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의 날은 빨간 날이었다
        2008년 03월 10일 11:1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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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여성의 날 100주년이다. 관련 기사들이 넘쳐난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성차별 실태를 전하는 내용들이다. 여성의 날에 우리가 짚어봐야 할 것이 단지 남성 / 여성의 문제일까?

    남성이 저임금 중노동에 시달릴 때 여성도 저임금 중노동에 시달리면 성차별이 사라졌다고 좋아해야 하나? 남성이 직장에서 잘릴 때 여성도 잘리면 성차별이 사라졌다고 좋아해야 하나? 남성 / 여성 구별 없이 몽땅 실업자가 되면 양성평등 사회가 된 것일까?

    단지 ‘여성’만 얘기하는 식의 여성운동은 고학력 중상층 여성들의 고상한 취미가 돼버렸다. 한국 네티즌들이 여성부를 공격하는 이유에는 남성들의 후안무치한 피해의식도 있지만, 그것 못지않게 여성운동의 이런 ‘고상함’도 단단히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 = 이화여대 잔치’라고 느낀다.

    여성의 날에 쏟아진 기사들에도 그런 현실이 반영되어 있었다. 여성의 날이 단지 여성의 권익을 향상하자는 날인 것으로만 소개됐다. 그러나 여성의 날의 유래는 그렇지 않다.

    빨간 색 여성의 날

       
    ▲ 167개 단체가 공동주최한 ‘3.8 세계 여성의 날 100년 기념 전국여성노동자대회’ (사진=민주노총)
     

    여성의 날은 무언가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날이다. 그 ‘무언가’가 정확히 어떤 사건인지는 불분명하다. 분명한 건 그것이 미국의 여성노동자 투쟁에 영감을 받아 유럽 사회주의자들이 제창하여 제정됐다는 사실이다.

    여성의 날이 100주년이라고 하면서 공식적으로 기리는 사건은 1908년 3월 8일 미국 뉴욕에서 있었다는 여성 직물노동자들의 투쟁이다. 이때 여성들은 참정권과 노조 결성의 자유를 요구하며 투쟁을 벌였다.

    독일의 혁명가 클라라 체트킨이 1910년 코펜하겐에서 열렸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여성회의에서 3월 8일을 여성의 날로 기념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후 러시아혁명을 거치면서 여성의 날이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된다.

    여성의 날의 정확한 유래는 설이 분분하다. 강력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선포한 게 아니라, 20세기 초 노동자와 좌파의 조직적 연대 속에 자연스럽게 진행된 사건이라 그런 것으로 보인다. 여성의 날은 ‘빨간 날’이었다. 노는 빨간 날이 아니라 노동자 혁명의 빨간 날.

    한국사회의 공허한 참정권

    참정권이라 함은 1인1표 원리를 뜻한다. 서구 민주주의는 처음에 자산가들만 투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1원1표였다. 가진 자들이 지배하는 1원1표를 1인1표로 바꾸자는 혁명적 요구가 여성의 날에 터져나왔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1인1표를 요구하며 국민들이 투쟁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에 그것이 실현됐다.(1987년 6월 항쟁)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실현이었을까? 한국사회가 과연 1인1표 원리의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1인1표 원리라 함은 단순한 투표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투표권의 유무보다 더 중요한 건 정치경제적 평등의 원리다.

    사람은 천차만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존엄한 존재라고 간주하고, 존엄한 존재와 존엄한 존재끼리는 절대적으로 평등한 것이니까, 그 결과로서 대등하게 1인1표를 나눠 갖는 것. 그것이 공화국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남에게 예속될 만큼 가난하거나 무지하다면 이 원리가 깨진다. 그래서 1인1표 원리에서 투표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도 예속될 만큼 가난하거나, 무지해선 안 된다는 거다. 그리고 당연히 예속되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국민 다수가 충분히 가난하고, 충분히 무지한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 교육의 양극화가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은 경제적 양극화 때문에 맞벌이에 나서고, 교육의 양극화 때문에 사교육비를 벌기 위해 또 맞벌이에 나선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남성 대비 여성임금은 51% 수준이다(OECD 2007보고서). 여성은 이 예속의 구조에서 맨 끄트머리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여성만의 문제일까? 주 40시간 이상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비율이 OECD 1위인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2005년 기준). 주 40시간 이상 일하는 남성노동자 비율 OECD 1위도 역시 대.한.민.국.이다.

    자산 불로소득이 극심한 사회에서, 5%가 땅을 사랑하고 있을 때 노동자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비정규직의 공포 속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자식을 3류대에 보내며 ‘예속의 길’을 가고 있다. 새 정부는 곧 1류고, 3류고를 분류해 ‘예속의 길’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진단평가와 학교정보공개, 선택권확대 등을 추진하고 계신다. 우리나라 만세다.

    노조 문제도 현재진행형

    대한민국 1류 기업이라는 회사에는 여전히 노조가 없다. 여성노동자의 67.7%가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 노조도 없다.

    100년 전 뉴욕의 투쟁은 직물노동자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섬유분야다. 우리에겐 청계피복노조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옛날 일일 뿐, 이젠 몽땅 비정규직으로 하향평준화 돼 다시 무보호 저임금 중노동을 하고 있다. 옛날엔 쫓겨나면 노조가 투쟁이라도 했지, 이젠 계약해지면 끝이다.

    참정권이 상징하는 것, 즉 1인1표 원리가 관철되는 사회, 그리고 노동자의 단결행동권이 보호받는 사회는 여전히 요원하다. 1인1표 원리가 실현된 교육제도가 무상평준화공교육 제도다. 새 정부는 평준화 파괴하겠다는 말을 자랑처럼 떠벌리고 있다. 경찰에겐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에 엄정히 대처하라고 엄명을 내린다.

    여성의 날에 우리가 짚어야 할 것은 여성을 포함한 노동자계급의 상황이어야 한다. 그것이 사회주의자들이 애초에 기리려 했던 여성의 날 취지에 부합한다. 참정권과 노조이슈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단지 양성평등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남녀노동자가 평등하게 예속의 길로 가고, 5% 남녀들이 사이좋게 땅사랑 행각을 벌이는 사회를 거부해야 한다. 계급투쟁이 빠진 여성의 날은 ‘앙꼬 없는 찐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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