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니 블레어 ‘베끼기’는 피해야 한다"
        2008년 03월 10일 08: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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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는 가야 할 길을 찾는 것보다 가지 말아야 할 길을 하나씩 골라내는 것이 현명할 때도 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옛말이 가르치는 바도 이와 다르지 않을 듯하다. 각각의 역사적 맥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의 진보정당의 성공과 실패의 역사는 의식적으로 피해야 할 ‘위험한’ 길들을 말해주고 있다.

    솔직히 지금 우리의 현실은 찬 밥 더운 밥 가릴 계제도 아니고 이 길 저 길 따져볼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총선이 코앞으로 닥쳐왔고 이것저것 할 일이 태산인데 한가하게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저울질할 틈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문제는 이러한 급박한 상황, 뒤도 옆도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한 조건 때문에 많은 것을 놓치고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말했지만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하고, 당원의 참여를 주장했지만 당원을 소외시키고, 기층 대중운동과의 긴밀한 연대를 말했지만 총선에서 그들을 들러리로 세우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 충분히 이해한다. 현실정치라는 것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굴러가는 것이니까.

       
    ▲ 3월 6일, 진보신당 중앙당 현판식 (사진=진보신당)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사태의 급박함이라는 단기적 조건에 의해 강제된 것이지만 거센 현실의 힘에 휩쓸리고 있는 사람들을 민주주의, 당원의 참여, 기층 대중운동과의 연대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사회의 조직원리, 가치체계, 생산방식을 송두리째 바꾸지 않는 한 ‘우선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나중에 분배한다’는 말이 허구이듯이, 즉 분배의 순간이 영원히 도래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현실의 논리가 있듯이, 민주주의적 원리를 계속 유보하는 현실 정치의 논리가 진보정당을 엘리트정치와 몇몇 인기 정치인에 의지하는 ‘함량미달’의 정당을 극복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술적(technical) 분석과 비판적(critical) 분석

    미국에서 연원한 사회운동 분석이론 중 자원동원이론(resources mobilisation theory)이라는 것이 있다. 사회운동을 군집적인 비이성적 일탈행동으로 보는 전통적 입장에 반대하면서 사회운동은 행위자의 합리적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합리적 선택지에서 중요한 것들이 자원(인적 네트워크, 자금, 정부의 지원 등등)이라고 말한다. 이 이론은 기존 사회시스템(미국의 자유주의체제)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정치메커니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정치집단들이 어떻게 그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들의 이해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를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나중에 등장하는 소위 사회적 구성주의 이론(social constructionism)은 자원동원이론이 행위자의 의식이나 정체성의 구성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하면서 사회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전략으로 관심을 이동시킨다. 그런데 사회적 구성주의가 자원동원이론과 공유하고 있는 것은 주어진 정치체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두 이론적 전통은 공히 사회운동의 조직자(organiser)가 관련된 사회적 쟁점에 대해서 소위 대중을 어떻게 동원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을 뿐이다. 즉 문제의 발생원인을 공격하기보다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이해관계를 운동의 대상으로 삼고, 문제의 당사자인 대중은 조직과 동원의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마 사회운동의 ‘기술적 분석’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반면에 유럽 전통의 신사회운동(new social movements)은 기존의 노동운동, 사회주의 운동, 정당운동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급진적인 사회비판을 통한 새로운 가치구성을 목표로 삼았다. 자본주의적 착취질서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사회원리와 생산력주의에 기반한 성장에의 맹신을 비판했다.

    성장과 발전을 위한 제3세계의 수탈에 항의했고 그에 동반된 군사적 모험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그들의 목표들, 즉 평등하고 자율적이며, 생태적이며 평화적인 사회를 성취할 정치적 전략과 수단이 부재했다.

    그들이 가진 자유해방주의적(libertarian) 또는 아나키스트적(anarchist) 가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비판적(critical) 분석은 있었으나 그 비판을 서로 엮여줄 씨줄과 날줄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회운동의 두 가지 전망의 약점만을 공유할 수도

    진보신당은 당연히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이론적 입장을 종합해야 한다. 하나마나 한 말이다. 그런데 우려스러운 것은 진보신당이 현재 처한 조건이 창조적인 종합보다는 양자의 약점만을 공유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일단 진보신당은 동원할 자원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지 못하다. 인적, 물적, 이데올로기적 자원에 대한 과학적(기술적) 분석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덧붙여 진보신당이 처한 정치적 기회구조(political opportunities)에 대한 면밀한 분석도 충분치 않은 듯 보인다. 우선 총선을 치루고 보자는 식의 ‘자원의 낭비’는 총선 후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구성론이 지적한 소위 프레이밍(framing)은 또 어떤가? 프레이밍이란 사회운동의 주체가 대중에게 운동에 참여할 때 얻게 되는 이익에 대해 확신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을 따르겠다는 당원들에게조차 확신을 주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몇몇 당원들에 의해 드러난 ‘진보신당 원탁회의’에서 드러난 지도부에 대한 불신은 이러한 사태의 단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진보신당의 구호나 선언들은 많은 당원들이 바라는 것만큼 충분히 ‘비판적’이지 못하다. 평등, 생태, 평화, 연대, 그리고 풀뿌리 공동체 등 신사회운동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이는 듯보이나 그것의 비판적 분석과 의식은 공유하지 못해 보인다.

    사회주의적 가치의 재구성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토니 블레어(Tony Blair)의 신노동당(New Labour)도 이러한 가치를 소리 높이 외쳤다(물론 평화를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토니 블레어는 분명 이러한 가치들을 사회변혁적 관점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시장경제의 맹신자이고 경쟁과 효율이 최상의 원리라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구호로서의 평등, 생태, 평화, 연대, 풀뿌리 공동체는 중도 우파적 입장과도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진보신당의 혁신구호는 신노동당보다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최소한 신노동당은 스스로 가야할 방향(신자유주의적 제3의 길)을 알았고 ‘급진적’ 수사를 그것에 따라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진보신당은? 구호를 받쳐줄 방향이나 포괄적 전략이 부재하다.

    좋다. 한국의 좌파가 처한 급박한 조건이 당장에 포괄적 전략이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어렵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전략과 방향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마저도 없다면 진보신당은 이미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전략의 부재, 민주주의의 생략, 그래서 스타 정치인?

       
     
     

    이렇게 말해보자. 토니 블레어가 가지고 있지 못했던, 아니 의식적으로 부정하고 파괴했던 것은 당내 민주주의와 기층 노동당의 신좌파적 상상력이었으며, 그 부정과 파괴는 자유주의적 중도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진보신당이 ‘진보적 정당’, ‘민주적 사회주의’를 구현하는 정당으로 인정받는 길은 토니 블레어가 파괴하고 부정했던 민주주의의 끈을 잡고 있는 것이라고.

    서두에서 밝혔듯이 급박한 상황이 때로는 민주적 토론과 합의의 과정을 온전히 보장할 수 없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민주적 토론과정의 생략 그 자체가 아니라 (앞에서 말했듯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것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에 대해 인식부재에 있다.

    평등, 생태, 평화, 연대, 풀뿌리 공동체의 추상적 구호, 그것을 포괄할 수 있는 전략의 부재, 거기다가 민주적 참여와 토론의 생략!! 이보다 나쁜 조합은 있기 힘들다. 이것은 진보신당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활동가들이 가지고 있는 열정과 열망과는 별개의 문제다. 이같은 ‘불행한’ 조합은 계속적으로 의도하지 않는 부정적 효과를 나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아마 많은 동지들이 이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조건에서 진보신당은 어떻게 이번 총선을 돌파할 것인가? 처음에 밝혔듯이 이 글의 목적은 ‘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한 민주적 토론의 자원이 될 수 있는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보이는 것임을 다시 확인해야겠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토니 블레어 ‘베끼기’는 피해야 한다. 1980년대 시작된 영국 노동당의 소위 현대화(modernisation)전략의 기조는 노동조합과의 거리두기, 기층좌파의 조직적 배제, 당지도부, 특히 당수로의 권력과 정보의 집중 그리고 이미지 중심의 정치였다.

    다른 것은 덮어두고 가장 우려스러운 것만 지적하겠다. 지금의 진보신당은 앞에서 지적한 전략의 부재와 민주주의적 절차의 ‘생략’을 소수의 ‘스타 정치인’을 통해 만회하려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인정할 수 있다. 지금과 같이 불리한 조건에서 노회찬 의원과 심상정 의원의 스타성을 활용하는 건 나쁠 것이 없다. 이것도 진보신당이 가진 ‘자원’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진보신당 내 일부는 그것을 단지 활용 정도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노회찬 의원과 심상정 의원이 진보신당에 이용되기를 자처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자신들을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는 조건에 편승해서 진보신당이 아닌 노회찬과 심상정의 정치를 하려 한다는 것이다.

    우려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려라고 하기에는 물증이 너무 많다. 민주노동당 분당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진보신당의 대표단에 포함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물증이 어디 있겠는가?

    솔직히 말하면 심상정 ‘비대위’가 실패한 그 순간부터 심의원은 평당원으로 자신이 선택한 지역구로 돌아갔어야 했다. 분당 사태에서 분명한 입장도 제시하지 않았던 노회찬 의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은 당대표가 되었다.

    당내 민주주의의 확장과 다양한 사회운동과의 결합을 정말로 원한다면 노동자, 빈민, 장애인, 비정규직 등의 대표들이 당지도부를 구성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동안 헌신적으로 일했던 젊은 활동가들이 그들을 보좌하고 지원하면서 스스로의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의 선언들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이건 당연한 선택지였다. 그런 선택을 했다고 해서 진보신당이 노회찬과 심상정이라는 정치인의 스타성을 활용하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책임은 노회찬과 심상정이라는 개인에게 국한될 수 없다. 많은 당 활동가들이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으로 진보신당 건설에 헌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두 의원이 당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방관하고 있는 사실을 만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열정과 신념과는 다르게 다음과 같은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은 민주적 참여, 대중조직 중심의 당지도부 구성, 당활동가들의 성장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총선대응!! 총선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심상정’과 ‘노회찬’이 필요하며 그래서 대중운동과 민주주의보다는 두 사람의 인지도가 더 중요하다는 전혀 진보적이지 못한 낡은 정치의 패러디임으로 함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현실은 냉혹하다. 토니 블레어는 화려한 언변과 이미지로 수상이 될 수 있었다. 영국 노동당은 그만큼의 사회적 기반과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블레어가 원한 것은 사회변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신당은 그렇지 못하다. 아직은 급진적 정치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영국 노동당이 가진 사회적 기반은 가지고 있지 않다.

    당연히 가야할 길은 급진적 정치의 원리를 사회적 기반의 확대에서 찾아야하는 것이어야 한다 (블레어의 신노동당과는 반대로). 그럴 때에만 구호에 머물고 있는 급진적 정치의 내용도 채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구호’와 ‘스타 정치인’의 조합이 대세다. 결국 진보신당은 없어지고 스타 정치인 심상정, 노회찬만 남는 시나리오를 배제할 수 있을까? 두 사람에게는 해볼 만한 모험이다. 하지만 당활동가와 당원들에게는?

    진보의 혁신은 실질적 민주주의로부터!!

    어쩌면 민주주의는 내용이 없는 공허한 말일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비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내용도 채울 수 있다. 진보정당이 구현해야 하는 민주주의는 진보신당이 주장하고 있는 새로운 가치들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대다수 민중들, 동시에 맹아적이지만 그 고통에 불만을 표시하고 원초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민중들, 그러나 그 원인을 인식하고 정치적으로 행동할 만큼의 충분한 정보와 자원을 가지고 있지 못한 민중들에게 자원과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원과 정보를 제공하는 과정은 곧 당과 민중의 상호작용과정에 다름 아니다. 당은 민중의 실천적 경험과 그것으로부터 발생한 지식을 통해 ‘관료적’ 조직으로의 퇴행을 막을 수 있으며, 민중은 당이 제시하는 씨줄과 날줄, 그리고 정보와 자원을 통해 스스로의 능력(capacities)를 제고할 수 있다. 이 둘 사이의 항상적인 긴장을 통한 상호발전이 곧 우리가 원하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실현이 아니겠는가?

    진보신당이 지금처럼 대부분의 민주주의를 ‘생략’하고 여전히 민중을 계몽의 대상, 또는 이미지 정치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실질적’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형식적’ 민주주의조차 실현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민중이 아니라 평당원에 대한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현할 토론조차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우려스럽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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