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의 탐욕도 줄여야 한다”
        2008년 02월 19일 06:2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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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진보운동의 기치로써 내세우고 있는 것이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이다. 이렇게 좋은 것은 다 갖다가 놓은 듯한 구호가 현실성이 있는가 하는 부분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현재 적색운동 다시 말해서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노동자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환경운동으로 대변되는 녹색운동이 노동자의 이익과 부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사항이다.

    현실적인 것만 두고 본다면 노동자의 이익이라는 것은 당장 인간의 다양한 산업발전이 전제가 되어야만 병행하여 증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저런 공장을 세우고 수많은 물건을 만들고 그것을 소비시키고 그것을 충당하는 과정이 있어야만 노동자의 이익을 증가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공장을 세우고 끊임없이 생산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개발을 해야 하고 자연으로부터 연료를 공급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환경을 보호하자고 녹색을 이야기하는 것은 개발과 생산을 억제하자는 것이고 적색의 이익의 증대를 차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생각해서는 적색과 녹색의 동거는 가능한 타협점을 찾지 못한다. 이 부분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인식의 수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본론』 등의 영향으로 현재 사회에서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기업의 활동으로 이윤이 발생했을 때 자본가는 자본의 기여도를 높이 생각하지만 노동자는 그 이윤의 근원이 노동으로부터 발생한다고 이야기 한다.

    노동자의 이익은 산업발전의 산물인가?

    맑스의 『자본론』이 기여한 부분은 기존의 자본가들의 일방적인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노동의 가치를 밝혀낸 부분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자본과 노동이 하나로 뭉뚱그려져 있는 인간의 시각에 한정되어져서 생각할 때에만 유효한 이야기다. 『자본론』이 인간들이 만들어낸 생산품이라는 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온전히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인간이 어떠한 생산품을 만들어 냈는데 그것이 발생시키는 이윤이 누구로부터 나왔냐고 따지는 것이다. 자본가는 자본이 기여한 측면이 강하고 노동자는 노동이 기여한 측면이 강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본적인 전제로 삼고서 시작하는 부분에 대하여 다시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생산품이 오로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냐는 것이다.

    조악한 비유를 하자면 은행털이범 집단이 은행을 털었다. 물주가 은행의 내부정보와 은행을 침입할 수 있는 다양한 장비를 준비하고 일꾼을 모아서 은행을 털었다. 엄청난 양의 이익이 생겼고 이 이익금을 어떻게 나눌 것이냐에 대하여 물주는 내부정보를 입수하는 것과 장비를 마련하는 것이 더 큰 기여를 했다고 하고 일꾼은 실질적으로 탈취행위를 한 것이 중요한 부분이라고 서로 다툼을 한다.

    여기에서 발생한 수많은 이익은 누구의 기여도가 큰 것인가? 그 이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 이윤은 물주나 일꾼에게서 창출된 것이 아니다. 은행에 돈을 맞겨놓은 사람들에게서 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은행은 자연이고 물주는 자본가이며 일꾼은 노동자이다. 현재 인간들은 인간이 생산한 모든 것과 그 생산의 급격한 증가에 대하여 인간 기술의 발전이며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각종 에너지와 자원은 자연을 정복한 결과라고 당연히 여기고 있다.

    자연에서 존재하는 무수한 자원은 주인이 없는 것이고 가져다 쓰는 사람이 임자라는 식이다. 이것은 자본가는 자본이 이윤을 창출했다고 말하는 것이고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개척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인간의 노동시장 내에서 노동자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다고 비난을 한다. 그리고 이윤을 정당하게 배분하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 이윤은 100% 자본가나 노동자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자연으로부터 착취해 온 것이다.

    정당한 분배? 자연으로부터의 착취!

    자연으로부터 착취해 온 것에 대하여 인간 내부에서 분배문제로 다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착취를 비난하지만 좀 더 생각할 부분은 노동자도 인간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써 자연을 착취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정말로 이윤이 어디서 오는지는 곰곰히 생각해봐야 한다. 주변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다양한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 컴퓨터생산, 자동차생산, 컴퓨터프로그래밍, 의류제조, 대형마트의 판매노동자들, 음식점, 운전기사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렇게 많은 일들에 대하여 잘 살펴보자. 이러한 일들이 ‘진정한 생산’을 하는 일들인가? 다양한 가치로 해석을 하자면 생산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부분의 업종은 거의가 소비를 하는 업종이지 생산을 하는 업종이 아니다.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 생산업이지 어떻게 소비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동차는 무엇을 생산하는 기계는 아니다. 자동차는 만드는 과정에서 철을 소비했고 기능적으로는 사람을 이동시키지만 그것은 석유에너지를 소비시키기 위한 기계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석유라는 에너지가 없으면 무용지물인 고철덩어리일 뿐이다. 그러면 석유를 인간이 만들었나? 말이 좋아서 유전을 개발했다고 하지만 자연에서 착취해온 것 뿐이다.

    또 컴퓨터나 컴퓨터프로그래밍을 생산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전기에너지를 소모시키는 기계를 만든 것이고 전기에너지를 소비시킬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지 그것이 어떠한 것을 생산하는 일은 아니다.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일자리는 몇몇 1차 산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생산되어진 것을 ‘유통하고 소비’시키는 일들이지 그것이 무엇인가 생산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 인간이 진정으로 생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농업은 어떨까? 농부는 땀흘려 씨를 뿌리고 가꾸고 가을에 곡식을 거둔다. 그럼 가을에 거둔 곡식은 농부가 온전히 만든 생산물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농부는 단지 씨를 뿌리고 그 씨가 자랄 수 있도록 가꾸고 그 열매를 거두었을 뿐이지 그 열매를 직접 만든 것은 아니다. 오래된 농부는 그 곡식을 스스로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으며 가을에 곡식을 거둔 후에 그 곡식을 거둘 수 있도록 도와준 태양과 바람과 비에 감사의 제의를 드리는 것이다.

    그럼 어부는 어떨까? 배를 몰고 나가서 고기를 많이 잡아왔다면 그 물고기는 온전히 어부가 만들어낸 생산품인가? 물고기 또한 어부가 만든 것이 아니다. 단지 어부는 바다에서 건져왔을 뿐인 것이다. 그러기에 만선을 기원하고 잡아온 물고기에 대해서는 바다에 감사의 제의를 갖추는 것이다.

    인간의 생산은 자연의 결실

    이렇듯 생산적인 일들이라 할 수 있는 직업들도 대부분 자연이 만든 것들을 거두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 결실을 거두어다가 인간이 소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흔히들 인간의 역사는 발전을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자화자찬하는 이야기고 실제로는 인간의 발전은 곧 자연수탈의 역사이고 파괴한 역사이다. 우리는 흔히 제국주의가 다른 나라에 침략하여 식민지를 착취하는 것을 비난하고 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을 비난한다.

    하지만 인구수가 증가하면서 그것에 비례해서 자연을 착취하고 수많은 종류의 생물을 지구상에서 멸종시킨 것에는 눈을 감는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석유 등의 자원을 과다하게 끌어씀으로써 환경이 파괴되고 지구온난화 등이 발생하고 수많은 생명이 지금도 사라지고 있음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자연을 파괴시키는 존재가 인간이고 그 속에 노동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진보운동이 지향해야 하는 가치는 공존이어야 한다. 그래서 진보운동을 상징하는 색으로 무지개를 말한다. 이 무지개빛이 의미하는 것을 되새겨야 한다. 진보운동은 노동자만이 승리하는 세상을 지향해서는 안 된다.

    또 인간이 승리하겠다는 세상을 지향해서도 안 된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겠다는 것을 지향해서도 안 된다. 빨강, 주홍, 노랑, 초록, 파랑, 보라의 각각의 존재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인정하며 같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노동을 표시하는 적색만이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적기(赤旗)일 뿐이다. 노동의 가치는 소중하다. 지금과 같이 자본이 과다하게 이윤을 독차지하는 구조는 변혁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본의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도 그른 것이다.

    노동자도 자본가도 결국은 인간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은 노동만을 강조한다. 자본가는 결코 자본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은 상대방을 이김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제 가치를 인정받고 공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이루고자 했을 때 가능하다. 그것을 위해 자본과 노동이 공존할 수 있는 지점을 찾는 것이 진보가 지향해야 할 바이다.

    우리는 자본가들이 지나치게 풍요롭게 사는 것은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풍요롭게 사는 것은 자연을 착취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자본가에게 노동착취를 중단하라고 주장하듯이 스스로에게도 자연에 대한 착취를 중단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노동착취를 중단하라고 하는 것은 인간사회에서 노동과 자본이 공존할 때에만 자본가와 노동자의 안정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해방보다도 더 심각한 부분이 환경파괴이다. 노동착취가 있다고 하더라도 노동자들이 죽음의 상태로 까지 몰리는 경우는 드물다.

    풍요와 자연 착취

    하지만 인간의 자연착취와 그로 인한 환경의 파괴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그것에서 인간 또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은 당장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전지구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지구가 온난화 되면서 다양한 예전에는 발생하지 않던 환경재난들이 갈수록 자주 발생하고 있다. 북극의 빙하가 상당히 많이 녹았고 에베레스트의 만년설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것이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는다면 엘고어의 ‘불편한 진실’을 권해본다.

    이것은 지금 임금을 얼마 더 받아서 조금 더 생활을 윤택하게 하겠다는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다. 지금처럼 석유에너지를 과다하게 사용하면 앞으로 4~50년 후면 고갈되어질 것이라고 한다. 석유에너지가 고갈되고 나면 지금과 같은 인간의 생활은 불가능해진다. 자동차는 고철이되고 전기가 공급되지 않으면 고층아파트는 죽음의 콘크리트가 되어버린다.

    그러면 이후에는 어떤 에너지를 사용할 것인가? 새로운 에너지를 개발하면 되지 않냐? 인간의 기술은 발달하니까 그런 것은 가능하다라고 낙관적 전망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체에너지 개발은 별개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지나친 에너지의 사용으로 인해서 환경이 파괴되고 환경재난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인간의 생존을 담보할 수는 없다.

    인간은 지금의 지구환경에 적응하여 진화한 생명체이다. 이러한 적응과정은 수천 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으로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면 적응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상황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환경운동자들이 환경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진보운동이 지향해야 하는 것은 다양한 가치의 공존이어야 한다. 공존을 추구해야 만이 같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살리고 환경을 보호하자는 것이 결코 먹고 살만하니까 그런 운동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자연이 죽으면 그 속에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을 포함해서 인간 또한 죽음으로 내몰리기 때문에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적색운동에서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탐욕을 줄이라고 이야기하듯이 녹색운동에서 노동자를 포함한 인간에게 스스로 탐욕을 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귀기울여야 한다.

    새로운 진보운동이 노동자만의 해방만을 생각하고 노동자만의 이익증대만을 추구한다면 적과 녹의 동행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가치가 제 가치를 인정받는 세상을 추구하고 그러한 세상만이 다양한 가치가 공존공생할 수 있는 세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적과 녹은 같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의 확장을 위해서는 지금까지 적색운동에 적극적이셨던 분들도 녹색운동이 진정 무엇을 추구하는지 고민해야 가능할 것이다.

    당장 이명박 정부는 한반도대운하를 건설하겠다고 한다. 이러한 거대한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를 눈앞의 일자리창출로 노동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한반도대운하가 경제적으로 얼마만큼의 이윤을 가져다줄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경제적인 이윤을 가져다 준다고 할지라도 그 한강과 낙동강을 삶의 근거지로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행위는 마땅히 저지되어져야 한다. 그 수많은 생명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생존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자연상태로 흐르는 물과 그 속의 수많은 생물들이 있음으로 인하여 물이 정화되고 우리가 그 물을 마시고 살 수 있음을 알아야한다. 그러한 것을 미숙한 경제적 논리로 또는 당장 눈앞의 이익만을 가지고 결정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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