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회찬은 자주파 '작은 수령들'과 달라
        2008년 02월 13일 10: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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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종의 의무감이라 할까요? 저와 다소 성향이 다르지만 일단 ‘민중 언론’이라 생각하여 <민중의 소리>를 꼬박 꼬박 잘 읽습니다. 그러다가 가끔 정말 이해 안되는 기사들을 보면서 도대체 그러한 기사를 무슨 심보로 쓴 것인지 궁금해지기만 합니다.

    무슨 심보로 그런 기사를 쓴 것인지

    예컨대, 노회찬 의원의 민주노동당 탈당 시사 발언을 갖다가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왔습니다: "노회찬의 탈당 선언은 배신이며 해당 행위"라는 무지막지한 제목, 그리고 ‘배신, 해당 행위, 신진보에의 투항, 사리사욕, 출세욕, 분열 책동…’

    글쎄, 그러한 무시무시한 단어들의 나열을 보면 꼭 소련 시대의 <프라우다> 신문이 모스크바의 입맛에 맞지 않은 행동을 벌인 외국 진보 인사를 준엄한 언사로 꾸짖는 그 광경을 연상케 합니다. 스탈린주의적 어법이라는 것은 참 편하기도 해요.

    흑과 백 이외에 다른 어떤 색깔도 없는 것이고, 또 ‘우리’와 다른 길로 가는 이를 무조건, 거리낌없이 공격해도 되고요… ‘우리’와 다르면 인격까지도 나쁜 사람임에 틀림없으니까 인신공격을 퍼부어도 문제도 없고요…

    바로 이와 같은, 오만방자한 구시대의 ‘진보’가 지난 대선에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투표권 행사도 못하는 해외 동포의 신세지만, 저만 해도 "분열 세력의 준동을 막고 당의 통합, 단결을 높여 대중과의 사업에 매진하자"는 식의, 꼭 <로동신문>과 비슷한 듯한 어법을 쓰는 사람에게 투표하기 전에 두 번 생각할 것입니다…

    <로동신문>과 비슷한 어법

    ‘배신’이라는, 이미 준엄한 도덕적 판단이 내재돼 있는 단어를 쓰는 대신에 "다른 길로 갔다"는, 조금 더 가치 중립적인 어법을 쓰면 <민중의 소리> 품격이 조금 올라가지 않을까요?

    다른 분들이 어떠시는지 모르지만, 저 같으면 ‘배신’을 남발하는 언론을 아예 근본적으로 신뢰하기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리고 노회찬 의원이나 심상정 의원 등이 "다른 길"로 갔으면 그럴 만한 근본적인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볼 수 없을까요?

    노회찬 의원과, 민주노동당 ‘자주’ 계열의 작은 수령님’들은 유형적으로 전혀 다른 정치인들입니다. 일시적으로 같이 갈 수 있었지만 오랫동안 같이 있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작은 수령님’들은 대개 중산계층 학생 활동가 출신으로서 특정한 이념 (‘신앙’이라고 하면 모욕이 될까요? 그 말을 쓰고 싶지만 예의상 자제합니다…) 집단에 입문하여 거기에서만 활동한 것이지요.

    예외도 있지만 그 집단의 범위를 벗어난 노동 운동 내지 지식인으로서의 생활, 사회 운동을 많이 안해온 경우들이 전형적인 듯합니다. 그러다가 두 가지 특징이 발생되지요.

    하나는, 바깥 세상과의 소통이 매우 어려워집니다. 1980년대말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연대, 연합 통일전선,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절감, 대중적 역량 총집결’ 같은 단어를 계속 반복하면서 대학생 앞에서 연설한다면 하품과 웃음으로 반응할 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한낱 ‘개그’로 보이는 것들

    둘째는, 그 누구를 봐도 다들 자신 조직의 구성원, 즉 ‘계몽과 지도’의 대상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목사일을 너무 오래 하다보면 주위 사람 모두가 다 자기의 신도로 보이듯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특정 이념 집단의 게임 룰(game rule)을 이미 받아들인 사람들이야 이렇게 잘 지도되는 ‘순한 양’의 노릇을 할지도 모르지만, 일반 사회의 정상인에게 이는 한낱의 ‘개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작은 수령님’들이 고정 신도들을 총동원하여 데모를 조직하는 능력이야 인정할 수 있지만 지금으로서 더 이상의 교세 확장을 거의 못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노회찬 의원은 이 ‘작은 수령님’ 타이프와 근본적으로 다른 유형의 정치인이지요. 노동 운동가로 출발하여 노조 활동가들과도 ‘말이 통하는’, 그리고 노동 운동에 기반을 둔 조직을 운영할 줄 아는 사람이면서도, 바깥 사회와 그 사회의 언어로 제대로 소통할 수 있는 ‘대중 정치인’이기도 합니다.

    굳이 특정 이념 그룹에 속하지 않고 진보 이념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도 그에게 예컨대 앞으로의 사립대학 등록금 인하 정책 방안을 물으면 이념과 무관한 상식적이며 상세한 대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당면 과제 중의 하나가 계급 정당의 건설이고 또 하나는 계급 정치의 대중화인데, 노회찬 의원이 양쪽 과제에 적합한 사람이지요.

    무의미한 발언 남발 이전에 ‘작은 수령님’ 문화 폐단 반성부터

    그리고 그의 의정 활동을 봐도 삼성비리 문제부터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 복무제 신설까지, 대중적으로도 인권적으로도 중요한 여러 분야를 아우른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인이 한국 노동계급 운동에 있다는 것 자체가 다행이라는 생각이 안드세요?

    19세기말 독일 사민당에 아우구스트 베벨과 프랑츠 메링과 같은 계급성/대중성을 겸비하는 정치인이 없었다면 과연 사민당이 사회 주도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노회찬 의원이 민주노동당을 지금 떠난다면 이는 노 의원의 문제라기보다는 당의 문제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그리고 ‘배신’과 같은 무의미한 단어를 남발하기 전에, <민중의 소리>는 차라리 ‘작은 수령님’ 문화의 폐단에 대해서 반성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서일 듯합니다. 과거를 떨쳐내고 미래로 가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원래 뜻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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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박노자 교수가 지난 11일 밤 자신의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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