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당의 감격과 행복을 뒤로 하고
        2008년 02월 13일 0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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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동당 당원 번호 ‘25994’는 이제 주인이 없다. 6년 전 입당하던 날, 부산 당원 동지들과 함께 했던 정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귀국한 지 두 달 남짓 지난 2002년 3월30일, 강연회를 마치고 마련된 뒤풀이 자리, 나는 입당하면서 감격했고 행복했다. 20여 년 만에 돌아온 땅, 마침내 진보정당의 당원이 된 것이다! 그것도 합법적 공간에서!

    마침내 진보정당 당원이 되다

    그 때 잠시 70년대를 되돌아보았다. 온갖 국가폭력과 억압, 구속과 일상적 고문으로 얼룩진 엄중한 시절, 나는 비합법 공간밖에 경험하지 못했다. 과연 살아 있는 동안 진보정당과 민주노조가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날을 볼 수 있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열린 공간에서 마음껏 학습하고 토론하고 조직하고 행동할 터인데…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좀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해. 그런데 기어이 오지 않을 듯한 그 날이 온 것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

    그러나 그것은 신기루였다. 민주노동당에 민중은 없었다. 오직 요란한 구호의 장식품이었을 뿐. 학습도 없었고 토론도 없었다. 오로지 배제 행위에 의한 권력 싸움만 있었을 뿐.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는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1930년대 후반 프랑코에게 쫓겨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에 망명한 스페인의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들도 세월의 흐름만큼은 이길 수 없었다. 젊고 팔팔했던 청장년들은 점차 힘없는 노인이 되었고 하나 둘씩 남의 땅에서 눈을 감았다. 동지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한 백발의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 우리 삶은 실패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그 기억만으로도 우리는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나는 그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다만 조금이나마 공감할 뿐이다. 그들은 끝까지 권력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기억할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노무현 정권 창출에 성공한 세력이 청와대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며 감격해했다. 그들에게 ‘님’은 ‘민중’이 아니라 ‘권력’이었다. 민주노동당도 마찬가지였다. 일하는 사람들의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자아팽창자들의 권력의지의 전시장이었다.

    민중이란 말이 요란한 구호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았듯이, 당은 올챙이 수령들의 권력의지를 위한 수단이며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진보정당이 아닌 것이다.

    사람은 어차피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사고한다. 20여년 만에 돌아온 땅에서 흥미롭게 확인한 게 있다. 과거에 ‘사회주의혁명’, ‘노동해방’을 말하던 사람들 중 권력지향성이 강했던 사람일수록 그 말을 아주 쉽게 했는데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과거를 스스럼없이 배반했다.

    한때나마 자신의 말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혁명’과 ‘해방’의 고민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내 삶의 궤적은 ‘사회주의혁명’, ‘노동자계급해방’을 말하는 사람에 대해 그가 그리는 ‘사회주의혁명’, ‘노동자계급해방’의 시나리오에서 그 자신은 어디에 속할까를 묻게 한다.

    모두 성공한 권력 편에 속한다는 게 진실에 가깝다. 자신이 이름 없는 노동자, 민중에 속하는 시나리오를 그리는 사람은 없다. 마치 우리가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을 때 나를 주인공과 일치시키고 엑스트라에게 일치시키지 않듯이.

    미 제국에 맞서는 북한을 칭송하는 시각은 무엇보다 자신을 북한 권력과 일치시킬 뿐 북한 인민에게 일치시키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북한에 대한 인식상의 오류는 대개 여기서 온다. 얼마나 쉬운가. 자신은 이미 북한 인민이 아니니. 반미, 자주라는 ‘태양의 진리’만 외치면 된다.

    자아팽창자들의 권력의지 전시장

    그 숱한 아사자, 탈북자의 현실에는 눈을 질끈 감는다. 자신은 권력에 속하므로. 아사자도, 탈북자도, 인권문제도 오로지 미제국 때문이라며 그런 자신을 합리화하다가 마침내 아사자, 탈북자, 인권문제를 운운하는 것 자체를 혁명의지나 신념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거나 배반자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팽창된 자아의 그들은 이미 권력에 속하지 인민에 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80년대의 이른바 NL/PD 간 치열한 싸움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현실을 잘 모르는 순진함이 남아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때문에 현상 너머 본질을 볼 수도 있다. 그 싸움을 이념의 차이에 의한 싸움으로 보는 것은 현상만 본 것이고 자아팽창자들의 ‘권력’ 게임이라는 게 본질이다.

    2004년4월 총선 성과는 그런 경향에 더욱 불을 붙였다. 서민 대중이 처한 현실은 구호로만 남아 대중정치는 밀려났고, 당권을 장악하기 위한 배제 행위가 정치행위인 양 자리 잡았다. 자주파에 의한 당 기관지 접수는 그 중 하나였다.

    평당원으로서 조선일보스러운 왜곡기사를 쓴 <진보정치>를 끊는 것으로 응수했을 뿐 아직 탈당은 생각지 않았다. 탈당한다는 한 학생당원한테서 “동원되지 마세요. 그들이 선생님을 뭐라는지 아세요? 학생을 끌기 위한 흥행사랍니다.”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받았을 때에도 그냥 흘려보냈다.

    그러나 위장전입, 당비대납, 대리투표를 거듭 확인하면서부터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순진했던(?) 나도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지역위원회의 그 알량한 권력을 빼앗기 위해 그 짓을 한 것이다. 같은 당원을 대상으로 그 행위를 기획한 자, 결의한 자, 추종한 자들이 진보정당의 당원이다? 놀랍게도 그런 패악질은 징계되지 않고 지속되었다. (똘레랑스는 아무 때나 적용하는 게 아니다. 배제 행위와 같은 앵똘레랑스에 단호하게 맞서라는 게 똘레랑스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인가

    뿐만 아니라, 회계부정을 저지른 세력이 오히려 기고만장했다. 참담한 대선 결과가 나온 뒤에도 비례대표제를 다수파 독식제로 만드는 뻔뻔함의 극치를 거리낌 없이 보여주었다. 비례대표제는 그들이 모멸해 마지않는 부르주아 국가들이 소수 의견을 배려하겠다고 만든 제도다.

    그들의 권력 ‘의지’는 부르주아 국가가 허용한 소수 의견 반영제도를 다수파 독식제로 만들게 하고, 그들의 ‘신념’은 그런 행위를 부르주아 국가제도를 부정하기 위함이라고 합리화시킨다.

    당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이며 수단이었다. 최고형태의 정치 결사체인 당, 진보정당이 도구이며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면 목적은 다른 데 있는 법, 그것이 무엇인가. 당원들의 신상 정보와 성향을 왜 취합하며 외부에 보고하나. 당이 수단이며 도구일 때 민중 또한 권력의지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패권주의라는 한 마디 말로 끝낼 일이 아니다. 당내 소수파를 배제하는 세력이 권력을 장악한다면, 그 권력이 민중을 배제하고 민중 위에 군림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자아팽창자들은 ‘코리아연방공화국’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다. 종북 편향의 권력 의지의 덫에 갇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민중이 밀려난 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2월3일 당 대회는 자아팽창자들이 대거 출연한 단막극이었다.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주는 ‘태양의 진리’는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자아팽창증 환자들은 그에 대한 미련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제 모순을 한꺼번에 해결해주는 권력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근대성조차 아직 먼 사회, 사회 곳곳에 켜켜이 쌓인 모순, 불평등, 몰상식을 한꺼번에 해결해 주는 권력, 그에 대한 꿈을 갖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리얼리스트가 되지 않을 때 그것은 엄청난 오류를 낳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성숙되지 못한 진보 의식

    ‘사회주의 혁명’, ‘노동자계급해방’의 꿈을 꾸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하여 사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또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합리성이 취약하기 그지없는 한국사회에서 그것은 사회모순의 해결이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파괴의 길로 치달을 수 있지 않은가라는 고민에서 출발하여 사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간단히 ‘개량’이나 ‘우경화’라고 말할 자유까지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운동권이 갖는 이른바 진보적 의식이란 ‘의식의 반전’ 또는 ‘탈의식’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주로 대학시절에, 또는 일터에서 선배를 ‘잘못’ 만나거나 책을 ‘잘못’ 만나 그 때까지 형성된 자신의 의식세계에 질문을 던지게 되고 그 의식을 벗어냄으로써, 다시 말해, ‘의식의 반전’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문제는 의식의 끝없는 ‘성숙’이 아니라 의식의 ‘반전’을 통해 갖게 된 진보의식이라는 데 있다.

    지배세력이 주입한 의식을 벗어냈을 뿐 새로운 의식을 현실과 끊임없이 부딪혀 검증하면서 성숙시키지 않았음에도 이미 ‘태양의 진리’를 획득한 양 좁은 식견에도 스스로 자만하고 열린 자세로 학습하지 않는다.

    동성애를 자본주의의 폐단이라고 말하는, 그 동성애자를 이성애자가 낳는다는 점조차 알지 못하는 ‘스스로 진보’가 생기는 것도 학습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심심치 않게 환경, 여성, 이주노동자 등의 문제에 대한 무지들이 불거져 나오는 것도 학습 부족 때문인데, 여기에 결합되는 심각한 문제는 ‘스스로 진보’일수록 스피노자가 강조한 이상으로 고집이 세다는 점이다.

    탈의식에 불과한데도 모두 ‘태양의 진리’를 가진 양 고집부리는 것이다.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고 대중과 유리된다. 그럴수록 자아팽창증은 더욱 심해지고 ‘사회주의혁명’과 ‘계급해방’을 더욱 쉽게 말한다. 실현 가능성을 물으면 혁명의지와 신념이 부족한 쁘띠의 ‘사민주의 개량’, ‘유럽사대주의’라는 딱지를 서슴없이 붙인다. 얼마나 쉬운 자기방어벽 구축인가.

    지금까지 살면서 그런 사람들 충분히 봤다. 그러니 이젠 이상 사회를 미리 그리는 것으로 다투기보다 오늘 여기의 고통과 불평등을 줄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게 어떨까. 노동자, 서민의 구체적 삶에 밀착하자는 것이다.

    이상 사회 그리기로 다투지 말고 지금 여기의 고통으로부터

    반미, 자주, 통일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반미, 자주, 통일도 노동자, 서민의 구체적 삶을 출발점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자는 것이다. ‘개량’이라고 불러도 좋다. 아니, ‘개량’을 하자. 무상교육, 무상의료, 부유세가 개량인가? 그렇다면 그것을 열심히 하자.

    대학평준화, 입시폐지가 개량이고, 비정규직 차별 해소도 자본주의를 강화시키기 때문에 개량인가? 그게 개량이라면 그것부터 열심히 하자.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런 ‘개량’이라도 이룰 수 있다면 죽는 순간에도 만세를 부르겠다.

    자아팽창자들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것 중에 노동자계급의식이 있다. 그러나 현실 속의 노동자계급의식은 지극히 일부 노동자를 제외하곤 찾을 수 없다. 오늘 한국사회에서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지 않는다. 일부 노동자가 갖고 있는 노동자의식도 의식적이거나 계기가 있을 때 잠시 동원되는 것일 뿐 일상성을 갖고 있지 않다.

    일부에 지나지 않는 그들조차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소시민의식이다. 삼성무노조, 세금핵폭탄론, 조중동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일해공원, 코스콤비정규직노조를 백안시하는 정규직노조, 노총의 한나라당 지지가 백주에 버젓한 땅, 민주노총이 이랜드그룹이라는 자본 하나를 제압하지 못하는 땅이다.

    이 땅에서 ‘개량’ 딱지를 쉽게 붙이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지만, 사회 모순을 한꺼번에 해결하고 싶은 조급증은 자기팽창증과 결합되어 권력집착증으로 나아간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권력 집착은 민중을 ‘학(學)’하게는 하지만 ‘습(習)’하게 하지 않는다. 민중을 외치게 하지만 민중으로 살게 하지 않는다. 사회주의혁명을 말하게 하지만 사회주의로 사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고민하도록 하지 않는다. 대중성을 말하게 하지만 대중이 처한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도록 하지 않는다.

    구호는 요란하지만 초라한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 100만 민중대회를 외치지만 10만이 안 되어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책임을 느끼지 않는 만큼 권력 집착은 강하다. 두 달 남짓 남은 국회의원 자리도 알량하지만 권력인 게 분명하다.

    용기 없는 국회의원들

    2월 3일 당대회가 다가오는 급박한 상황에 용기 있게 자신의 견해를 밝힌 국회의원은 별로 없었다. 애당초 ‘민중권력’이라는 말은 모순이다. 나는 권력의 일상이 민중적인 것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반민중적으로 치달을 위험을 항상 안고 있다.

    민주주의의 끊임없는 성숙, 그리고 견제와 비판은 어떤 경우에도 무시될 수 없다. 학습과 토론이, 민중의 구체적 삶에 밀착하여 실천하면서 끊임없이 진보하는 것이 진보정당의 존재이유다.

    아직 빨갱이여서인가, 70년대 NL출신이 민주노동당을 떠나며 말이 많았다. 그러나 기어이 다시 참여할 것이다. 죽는 그 날까지, 진보정당의 일원으로 살기 위해. 늠름한 민중으로, 평당원으로,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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