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가 사랑한, 나를 징계한 당아
    2008년 02월 16일 12:3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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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은 내 안에 또 다른 나였다. 2월3일 당대회. 담담했다. 지난 2년 동안 당 때문에 너무 많이 울었기 때문일 게다. 아니 내 머리는 이미 오래 전 민주노동당을 지웠다. 12월 19일에는 민주노동당 권영길에게 ‘고별투표’를 했고 ‘마지막’ 특별당비도 냈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 무언가 남아 있었다. 진작 갈라섰어야 했는데 이미 너무 늦었다고 여기면서도 한켠에서는 ‘봉합’이라도 됐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머리와는 달리 가슴과 세포 하나하나는 당이 처한 상황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떼어내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 미련과 집착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2.3 당대회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고, 눈꼽만치의 갈등도 허용치 않았다.

   
▲필자 노현기(사진=매일노동뉴스)
 

영광스러웠던 그러나 버거웠던 당원번호 34번을 이제 내려놓으려 한다. 기다림의 세월까지 20년, 내 청춘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민주노동당 10년 활동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당내에서 끊임없이 싸웠고, 당으로부터 배신당했고, 쫓겨났다. 그러나 열정적으로 활동했고, 책임져야 할 때 책임졌다. 따라서 부끄러움도, 후회도, 여한도 없다.

반복되는 ‘입당사고’ 

이번 2.3 당대회를 앞두고 봉합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인천연합(그러니까 언론에서 온건 ‘자주파’라고 부른다)이 제일 처음 입당한 곳이 내가 속했던 부평을 지구당이었다.

전국 최초로 2001년 지구당 위원장 경선을 했다. 당시 인천연합이 ‘연합’ 집행부 구성을 제안했지만 거부했고, 내가 밀었던 위원장 후보가 불과 몇 표 차이로 경선에서 패배했다. 인천연합은 자신들이 후보를 내지 못해 다른 정파를 밀어서 당선시켰다. 난 부위원장이 돼 사실상 지구당 내에서 정파간에 협상창구 역할을 했다.

지구당 창당 1년 뒤, 그러니까 2002년 대선시기에 일괄 제출된 84명의 입당원서 상당수가 주소 허위기재 의혹이 제기됐다. 때맞춰 운영위 다수파는 신입당원 84명의 ‘소중한 당권’을 위해 이들이 입당한 지 정확히 석 달되는 날 지구당 위원장 선거를 하자고 주장해, 회의장을 박차고 나오기도 했다. 이같은 주장은 지구당 규약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 싸움에서 지구당은 인천연합과 비인천연합으로 갈렸고, 중앙당이 함께 참여하는 진상조사단 구성과 지구당 규약에 맞춘 위원장 선거를 하기로 합의했고, 위원장 선거에서 이겼다.

그러나 신임 위원장이 선출된 지 보름 만에 250여 명의 입당원서가 중앙당으로 접수됐다. 당연히 거쳐야 할 지구당에서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중앙당에서는 입당원서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보냈냐고 항의했다. 당비납부 계좌가 다른 사람 통장인 것이 태반이고, 입당원서를 쓴 적이 없는 사람, 심지어 민주노동당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일은 위원장 임기 1년을 마치는 날까지 계속됐다. 하지만 모두 다 덮었다. 마음이 좋아 덮은 게 아니라 매 번 같은 사고가 반복되는 것에 당원들의 실망이 우려됐고, 스스로 낯 부끄러워 덮었다.

‘암기식 진보’에 절망하다

바뀐 정당법에 따라 부평 지역위로 개편된 지 6개월 뒤에 내 가치관을 완전히 바꿔 놓은, 사회주의자에서 생태주의자로 전향하게 만든 사건이 터졌다. ‘황우석 신드롬 이면의 파시즘’을 비판한 글로 졸지에 포탈사이트 검색순위 1위가 됐다.

느려터진 당의 의사결정 관행과는 달리 너무나도 신속하게 해명서라는 이름의 사과문을 쓰라는 당지도부의 명령(?)을 받았다. 나는 해명서를 쓰는 대신 당직을 사퇴했다.

“국민여러분의 가슴에 상처와 절망감을 줄 수 있는 잘못된 표현”이었다며 거듭 사과하는 지역위 성명에, “황우석 연구에 변함없는 지지와 찬사를 보낸다”는 권영길 대표와 김성진 인천시당 위원장의 발표를 보며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의석 10석에도 흔들리는 민주노동당에 절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더 흐르면서 내가 당 지도부였다면 얼마나 다를 수 있었을까 자문하기 시작했다. 당의 치부가 드러날까 봐 당내 온갖 문제를 덮었던 것처럼, ‘알량한’ 득표율을 위해 광풍을 피해 가자고 주문했던 이는 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국가보안법, 노동탄압 등 전통적 진보의제에서는 판단이 분명한데 환경생태문제, 성소수자 등 21세기 새로운 진보의제에 대해서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것을 나는 ‘암기된 진보’라고 해석했다. 정파를 떠난 문제이기도 했다. 갈수록 갈래를 치는 사상적 다양성을 쫓아가지 못하는 민주노동당의 현실이었다.

그로부터 또 1년 뒤, 그러니까 2007년 지역위원회 위원장 선거에 출마했다. 황우석 사태 때 봤던 당의 흔들림이, 질 것이 뻔한 경선에 나서게 만들었다. 그 댓가로 난 ‘해당행위자’가 되어 당기위에서 자격정지 6개월을 받았다.

당시 중앙당기위에서 “내가 해당행위를 했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나를 제명하라”고 주장한 바 있다. 아마도 이때 내가 제명당했다면 민주노동당에 대한 절망감은 좀 덜 했을 것 같다.

이때부터 몸과 마음은 심한 몸살을 앓기 시작했고, 정신은 유아기로 퇴행하고 있었다. 현재 나는 7개월째 ‘내 안의 또 다른 나인 민주노동당’을 나로부터 떼어내기 위해 치료를 받고 있다.

세상은 수백, 수천 가지 색깔이 공존하는 곳

그러나 절망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민주노동당에서 얻었다. 기쁨보다 더한 희열을 맛보았고, 이 땅에서 진보정당도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확인했다.

무엇보다 세상의 색깔은 흑과 백만이 아니라 수백, 수천 가지 다양한 색깔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그 수많은 색깔들이 초록별 지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내 인생을 또 다른 세계로 안내했다. 또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절망 속에서 목숨을 대신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소중한 동지들을 얻기도 했다.

   
▲ "모두 다 뒤섞여 거무튀튀한 색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색을 유지하면서도 함께 있을 때 더 아름다운 무지개 빛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민주노동당을 통해 새로운 가치와 진정한 동지들을 얻었으니, 지난 10년은 패배와 좌절과 절망을 댓가로 엄청난 재산을 선물로 받은 셈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는 남이 된 이들에 대한 비판은 접어두려고 한다. 또 당 안에서는 무진장 미웠던 이들이지만, 다른 현장에서 연대해야 할 우군이기도 하다.

오히려 새로운 진보정당, 진짜 진보정당을 위해 노숙자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결심한 이들이야말로 민주노동당의 ‘2004년의 성공과 2007년의 패배’가 주는 교훈을 곱씹고 또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민주노동당의 성공과 실패가 준 교훈은?

학생 때, 모친께서는 수배돼 있는 막내딸에게 장문의 편지를 친구를 통해 전해주셨다. 당신이 살아온 모진 인생을 담담히 썼던 그 편지 말미에는 당시 5년 만에 해금돼 돌풍을 일으키던 야당, “신민당도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을 것”이라며 신민당에 대한 헛된 기대는 혹여라도 갖지 말라고 충고하셨다. 모친의 이 편지가 훗날 진보정당을 신념으로 삼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권영길 후보가 1.2%의 낮은 지지밖에 받지 못했어도, 민주노동당이 뭐하는 당인지 국민들이 전혀 모를 때에도, 막내딸이 하는 일을 말없이 지지해주시던 어머니께서 민주노동당이 한창 잘 나갈 때에는 두어 번이나 질책 전화를 한 일이 있다.

“너네 당은 백성들이 뭐에 힘든지를 그렇게 모르니?” 사실 어리석은 나는 아직도 팔순이 된 어머니가 하신 이 말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백성들에게 잘못된 정치는 호환(虎患)보다 무서웠다. 때문에 시아버지와 남편과 자식이 호랑이에게 먹히는 무서운 일을 당하면서도 시체에까지 세금을 물리는 포악한 정치를 피해 산속으로 도망가 살았다.

사람들이 군말없이 따르게 만드는 영도력의 비결이 뭐냐는 인민군 장교의 질문에 동막골 훈장님은 답변은 간단했다. “뭘 잘 멕이는거지 뭐.”

2002년 대선에서 권영길 신드롬을 일으킨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라는 구호도,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원내 3당으로 만든 ‘무상의료, 무상교육’도 따지고 보면 백성들을 어떻게 ‘잘 멕일까’의 문제였다.

총선 직후 치러진 당 지도부 선거 그러니까 최고위원제도로 당헌이 개정된 뒤 첫 선거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유세 정책은 사실상 폐기됐다. 재산세나 종부세 등에서 당의 정신에 맞는 판단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지방의원들이 왕왕 있었다.

전반적인 당의 행보는 정세에 따라 이슈에 따라 혹은 여론에 따라 갈지자 행보를 거듭했다. 그리고 최고위원회는 두 번 연속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책임사퇴’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지도부를 싹쓸이 했고, 각종 대의기구에서 다수파였던 세력이 아니라, 이에 맞섰던 전진, 지금은 해산한 혁신네트워크, 자율과 연대 등 PD계열의 정파들은 무엇이 문제였는지 평가해야 한다. 다른 누구가 아닌 내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백성을 위한 정치와 정파 위한 정치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백성들에게 ‘임금이 형님 같고 어버이 같은 그런 따듯한 정치’를 하고 싶은데 뜻을 펼 기회를 갖지 못해 낙담해 있는 충령대군에게 스승 이수가 질책했다. “(온갖 권세와 영광을 갖고 있는) 세자에 대한 질투가 아니라 정말 백성들을 위한 정치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라.”

사실 ‘백성들을 위한 정치’가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아니 백성들이 무엇 때문에 아파하는지 고민한 적이 별로 없다. 대부분의 시간을 당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안을 찾는 데 몰두했다. 다수파에 대해 질투심보다 더한 적개심 때문에 애초에 진보정당을 세웠던 목표인 ‘백성을 위한 정치’는 망각하고 살았다.

그 숱한 당내 논란에서 정책이나 사업이 화두였던 것은 몇 번이나 될까라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대부분 당권과 직접, 간접으로 연관돼 있는 것이었다. 결과는 정파의 이해관계에 의해 패가 갈렸고, 그때마다 다수결로 결정됐거나 ‘동상이몽’을 꿈꾸는 정파들에 의해 ‘봉합’됐다. 거기에 당원들은 구경꾼조차 되지 못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셋팅 선거의 출발이었던 첫 최고위원 선거에서 1인6표, 당3역까지 1인9표를 행사하는 결정은 어떻게 가능했던가? 이 ‘올 오어 낫씽’ 게임이 성립된 것은 ‘상대에게는 한 자리도 줄 수 없다’는 논리였고, 여기에는 후에 전진으로 모인 당내 좌파나 민주노총 중앙파가 다르지 않았다.

장애인, 성소수자, 직능 등 사회적 소수자, 전문영역에 대한 할당 확대 요구는 중앙파와 국민파가 합심한 민주노총의 반대 때문에 번번이 유보됐다. ‘우리에게 동정이 아니라 당당한 우리의 몫을 달라’고 했던 장애인 당원들의 절규는 실력행사까지 가서야 이룰 수 있었다.

소위 ‘종북’논란의 핵심 중 하나인 북핵문제 논란을 보자. ‘건수 있을 때’, 즉 당내 다수파를 비판할 때만 반핵과 평화를 들먹이고, 일상적으로 탈핵과 평화는 실종됐다. 아무리 광풍이 불어도 ‘황우석 연구는 잘못됐다’고 끈질기게 비판했던 정책위원들의 노력에 평등파 계열 최대 정파인 ‘전진’도 우군이 되질 못했다. 당내에서는 오직 침묵과 견제만이 존재했다.

당권이 결부된 논쟁은 격렬한데, 지금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놓고는 조용했다. 감사보고를 놓고는 밤새도록 날카롭게 설전을 벌이면서도 예산편성은 늘 하급기관으로 위임했다. 평가는 긴데 정작 사업계획 심의는 언제 했는지도 모르게 후딱 통과됐다.

그 근원에는 NL과 PD라는 20년 전의 논리와 발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정파구도가 있었다.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언론에서 표현한 소위 ‘자주파’와 ‘평등파’ 규정은 당내 문제를 정확히 짚을 수 없다. 개인 생각이 종북이건, 친북이건, 그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사상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문제는 특정 사상적 경향을 가진 이들이 세력화되어 “나(우리조직) 이외에는 안 된다”는 패권주의로 당을 운영할 때 문제는 ‘개인의’ 사상의 자유가 아니라 조직 전체에 폐단을 가져온다. 친북사상이 문제가 아니라 이들이 세력으로 조직된 인천연합, 경기동부연합, 울산연합 등의 문제이다.

또한 이들에게 맞섰던 ‘전진’류의 평등파 계열의 정파 역시 역패권으로 민주노동당을 이 지경으로 만든 책임이 결코 적지 않다.

20년째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

세상은 힘없는 백성의 다른 이름이라고 했다. 역설적이게도 힘없는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우리는 세상을 몰랐다. 정파라는 색안경에 눈이 가려져 명징하게 세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2008. 2.3 당대회로 상징되는 민주노동당의 몰락을 보며 두 개의 장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는 분단 현실이 한 집단의 정상적인 사고를 심각하게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20년 전 운동권 구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두 장벽 모두 반드시 걷어내야 할 현실의 문제이다.

현재의 정파는 민주노동당을 세웠고 단시일 내 제3당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는지 모르지만, 동시에 3당이 된 지 4년 만에 몰락하게 만들었다. 또한 운동사에 20년 전 사구체논쟁까지 동원해야 겨우 설명될 관념적인 이념으로는 21세기 역동적인 사회를 대변하기는커녕 뒤쫓아 가기에도 버겁다. 이런 정파로는 당내 권력투쟁 때에만 힘이 모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탈핵과 평화를 자기 임무로 하는 정파가 없는 현실에서 반핵과 평화는 남을 공격할 때만 등장할 수밖에 없다. 녹색가치 실현을 제1의 임무로 뛰는 세력이 없는데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를 목 터지게 외친들 녹색은 선거 때 두 줄짜리 공약을 위해서만 필요할 뿐이다.

잘해야 두 색이 뒤섞여 적색도 녹색도 아닌 자주색이 될 뿐이다. 진정한 여성주의자들이 당내 세력으로 형성돼 있지 않을 때, 여성 할당은 정파들의 권력다툼에 이용될 뿐임을 민주노동당에서 경험했다.

여행을 하다가 큰 강을 만났다. 배도 없고, 다리도 없는 강물 앞에서 주변의 나무와 갈대를 모아 뗏목을 만들어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런데 강을 건넌 뒤 강을 안전하게 건너게 해준 고마운 뗏목을 버릴 수 없었다.

그들은 고마운 뗏목을 머리에 이고 여행을 떠난다. 황광우 씨의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의 한 토막이다. 우리 모두는 강을 건넌 뒤에도 뗏목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사람들은 아닌지? 그것도 20년 동안이나!

이제 20년 동안 무겁게 짊어지고 왔던 뗏목을 버릴 때가 됐다. 민주노동당에서는 맞상대 때문에 서로 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서로 이혼을 선택한 마당에 과감히 버리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진보의 재구성은 정파 재구성부터

진보의 재구성은 NL 대 PD라는 낡은 사상에 기초한 정파를 파괴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것은 생태주의자, 평화주의자, 여성주의자,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등 21세기 새로운 진보의제에 기반한 정파여야 한다.

일단 지향과 임무가 분명하다. 당권이 아니라도 각 정파별로 할 일이 널려 있다. 또 정파에 속한 개별 구성원들은 정파활동을 하면 할수록 자기가 지향하는 바의 철학과 전문성을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구성된 정파는 당권을 위해서 합종연횡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따로, 또 같이’ 하면서 더욱 아름다운, 무재개 연대가 가능하다. 모두 다 뒤섞여 거무튀튀한 색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색을 유지하면서도 함께 있을 때 더 아름다운 무지개 빛을 만드는 것, 그것이 지금 시기 필요한 정파이며, 진보의 재구성은 이런 정파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진보는 명찰만 단다고 진보가 아니다. 소통, 반성 그리고 변화와 혁신이 없으면 그것은 진보가 아니라 수구이다. 그런 점에서 2.3 당대회는 소통과 변화와 혁신을 거부함으로써 민주노동당이 ‘자살’을 선택한 대회였다.

오늘 민주노동당의 자살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난파선에서 뛰어내리면서 던지는 비판의 화살은 머지않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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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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