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주파는 비판대상, 분당 원인 못돼
        2008년 03월 03일 07: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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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신당이 공식 출범함에 따라 이번 총선에서 진보를 표방하는 양당의 경쟁은 불가피하게 됐다. 총선 이후에 두 개의 진보정당이 ‘씩씩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신당 내부에서도 선도적 탈당을 ‘결행’한 쪽과 소극적 탈당을 ‘선택’한 쪽 사이에 창당을 바라보는 시각이 똑같지는 않다.

    큰 방향에 대한 동의가 그것보다 작은 것에 대한 차이를 아주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큰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함께 가지만 그 안에는, 분당 자체와 총선 대응 방침을 둘러 싼 내부 이견 등 여전히 적지 않은 차이들이 존재하며 이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최근 진보신당 ‘노선’ 등에 대한 성찰적 논의들이 제출되고 있다. 평등파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공식 출범하는 진보신당의 내실 있고 장기적인 발전과 성장을 위해 언젠가는 한번 쯤 거쳐가야 할 논점들이다.

    최근 단병호 의원이 <레디앙>과 인터뷰룰 통해 밝힌 내용이나, 오건호 민주노동정 전 정책전문위원의 글이 이런 맥락과 함께 하는 글들이다. 서영표 박사의 이번 기고문도 이와 맥을 같이 하는 글이다.

    이 글의 필자는 분당과 창당에 반대를 한 입장이었지만, 신당 창당으로 흐름이 결정된 이상, ‘반성 없는 단결’보다는 ‘성찰하는 자세’로 창당에 임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는 <레디앙>에 원고와 함께 "치열한 자기 반성과 토론 없이는 새로운 진보정당이 또 다른 위기에 부딪힐 수밖에 없으며, 이 글이 생산적 토론에 일조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해왔다. <편집자 주>

    셋째, 마지막으로 평등파가 분당의 근거로 제시한 이념의 재구성, 즉 다원주의적 진보가치의 구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평등파는 자주파가 진보이념의 혁신을 가로막았기 때문에 민주노동당 안에서는 혁신적 사회주의노선을 구현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분당은 필연적이었다는 것이다. 우선 진보 이념의 재구성을 쟁점화한 것은 평등파의 긍정적 역할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분당의 논리로까지 밀고 간 것은 선뜻 납득이가지 않는다.

    가치 재구성의 위험성

    진보의 가치를 혁신하고 재구성하려는 모든 노력들이 회피할 수 없는 위험성 두 가지를 지적해야겠다. 하나는 진보 가치의 재구성이 다양한 가치의 단순한 병렬로 그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양성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이미 선언된 중심적 가치에 따라 다양한 지향들을 부속화하는 것이다.

    진보의 가치를 재구성하려는 모든 시도는 이 두 가지 극단 사이에 어딘가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데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을 제어할 다양한 실천적, 이론적 장치들을 고안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평등파의 입장은 분명 이 두 극단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으며 실천과 토론을 통해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을 제어하려는 뚜렷한 의사를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비판적 논평이 필요할 듯하다.

    우선 출발 지점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스스로에 대한 비판보다는 ‘남의 탓’에서 시작하고 있다. 다수파인 자주파가 당의 이념과 노선을 ‘망쳤고’ 소수파인 평등파는 단지 “당이 깨질까봐 이에 공모한” 잘못밖에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는 정립된 새로운 진보적 대안이 있었는데 자주파가 그것의 실현을 방해해서 실패했다는 식이다.

    이렇게 말해보자. 스스로의 주장과 내용이 있었다면 즉 당당하게 내세울 주장이 있었다면 당이 깨지는 것을 우려해서 토론과 논쟁을 회피했을까? 평등파는 당의 존립을 위해 “이념, 노선 문제를 우회하고 봉합해온”것이 아니라 자주파를 설득하고 그들과 연대할 수 있는 진보적 대안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모든 게 자주파 탓? 솔직해지자

    물론 대부분의 분당파 측 인사들이 이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주파를 비판하는 정도로 평등파 스스로에 대해서도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점이 평등파가 가지고 있는 건강함이요 가능성이다. 그러나 평등파 측에서 나온 대부분의 글은 스스로에 대한 반성은 몇 줄에 불과하고 대부분 자주파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평등파의 한 분은 자주파가 “지금의 사태가 얼마나 엄중한지를 이해할 실력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는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했다. 전자의 경우라면 그런 실력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당을 빼앗긴 평등파 스스로가 자신의 한계를 먼저 점검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대부분은 후자의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모든 잘못, 즉 사태의 본질을 모두 자주파의 그릇된 노선 탓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솔직해 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미 자주파의 집단적 입당 시기에 예견되었던 당내 노선 투쟁에 대해 대비하지 못했던 것, ‘진보의 새로운 가치의 구성’과 ‘평화의 원칙에 따른 한반도 정책’을 말하면서도 ‘말’을 넘어선 대안적 전략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은 평등파의 한계였다.

    이러한 대안적 전략이 없었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을 자주파에게 ‘헌납’한 것이고, 한울타리 안의 ‘동지들’도 설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주파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은 아니다.

    자주파를 비판하고 자주파에게 변화를 요구하기 위해서는(자주파의 이념적 지향을 포괄할 수 있는 대안적 전략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하나는 자주파의 역사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주파 비판에 앞서 스스로의 실력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적 가치 부정 가능성

    남의 탓으로부터 출발하는 평등파의 혁신 프로젝트는 자칫 보수 언론이 부채질하는 당의 우경화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지적해야겠다. 자기 스스로의 정체성 부족을 사회주의적 가치의 재구성이 아닌 자주파 중심의 민주노동당의 반정립을 통해 채우려는 흐름이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자주파의 민족주의적 경향이나 친북노선과의 단절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을 넘어서 사회주의적 가치 전체의 부정으로 귀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진보신당 창당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의 의지와는 별개의 문제다.

    모든 행동에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있기 마련이다. 만약 이런 경향이 가시화되고 영향력이 커지면 새로운 진보정당 내의 급진적 분파가 진퇴양냔의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자주파와 평등파의 사상투쟁보다 더 근본적인, 그래서 좌파에게 더욱 치명적일 수 있는 사상투쟁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자주파와 평등파 모두의 급진성의 부정으로부터 정체성을 찾으려는 흐름은 다양한 사회운동간의 대화와 토론을 통한 공통의 의제발견과 연대의 가능성을 찾으려하기 보다는 수사적인 수준에서 생태, 여성, 평화, 인권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이런 모습을 지겹도록 보아왔다.

    세계적으로 보수적 정당의 ‘의제 도둑질’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은 신당파 내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는 못하지만 조만간 새로운 파벌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진보신당의 급진파는 위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자본주의 극복’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원칙의 고수는 중도주의적 흐름과는 반대되는 편향을 보일 수 있다. 원칙과 다원주의적 가치 중 원칙을 선택함으로써 다양한 가치들이 소통하는 것을 봉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극복이 연대 원칙 돼선 곤란

    자본주의 극복을 전제로 하고 이에 동의하는 사회운동과 연대한다는 것, 즉 자본주의 극복을 연대의 원칙으로 사전에 제시한다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 아니다. 사회운동과의 대화와 상호작용 속에서 그들의 의제가 시장자본주의 한계 내에서는 좌절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밝혀 내는 것, 하지만 사회주의적 자본주의 극복으로 모든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자본주의의 극복 또는 반자본주의의 원칙은 현실운동과 결부된 의식의 고양과정에서, 즉 실천, 토론, 합의의 과정에서 도달해야 할 결론이지 전제가 아니다. 이러한 상호이해의 과정을 통한 반자본주의적 투쟁과 대안적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헤게모니적 지도력이 아니겠는가?

    헤게모니적 지도력은 구성은 이념대결이 아니라 대화와 합의를 통한 공통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고, 이것을 통해 공통의 비판대상(자본주의)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자본주의 극복을 연대의 원칙으로 삼는 것은 자주파와의 노선 대결에서 보여준 오류를 또다시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새로 건설될 진보정당 안의 좌파는 이명박 정부와 보수적 야당들이 형성한 지배블록과 투쟁하는 동시에 민주노동당과의 차별화된 모습 또한 보여주어야 한다. 동시에 민주노동당과의 거리두기를 당노선의 우경화의 계기로 삼으려는 당내 ‘우파’와의 힘겨운 투쟁도 예정되어 있다.

    그 뿐인가? 이 모든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회운동과 연대하고 그 외연을 넓힘으로써 당의 사회적 기반을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분당과 신당창당을 ‘실용주의적주의’적으로 접근했던 신당파의 일부가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3. 분열, 갈등, 그러나 혼동을 넘어서

    평등파, 즉 신당파는 그것으로부터 자주파를 비판하고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할 포괄적 사회주의 전망을 가지고 있었는가? 대답은 아니오다. 그런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면 분당의 사태까지 가지도 않았다. 문제는 평등파가 정치력 한계에 대한 자기비판을 통해 민주노동당의 혁신으로 가지 못하고 ‘분당론’으로 ‘내몰렸다는’ 것에 있다.

    평등파도 자주파도 아닌 많은 민주노동 ‘당원’을 버린 것이고, 소위 자주파 당원(자주파 지도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들이 가지고 있는 (비록 민족주의에 묶여 있지만) 진보적 열정을 버린 것이다.

    냉정하게 질문해보자. 다원주의적 진보를 말하면서 왜 자주파는 포용하지 못하는가? 그들이 패권적이기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평등파가 힘이 약하다는 데 있었다. 자주파가 만들어 놓은 문제틀 안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넘어서지 못했던 평등파의 ‘실력’이 문제였다.

    자주파 패권주의는 이념의 후진성 때문

    자주파가 ‘패권주의적’인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이념과 노선을 그것 말고는 관철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가치들, 즉 진보, 맹목적 민족주의, 그리고 북한추종주의 혼재는 깨지기 쉬운 불편한 조합이기 때문에 민주적 토론 절차를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끝났다고 선언하거나 북한의 스탈린주의적 체제를 비판하는 것으로는 깨뜨릴 수 있는 조합은 아니다. 민족주의와 북한 추종주의를 하위 범주로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헤게모니 프로젝트를 제시하는 것, 그럼으로써 민족주의의 배타성과 공격성을 중화시키고 시대착오적인 북한추종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진보’의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에 바탕한 민주적 토론은 자주파의 한계를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러나 평등파는 자주파의 ‘패권주의’의 이면, 즉 이념적 ‘후진성’을 효과적으로 공격하지 못했다.

    평등파는 스스로의 강한 고리를 만드는데 실패했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비판하고 다수결의 원칙이 패권주의에 의해 오염된 것을 공격했지만 형식적 민주주의에만 의존하려 했다. 다수와 소수를 떠나서 대화와 타협은 상대의 원칙의 존중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원칙이 더 큰 원칙 아래 포용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지적·도덕적 지도력이다. 이것이 불가능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자주파는 다수를 점하고 있지만 그것은 지적·도덕적 지도력에 근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힘은 있으나 지적·도덕적 지도력이 없는 쪽을 지적·도덕적 지도력으로 승부하는 것은 상식이다.

    응원단을 뒤로 한 채 집단퇴장

    이러한 점에서 지금까지의 평등파는 자주파의 거울상이었을 뿐이다. 자주파가 만들어 놓은 덫에 갇혀 스스로의 언어로 말하지 못하고 자주파가 만들어 놓은 경기장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패배가 확실해지자 집단퇴장을 감행한 것이다.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관중과 응원단을 뒤로한 채.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딴지걸려는 것이 아니다. 탈당과 분당에 반대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앞으로 전진하는 수밖에는 대안이 없다. 그러나 전진을 위해 과거의 과오를 덮을 수는 없다.

    신당파가 자주파를 비판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반성없이 단결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신당창당을 앞두고 오류와 한계를 질타하고 토론하는 것을 훼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동지들, 그러나,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는 전진이 아니라 ‘생존’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자. 이명박 정부가 반민중적이기 때문에 국민의 마음은 이명박으로부터 떠날 것이라는 순진한 말은 더 이상 하지 말자. 자주파와 결별하고 민주노동당을 분열시킨 것은 전진을 위한 출발이 아니라 생존조차 위협할 수 있는 중대한 과오였음을 인정하자. 그리고 나서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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