 마세요. 우린 그냥 투쟁하고 싶어요. 다시 일하고 싶을 뿐인데, 왜, 왜 우릴 자꾸 이용하십니까.” 난 왜 ‘정치운동’을 하겠다고 나섰을까.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우린 그냥 투쟁하고 싶다. 이용하지 말아라

    이랜드노조 총회가 열리는 3월 9일은 진보신당 서울시당 창당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시간도 같았는데, 진보신당 정종권 부집행위원장이 이랜드 총회에 가라고 한다. 조합원들 앞에서 발언을 할 수도 있으니 준비도 하란다.

    이랜드노조가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을 진보신당 비례대표로 출마시키겠다는 결정한 건, 9일 총회 몇 일 전인 4일 총회에서였다. 이랜드노조의 결정이 알려지면서 민주노총을 비롯한 수많은 관련 단체에서 그 결정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직간접적으로 노조에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이랜드노조 김경욱 위원장을 비롯해, 당사자인 이남신 수석부위원장, 그리고 현장의 조합원들까지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반대의견을 가진 조합원들, 그리고 연대단체들, 비정규노동운동을 하는 단체들이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그 결과 총회가 5일만에 다시 소집됐다. 

    난 민주노동당에서 이랜드노조를 외면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랜드노조가 총회를 통해 진보신당을 선택했다는 결과에 일종의 승리감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만이었다. 말로만 듣던 현장의 정서,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을 두고, 고뇌하는 투쟁 중인 사람들의 고민들을 뼛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난 8년간 상근을 했던 민주노동당을 탈당할 때, 오직 나만 힘든 줄 알았다. 이처럼 고통스러운 일을 내가 왜 겪어야 하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 그렇게 나만 힘든 줄 알았다. 아니 민주노동당을 탈당해야 하는 당원들만 고통스러운 선택을 앞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한참 빗나간 생각이었다. 현장 조합원들의 고민은 치열했다.

    총회장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순천의 조합원들이 기차를 타고 올라왔다. 지난 총회에서 결정된 진보신당 비례전술을 파기하는 안을 가지고 상경한 것이다. 홍윤경 사무국장은 이랜드노조와 연대하고 있는 단체의 발언을 주문했다.

    총회장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이랜드노조의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서비스연맹이 나섰다. "진보신당으로 가는 건 적절치 못하다"는 발언을 했다. 상급단체의 주장이라 진보신당 비례 전술에 찬성하는 조합원들은 어지럽다. 김경욱 위원장은 지난 총회의 결정에 이의가 있으면, (비례대표 전술보다) 더 좋은 안을 가지고 나와서 얘기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서비스연맹도 투쟁계획이 담긴 자료를 준비했다.

    발언을 듣고 있는데 문자가 온다. ‘경섭아, 안녕. 반갑다. 뒤에 와있어.’ 뒤를 돌아오니, 오랜만에 보는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이상규 사무처장이 씁쓸하게 웃는다. 아, 가슴이 시리다.

    민주노동당에서 이해삼 전 최고위원이 나와서 발언을 했다. 투쟁계획도 수첩에 적어서 조합원들에게 호소력 있게 말했다. 이제 내 차례다. 발언하는 내내 심하게 낯이 뜨겁다.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잔혹한 판단자가 되어 버린 아주머니들은 머리를 싸맨다.

    이런 상황에 오게 된 것에 대한 사과, 그리고 진보신당에서는 이랜드노조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만한 계획을 현재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진보신당 정종권 부집행위원장이 전날 총회에서 발언할 때 “거짓말 하지 말라”고 ‘지침’을 내렸다.

    다만, 오늘 총회에서 진보신당 비례대표 전술이 재차 확인하는 결정이 나게 된다면, 당원들과 함께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을 비례 2번으로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호기롭게 발언하고 싶었지만, 사실 쫄면서 발언했다.

    우리가 뭘 잘 했다고 뻣뻣하게 고개 들겠어?

    “우리가 뭘 잘했다고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발언하겠어. 잘했어.”
    조승수, 한석호, 최은희 등 총회에 함께 간 진보신당 당원들도 착잡하게 발언을 지켜보다가 위로해 준다.

    이젠 조합원들의 찬반토론.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어느 한쪽에 깊은 상처를 준다는 생각하기에 싫다. 어제까지 함께 울고 웃던 사이었는데.

    “지난 번 총회에서 우린 이미 결정을 했어요. 나도 고민고민한 끝에 결정한 겁니다. 결혼할 때도 이렇게 고민하지 않았어요. 왜 지금 와서 번복 하려고 합니까.”

    누가 발언을 하든, 아주머니들 사이에서는 서로의 감정이 번개처럼 신혹하게 전달되어 이내 눈물을 흘리곤 한다.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말해도 울고, 자신이 지지하는 발언을 들어도 눈물부터 쏟는다.

    이제까지 할 거 다 해봤는데, 이제 이거라도 한번 해보자며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로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을 보내자는 측과, 정치에 휘말리지 말고 굳건하게 투쟁하자는 쪽, 그리고 민주노동당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는 건 못할 짓이라며 민주노동당과 함께 하자는 조합원들 모두가 괴롭다. 말을 하는 조합원이나 듣는 조합원이나 모두 비통하다.

    세 시간 가량 토론을 진행된 후 투표. 과반에서 두 표를 넘겨서 진보신당 비례대표 전술이 채택됐다. 가결이 됐지만, 환호성을 지르는 조합원은 아무도 없었다. 원치 않았던 비정규 투쟁의 상징에서 이제는 민주노총이 결정한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결정의 순간’을 감내해야 하는 단위노조 조합원들은 고뇌할 수밖에 없다.

    가장 상처 받을 자 누구인가

    이번 결정에서 가장 상처를 받을 자 누군가.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조합원일까, 정치에 휘말리지 말자고 주장했던 조합원들일까. 이 말은 하고 싶다. 차마 발언하지 못했던 말.

    이남신이 국회에 들어가면, 이랜드 그룹 박성수 회장이 가장 싫어할 거란 말. 전경련이 가장 싫어하고, 경총이 가장 상처받을 거란 말. 그 말이라도 전하고 싶다.

    지난 겨울부터, 아주머니 조합원들이 데모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복장이라고 할 수 있는 등산화에 등산바지를 입고 다니는 걸 봤을 때, 머리가 복잡해졌다. 복잡한 심정의 실체를 알 수 없고, 실체를 파헤치기도 두려웠다. 그건 내가 아플까봐 그랬다. 이제는 아파도 진보신당 당원들과 그 실체를 공유해야 할 순간이 왔다.

    얼마 전 내가 출마하는 서울 마포구을 총선 선대본부장이 당원들에게 보내는 호소글.
    이 글이 진심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할 수만 있다면, 우린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

                                                      * * *

    우리에게는 절박한 하나의 과제가 있습니다.
    진보신당 비례대표 2번이 될 이랜드노조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을
    기필코 이번 총선에서 당선시켜야 합니다.

    지난 3월9일 이랜드 노조는 눈물바다 속에서 격론을 거쳐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을
    진보신당 후보로 내세우기로 최종 결정했습니다.

    이랜드 노조를, 비정규직노동자들을, 비정규직노동자의 투쟁과 눈물을
    반드시 국회의사당 담장 너머로 명예롭게 입성시켜야 합니다
    ….

    그래야 통곡을 하며 진보신당의 후보가 되기로 했던
    이랜드 노동조합의 선택이, 차별과 설움과 분노로 얼룩진
    평범한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그 눈물의 강이, 도도한 강물을 이루어
    저 국회 담장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

    정경섭이란 총알받이를 내세워 이랜드노동자를,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의석에 앉혀야 합니다.

    총선용 정당 진보신당을 이 땅의 정치사를 뒤짚어 놓을 매혹적인 진보정당으로
    탈바꿈 시켜야 합니다.

    가장 급진적인 의제들을 가장 매력적으로 제기하는, 실력 있고 권위 있는 정당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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