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심은 한국판 블레어가 될 것인가?
        2008년 03월 05일 08:5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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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블레어는 근 20년 가까운 보수당 지배를 뒤엎고, 영국 노동당의 재집권을 일군 리더이다. 그러나 또한 지나가는 개도 알고 있듯이, 블레어는 좌파도 아니고, 원래 영국 노동당의 가치를 대변하는 자도 아니며, “바지로 갈아입은 대처”에 불과하다.

    그리고 블레어 정부가 한 일이라고는 대처가 구상했던 복지 파괴, 금융투자 활성화, 산업자본 포기, 군사력 증대, 대서양주의의 강화 등 영국 노동당 좌파의 그 어떤 것과도 연관성이 없는 우파적 어젠다였다.

    뿐만 아니라 블레어는 영국 노동당의 전통적 기반이던 노조주의를 파괴하고, 노동자계급과 안녕을 고하면서, 영국 노동당을 중산층 지지 정당으로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영국 노동자계급의 반응은 간단했다. 바로 투표거부였다. 고로 블레어 노동당 혹은 신노동당의 승리는 좌파의 승리가 아니라 우파의 승리였다.

    꼬라지가 형편없게 된 것은 영국 노동당 좌파였다. 일단 집권을 통해 안정된 의석을 확보하려면 블레어의 노선을 따라야 하니, 자신들이 지켜왔던 좌파적 가치는 하나둘 허물기 시작했다. 평화주의 포기하고, 노조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는데 동의하고, 이민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데 동의한다. 이를 통해 얻은 것은 중산층의 지지요, 잃은 것은 노동자계급과 이민자 출신의 사회적 약자들의 지지이다.

    영국 노동당은 이제 세련된 중산층 정당이 되었다. 영국 중산층은 대처 같은 무식한 보수주의 보다는 말 잘하고, 세련되고, 똑똑한 블레어의 신노동당에 매우 우호적이다. 가디언과 같은 매체들은 완전 블레어 선전꾼이다. 우파 잡지들도 블레어를 치켜세운다. 블레어가 그들의 ‘왕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고든 브라운이지만 말이다.

    2.

    한국에서도 새진보정당이 출범한다고 한다. 나는 활동 당원은 아니지만, ‘정치관람자’로서 민노당의 분리를 지지했다. 그리고 새로운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나는 조승수의 모든 주장을 지지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주사파를 비판한 것이나 ‘더 적색으로, 더 녹색으로’라고 제시한 구호가 올바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진보정당의 흐름으로 보았을 때, ‘더 적색으로’라는 구호는 한낱 미사여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심상정씨나 노회찬씨는 마치 자신들이 신당의 주인이나 된 듯이 신당의 어젠다를 언론을 통해 밝혀왔다. 그런데 그 내용이 가관이다.

    심상정씨는 새로운 진보정당이 ‘운동권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벗겠다고 했다. 운동권 하면, 조끼 두르고, 깃발 휘날리며 거리 투쟁을 하고, 민노당은 늘 그 거리의 중심에 자신의 깃발을 휘날렸다. 대중들에게는 교통체증 일으키고, 구호나 외치고, 선동이나 일삼는 아마추어로 비칠 수 있었을 것이다.

    국민들이 민노당을 데모정당이라고 손가락질하고 표가 깎이니, 이제 새로운 진보정당은 대중들에게 스마트하고, 대안이 있으며,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직접행동에 의한 정치는 그만두고, 언론이나 미디어에서 세련된 이미지로 다가가 표 좀 많이 받겠다는 거다. 진보적 가치를 지지하는 대중들이 새진보정당에 표를 몰아주어 진보 대표주자가 되겠다는 발상일 것이다.

    결국 노동자계급이나 여타 급진적인 사회운동과 거리를 두고, 의회 내 정당을 통한 진보의 정치세력화를 하겠다는 것은, 진보운동의 진보적 가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운동정치/직접행동에 의한 정치를 포기하고, 의회공간가 미디어를 통한 정치에 주력하겠다는 것은 사실 ‘대중을 표 찍는 기계’로 생각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그저 ‘대표들만’ 보고 선택하며, 스스로는 관람자로 전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은 대중과 함께 서서 그들과 함께 싸우면서 지지를 얻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 대중들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대변해야지 표를 통해 4년에 한번 대변되어서는 안된다. 운동정치가 진정으로 대중을 주인으로 만드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미디어가 중요하다는 것과 미디어를 중심으로 정치를 하겠다는 것은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민노당도 미디어를 중요시했지만, 근본적으로 노동운동/사회운동에 직접 참여했었다. 정치의 측면에서 보면 민노당이 어쩌면 더 진보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회운동과 거리를 두며 ‘더 적색으로’라고 외치는 것은 사실상 사기에 불과하다.

    3.

    특히 노동운동과 거리를 두겠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사실 내가 용납하든 안하든 그게 무슨상관이겠는가 마는) 새 진보정당이 민주노총당이라는 이미지를 버리겠다는 사고 속에는 민주노총이 정규직 노동운동의 이익을 대변하는 반면, 비정규직의 이익을 외면한 측면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심상정/노회찬 등이 새진보정당이 민주노총과 거리를 두려는 의도 속에는 노동운동이 한국을 보다 현대화시키는 데 방해물이 된다는, 보수적 중산층 사회, 혹은 경기만을 생각하는 다수의 보수적 자영업자들의 여론을 반영한 사고이다. 결국 대중들이 싫어하는 ‘민주노총’과 거리를 두면서 정책적으로 대중들이 좋아하는 ‘진보’를 보여줌으로써 계급 대중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 표를 더 얻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이렇게 계급이 아니라 국민을 강조함으로써 “우리는 국민여러분이 거부할만한 그런 집단이 아닙니다. 걱정 말고 표 좀 주세요”라고 구걸하는 것이다. 계급으로부터의 후퇴를 통해 ‘국민’으로 다가가는 것이 진보신당의 기본적 전략인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블레어가 그렇게도 선호했던 신노동당의 전략이었다.

    만약 진보신당이 진짜 조직 노동계급이 아니라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겠다면 더 적극적으로 노동운동에 참여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미조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알려낼 그 어떤 통로(노동조합과 같은)도 없기 때문에 더 전투적이고 더 혹독한 투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노동자들의 실천을 외면하면서 언론에서 몇 마디로 노동계급을 대변하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사기에 불과하다.

    4.

    심상정이 ‘푸른 생명의 진보’ 운운한 것은 더 가소로운 논리다. 나는 신당이 ‘더 녹색으로’라는 구호를 들었을 때 환영했다. 그러나 ‘더 녹색으로’라는 구호가 ‘푸른 생명 어쩌구 저쩌구’로 바뀌는 것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사실, 요즘 환경이야기 안하는 집단이 없다. 기업가주의적 보수반동의 극치 <중앙일보>도 툭하면 나오는 칼럼이 지구 온난화와 온실가스 관련 기사이다. 그리고 한국의 보수적 중산층/대학 출신 인텔리들이 가장 선호하는 구호가 ‘친환경’이다. 속된 말로 개나 소나 다 환경을 얘기 한다. 한국원자력발전공사도 원자력이 친환경이라고 떠든다.

    그러나 환경이니 녹색이니 하는 구호가 진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문제는 어떤 환경, 어떤 녹색인가이다. 녹색이 좌파와 연대하는 것은, 좌파의 녹색주의가 기본적으로 반성장주의, 생태주의적 가치와의 친근성 때문이다.

    성장의 논리에 매몰되지 말고, 우리들의 삶을 바꾸는 근본적 전환을 제기함으로써 환경 문제를 급진적으로 제기하는 것이다. 생태근본주의는 아닐지라도, 환경을 좌파의 어젠다와 급진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런데 심상정의 ‘푸른 생명의 진보’는 그와 같은 분석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이는 그저 ‘국민들이’ 친환경 좋아하니 끼워 넣은 것에 불과하다. 중간계급 국민들은 친환경 하면서, 값비싼 무공해 농산물 먹고, 값비싼 공기청정기 쓰며, 에너지 다소비형의 고가 고층아파트에서, 값비싼 자동차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이런 ‘국민’들이 말하는 푸른 생명이 흐르는 강이란 자신들의 ‘건강’에 좋은 환경이다. 생태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국민들이다. 이들에게 표 구걸하기 위해 생태의 가치를 팔아먹는 것은 진보에 대한 배신이자 녹색에 대한 기만이다.

    5.

    또한 심상정은 진보신당 내에서는 정파도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당이 마치 자기 개인의 명령이나 받는 조직처럼 자신의 구상을 언론에 내비쳤다. 아마 심상정이 그렇게 말한 것은, 민노당이 파탄난 이유가 당내의 정파싸움 때문으로 언론에 비춰지니 “새로운 진보정당에는 정파 같은 것은 없습니다”라고 언론에 보이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주장에 대해 과거 소위 ‘민주노동당 중심으로 단결’을 외쳤던 사람들은 환영할 것이다. 당원들이 당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지 자신들이 속한 정파중심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선량한 마음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누차 주장했지만 이런 선량한 논리는 사실 정치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당 강령을 해석하는 것은 단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며, 당내 의견그룹은 당연히 존재해야 한다.

    홍세화씨는 당내 토론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토론을 통해 인식이 발전하는 것이다. 홍세화씨 말대로 되기 위해서라도 당내 상이한 입장과 상이한 그룹이 존재해야 한다. 다 똑 같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면 토론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상이한 정치적 입장이 있으니까 토론이 가능하고, 토론을 통해 서로 성찰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심상정의 주장은 아무리 현실을 감안한다 해도 용납할 수 없다. 심상정씨가 의도하는 것은, 정파가 없음으로써 당내 분란이 없고, 그렇게 통일된 조직으로 언론에 비쳐짐으로써 과거 운동권의 못된 풍습이 없어졌음을 언론에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내의 정파를 없애겠다는 것은 당의 노선을 당 지도부/다수파의 입장만 인정하겠다는 또 다른 패권주의적 발상에 다름 아니다. 민노당이 문제였던 것은 다수파의 패권주의였다. 이들은 모든 것을 표로 해결했다. 그런데 신당은 아예 상이한 정파를 불허함으로써 일사분란함을 보이고자 한다. 이는 사실 쪽수의 폭력보다도 더 퇴행한 무원칙의 소산에 불과하다.

    결국 상이한 정파가 없는 상태에서 당의 정치노선은 누가 대변하는가? 그것은 당 대표나 같은 간판스타들이 대변하거나, 당내 연구소와 같은 전문가 그룹이 제시하는 세련된 정책 어젠다가 대변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은 대표와 당의 테크노크라트들이 노선을 대변하고, 대중들은 그렇게 표현된 어젠다에 대해 그저 논평을 내거나 학습이나 하면서, 이해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당내 대중들 스스로 전략을 구성하고 제기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이런 그룹들이 만들어지면 당은 당 중심성을 해친다고 떠들어댈 것이고, 당내 정파주의의 폐혜를 끄집어 내며 당내 의견그룹을 해체하려 할 것이다.

    당 중심파들은 당의 대표와 다수파로 똘똘 뭉쳐 정파주의자들에 대한 반대블럭을 형성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민노당이 보였던 쪽수의 폭력보다 더 큰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그것이 쪽수의 폭력인지도 모르고 넘어갈지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진보주의 내에서 척결해야할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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