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좌파, 소수가 손해 감수하고 연대해야
        2008년 03월 14일 09: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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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정부의 첫해, 곳곳에서 진보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진단들이 쏟아진다. 하지만 보수 세력의 결집에 대한 진보의 대항 수단은 여전히 ‘민족, 국가, 민주’의 틀 속에 갇혀 있다. 힘과 힘의 싸움은 영원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대항세력화에 집중하면서 내부의 차이들은 이 안에서 다시 삭제하는 정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사람들 마음속의 뿌리 깊은 차별과 편견들은 ‘성, 가족, 사랑, 몸’과 같은 일상적이고 사적인 것이라고 보였던 곳에 숨어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에 입각한 문제 제기들은 당사자들의 이해관계에 불과하거나, 더 큰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부문적 사고방식이라고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성정치, 진보를 묻다>는 현재 진보의 ‘위기’를 성정치의 관점에서 제기하려 하는 기획이다. 기존에는 진보가 “너 진보 맞니?”라고 물었다면, 이제는 각기 다른 영역들이 진보에게 물어야 할 때다.

    그 기획의 시작으로 진보정당 중심의 사회변혁을 화두로 잡고 새로운 주체의 확장이 가능한 새로운 진보를 꿈꾸고 있는 진보신당연대회의(가칭)의 심상정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기존의 문화운동과 인권운동의 틀을 넘어선 새로운 연대의 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의 한채윤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다.

    연재 순서
    ① 총론: 새로운 진보정치와 성의 정치(심상정, 한채윤 대담)
    ② 가족 중심에서 사회적 연대로(엄기호)
    ③ 국가 중심에서 지역 성정치로(임동근)
    ④ 공공복지와 성정치(유성재)
    ⑤ 토목 중심에서 감수성의 정치로, 혹은 생태주의와 성정치(목수정)
    ⑥ 남성 중심에서 여성·이주민·장애·소수자로(타리)
    ⑦ 누가 성정치를 두려워하랴

    연대에 실패한 좌파

    연대라는 말만큼 좌파의 가슴을 뛰게 하는 언어가 또 있을까? 연대는 좌파에게는 ‘개인과 자유’만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들과 비교하여 좌파가 존재하는 근거이다. 좌파는 연대를 통하여 소통하며, 연대를 통하여 투쟁하고, 연대를 통하여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연대를 통하여 사회를 변혁한다.

    좌파에게 연대는 사회를 변혁하는 정치적 전략이며 동시에 비정규직이나 성소수자와 같은 정치적/사회적 약자와 ‘손해를 감수해서라도’ 함께하는 좌파의 윤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좌파들은 오늘도 연대조직체를 만들고 연대투쟁을 하며, 연대의 가치를 정당의 이념으로 앞세우기도 한다.

    좌파에게 연대는 너와 나의 ‘작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동의 적을 향해 같이 투쟁한다는 기본적인 전제가 깔려있다. 좌파의 연대논리에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 투쟁하는 우리가 같거나, 투쟁의 대상이 같거나 하는 ‘동질성’의 원리인 것이다.

    가장 직접적인 형태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당사자들 간의 품앗이 연대이다. 같이 파업을 하고 있는 사업장들끼리 침탈이 예상될 때 서로 서로 지켜주고 함께 투쟁하는 것이 그것이다.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 역시 비슷한 원리에 근거해 있다.

    비록 내가 사회적 약자는 아니지만 그들의 적과 나의 적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들과 연대한다. 이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청년실업이나 비정규직의 문제이다. 그 문제의 심각성이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곧 나의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에 지금 연대한다는 것이 연대에 대한 좌파의 기본적인 수사였다.

    이런 수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성소수자나 장애인의 경우에서처럼 이해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이름으로 윤리적/도덕적인 호소에 의지하는 연대 정도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너와 내가 ‘같은’ 인간이니 연대한다는 동질성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좌파는 연대를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전략이자 스스로가 존재할 수 있는 윤리적 근거로 선언하였지만 현실에서는 ‘품앗이 연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실패하였다.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민주노총은 전면적인 지원과 연대를 천명하였지만 얼마 전 보도된 바에 따르면 민주노총의 핵심을 차지하는 대공장노조에서 지원한 규모는 대단히 미미하며 아예 한 푼도 내지 않은 대공장노조도 있었다.

    ‘같은’ 노동자이지만 ‘같은’ 노동자로 생각되지 않고 있다. 노동자라는 ‘같은’ 이해관계이지만 임금의 액수와 고용조건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안정적인가 불안정적인가라는 삶의 모양과 투쟁의 급박함에 대한 ‘현격한’ 차이로 인해 연대는 발생하지 않고 있다.

    ‘인권’의 이름에 의한 도덕적 연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권’의 이름에 의한 연대는 좌파들에게 평상시에는 늘 이해되고 존중받는 것처럼 보인다.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하건 좌파치고 소수자들의 인권이 보장되어야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도덕적 연대는 정치의 시간에 정확하게 작동을 멈춘다. 이번에 성소수자의 종로구 출마에 대한 좌파 내부에서의 논란이 대표적이다. 당의 외연을 확대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라 대중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야 하는 때에 레즈비언이 전면에 나서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성소수자들의 인권과 정치세력화를 지지하지만’이라는 단서를 꼭 붙였지만 말이다. 정치적 급박함과 전략의 이름으로. 그러나 전략이지 않은 정치가 있을 수 있는가? 급박하지 않은 정치적 순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이들은 이번이 ‘예외적’ 상황이라고 말을 하지만 정치는 언제나 ‘예외’에 기초해 있는 시공간이라는 것을 보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방식대로라면 그들의 ‘도덕적’ 연대는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정치화될 수 없고 그 정치화를 방해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 좌파에서는 연대에 관한한 대역설이 벌어진다.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진보운동이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늘 사회적 약자가 진보운동에 연대해야 하는 현상 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정규직 노동자들의 발걸음은 시큰둥하여도 총파업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즉각 연대해야 한다. ‘같은’ 노동자이니까.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성소수자와 다른 소수자들은 즉각 연대하고 발 벗고 나서야한다. 왜냐하면 진보정당은 ‘연대’의 가치를 중심에 들고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권을 포괄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진보정당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소수자들은 전략적으로 너무 나서지 말고 뒤로 한걸음 물러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한국 좌파의 연대에서는 소수자가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진보와 연대해야 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연대를 의심하는 성정치

    이것이 바로 성정치가 늘 의구심의 대상으로 바라보던 연대였다. ‘연대’라는 이름은 늘 무엇인가 가리워져 비정치적으로 존재하던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드러내는 과정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늘 ‘선택과 집중’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숨기고 유예하고 유보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성정치는 오히려 차이와 분화의 운동이었다.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에 맞서 ‘여성’이 등장하였을 때 그 ‘여성’이라는 이름은 즉각적으로 논란이 되었다. 누가 그 ‘여성’을 이야기하며, 그 ‘여성’은 어떤 여성이며, 어떤 ‘여성’이 그 ‘여성’에서는 배제되고 있는가에 대한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것은 명백하게 ‘우리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는 목소리의 실체를 드러내며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력에 대항하는 일이었다. 백인 중산층 여성의 ‘여성’이라는 목소리에 대항하여 흑인 여성들이, 빈민 여성들이 ‘우리는 그 여성이 아니오’라고 외치면서 자기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드러내고 세력화하였다.

    성소수자운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처음 이성애중심주의에 의해 ‘동성애자’들이 정치적으로 등장하였을 때 그 ‘동성애자’라는 이름의 내부와 외부에서 즉각적으로 그때의 ‘동성애자’라는 범주에 대한 의구심과 항의가 제기되었다.

    여성과 마찬가지로 그 ‘동성애자’가 누구이며 ‘동성애자’라는 말로 가려져 버리는 사람들은 누구냐는 질문이었다. 애초에 동성애자라는 말은 남성동성애자인 게이들만을 가리키며 레즈비언은 그 이름 안에서 부차적인 위치만을 부여하였다.

    또한 그 이름으로 포괄되지 않는 범주들을 부당하게 잔여범주로 포함하였다. 하리수와 같은 성전환자는 동성애자인가? 그는 성전환한 이성애자이다.

    이처럼 ‘동성애자’라는 이름은 게이를 중심으로 하여 레즈비언를 주변부에 위치시키며 양성애자와 성전환자, 미확정인 상태의 사람, 무성애자 등등 그 이름으로 절대 포괄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다 잔여범주로 포괄하는 부당한 이름이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동성애자’라는 이름 안에서 정치적으로 은폐되던 존재들이, 동성애자라는 ‘이름’이 드러내지 못하는 스스로의 차이를 드러내며 정치적으로 가시화하는 과정, 그것이 ‘차이’에 기반한 성정치 운동이었다.

    그러나 내/외부의 차이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차이’에 기반한 성정치가 애초에 질문하려고 하던 권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지나쳐서 아예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역설에 봉착하게 되었다. 애초의 기획은 이름의 권력에 대한 저항을 통해 이름이 가리는 주체들을 정치적으로 가시화하는 것이 성정치였다.

    동성애자라는 게이의 권력에 가린 레즈비언, 게이와 레즈비언의 동성애자라는 이름에 가린 성정환자와 무성애자 등등. 이래서 게이와 레즈비언으로 시작한 성소수자의 이름이 LGBT로 확장되고 다시 그것이 LGBTI로, 이제는 LGBTQIA로 점점 더 분화되며 확장되는 것이 성정치의 기획이었다.

    그러나 성정치 안에서 벌어진 역설은 그것이 여성이건, 동성애자건, 성소수자건, 이반이건 이 모든 이름이 불가능해지자 정치가 불가능해져버렸다는 것이다. 좌파가 연대를 강조하면서 빠진 역설의 딱 정반대편의 역설에 차이에 기반한 성정치가 봉착한 셈이다.

    ‘차이에 기반한 연대의 정치’, ‘연대에 기반한 차이의 정치’를 구성하는 것은 ‘가능한’ 프로젝트일까? 동질성의 원리에 의해서 사회적 약자가 ‘손해를 감수하며’ 연대를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서 또한 차이에 의해 정치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에 이르지 않는 연대를 구성해내는 것이야말로 지금 한국의 진보운동진영이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하는 과제이다. 이것이 바로 성정치와 진보운동이 만나는(만나야하는) 지점이다.

       
    ▲ 작년 대선 당시 ‘가족행복’을 내건 정동영 후보가 자신의 부인과 포옹하는 모습. 한국에서 ‘가족’은 중산층 뿐 아니라 급진적 사회운동에서조차 실질적인 행위 동기로 자리잡고 있다.
     

    가족주의에 갇힌 사회적 연대

    성정치와 진보정치가 ‘차이와 연대’라는 이름으로 만나 미시와 거시를 아우르면서 구체적인 작업을 할 수 있는 작업의 공간으로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 한국 사회를 가족주의를 넘어 사회적 연대의 원리에 의해 재구성하는 프로젝트이다.

    한국의 가족주의는 극단적인 ‘동질성’의 원리에 의해서 차이를 배제하고 억압해 오는 공간이었으며, 우리 사회 자체를 구성하는 원리였다. 한국 사회에서 인간들 사이의 유대감과 ‘연대’는 사실 이 가족의 틀, 그리고 그 단순 확장에 갇혀 있었으며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족이라는 내부에 대한 극단적인 동질성의 강요, 외부에 대한 철저한 배제가 우리 사회의 사회적 연대의 원리였던 셈이다.

    사회적 연대란 말 그대로 사회가 사회 안의 구성원들의 삶과 복지를 책임져야 하며 그 구성원 모두가 연대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에서 가족이 단지 사적 공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연대의 공간이자 원리였다는 것은 통상적인 가족주의에 대한 비판을 넘어 보다 심각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제도와 체제에 대한 불신이 높은 한국의 인민들은 국가에 의한 사회보장과 복지보다는 오히려 가족단위에 의한 자기보호를 더 선호한다. 한국에서 가족은 그 자체로 생산단위였고, 자산의 관리단위였고, 돈을 굴리는 금융단위였고, 사고에 대비한 복지단위였다.

    가족이라는 틀에 갇혀 다른 사회적 연대를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해온 것이 한국의 인민들이다. 가족 그 자체가 사회적 연대의 태동을 가로막고 방해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가족의 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가족이라는 친밀성의 공간뿐 아니라, 가족으로만 존재하던 사회적 연대에서도 완전히 배제되어왔다.

    1997년의 경제 위기 이후 10년간 한국의 인민들이 꿈꿔왔던 것은 복지의 향상을 통하여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의 인민들이 요구한 경제성장은 정확히 97년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 즉 사회적 연대의 책무를 가족으로 다시 돌이킬 수 있는 물적인 토대에 대한 요구였다는 것이 한국의 비극이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연대성

    97년 이전에 대한 향수는 역설적으로 이미 친밀성의 공간이자 사회적 연대의 폐쇄적 원리였던 가족이 붕괴하였고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가족을 해체한 것은 사회적인 것의 구축을 통해 사람의 삶을 보호하려던 좌파도, 가족주의를 해체하고 새로운 친밀성의 관계를 확장하려던 성정치도 아니라 바로 신자유주의였다. 덕분에 가족만 날라간 것이 아니라 친밀성과 유대감, 그리고 연대성이 통째로 날라 갔다.

    노동의 비정규직화를 통하여 경제적 독립은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되었으며, 노동의 세계화로 공간적 안정성 역시 일시적이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초래된 노동의 유연화는 연애와 사랑, 그리고 가족이라는 한정적 시공간에서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인간 사이의 친밀성과 유대감, 즉 연대의 틀과는 도무지 맞지 않는 노동의 형식이 된 셈이다.

    자식의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부부가 졸지에 남남이 되어 살아가는 기러기 가족이며, 돈을 벌기 위해 생으로 가족과 이별하고 타국으로 ‘이주’를 간 이주노동자들의 ‘원격 가족’ 등등. 안정적 직장의 파괴는 다른 이를 존중하고 관계를 맺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자 내용인 친밀성과 유대감을 통째로 파괴하였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파괴가 아니라 혹 인간에게 어떠한 새로운 친밀성과 유대감, 연대성의 공간을 열어놓고 있는가? 우습게도 신자유주의는 연대의 새로운 원리에 대해 맑스의 주장과 거의 똑같은 주장을 한다.

    전통적 제도와 가치를 넘어서 ‘자유로운 사람들의 자유로운 연합’이 그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맑스의 이상향이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신들에 의해 열려졌다고 주장한다. 더 이상 전통이나 제도에 기대어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거나 이익을 방어하려고 하지 말라. 당신에게는 모든 것이 열려있다. 누구를 만나건, 누구와 무슨 일을 하건, 그 모든 것은 당신의 자유이다. 대신 그 자유에 대해 당신이 책임을 져야한다.

    이것을 마가릿 대처는 이렇게 표현했다. ‘사회적the social인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남자man와 여자woman만 있을 뿐이다’ 물론 그 연설의 말미에서 그녀는 ‘가족’을 거론하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더 정확하게 한다면 사회적인 것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신자유주의는 그 폐허 위에서 사람들에게 이제 너희는 자유이니 너희가 알아서 서로 연대를 형성하라며 사람들을 광야로 내쫓고 있는 셈이다.

    연대성은 인간이 안정적인 공간에서 누려야 하는 ‘권리’가 아니라 자신이 누리고 싶으면 스스로 알아서 만들어야 하는 ‘책임’이 되었다. 인권의 목록 위에 올라 있는 모든 권리들이 인권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으로 변모했다.

    대신 연대성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경쟁이다.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인간은 언제든 자신의 연대성을 포기하고 파괴하여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결정적으로 인간의 친밀성과 유대감을 장기 지속되고 안정적인 것이 아니라 경쟁‘사이’에 있는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것으로 만들었다.

    가진 자에게는 이런 삶이 유목민적 해방으로 찬양될 수 있겠지만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이런 삶은 ‘피난민’에 불과하다. 절대다수의 인류에게 남은 유일한 삶의 양식은 언제든 하염없이 떠돌아 다녀야하는 ‘피난민’인 셈이다.

    가족주의를 넘어 사회적인 것의 재구축으로

    이처럼 신자유주의는 좌파와 성정치가 ‘차이에 기반한 연대’의 원리에 의해서 가족을 넘어 새로운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와 운동의 공간을 열어놓았다.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좌파정치와 성정치의 공동의 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라는 상황에서 각자의 운동이 전개해오던 방향에서 만나게 된 지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삶에 대한 책임이 가족이나 개인에게 완전히 떠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의 구축을 통하여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좌파의 핵심적 전략이라면 ‘97년 이전 가족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연대의 원리로 구성되는 사회를 비전으로 제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성정치 역시 공-사 이분법에 기초한 가족의 해체가 신자유주의에 의한 시장화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가족주의를 넘는 젠더 혁명과 성소수자 해방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에 대해 답변을 하며 새로운 친밀성과 유대감의 형식을 제시해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여기가 바로 성정치가 진보운동과 만나는(만나야 하는) 지점인 것이다. 가족을 넘어 새로운 사회적 연대를 만들어내는 길에서 한국의 좌파운동과 성정치는 행복하게 만날 수 있을까? 이것은 전적으로 이 두 다른 언어를 넘나들며 조율하고 번역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무엇보다 이 두 언어를 넘나들 수 있는 사상적 이중언어자로 훈련되는 것이 절실하다.

    필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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