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급 소유 문제 팽개친 국가자본주의론
        2008년 02월 10일 03:35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둘 모두에서 권력은 노동자, 민중에게 있지 않았고 소수 지배자들인 국가관료나 자본가들에게 있었다. 따라서 둘 모두에서 노동자, 민중은 스스로 자신들이 사회와 생산을 통제하지 못했고 소수 관료나 자본가들이 통제권을 가졌다. 둘 모두에서 관료나 자본가 지배계급과 노동자 민중 사이에 어마어마한 불평등이 존재했다.

    둘 모두에서 노동자 민중은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 사이의 형식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둘 모두가 소수 관료나 자본가가 노동자 민중을 억압 착취하는 계급 사회라는 국가자본주의론이 설득력을 얻는다.” -전지윤의 글

       
    ▲ 푸틴의 생일을 축하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러시아 젊은이들. 이런 정치 현상도, 노멘클라투라도 옛 소련에는 없었다.
     

    국가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양자 모두 권력이 노동자 민중에게 있지 않았고, 국가 관료나 자본가에게 있었으며, 노동자 민중은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지 못했고, 불평등이 존재한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묻지만, 이 사실만 가지고 현실 국가사회주의를 아예 모종의 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게 진정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전지윤은 사회주의를 무슨 상상 속의 유토피아로 착각하는 듯하다. 전지윤에게는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계급과 소유 문제 내팽개친 다함께

    마르크스주의적 계급과 체제 규정의 가장 핵심적 요소인 소유(에 의한 계급 존재)와 시장의 유무 따위는 내팽겨친 채, 오직 노동자 민중이 생산과 사회를 직접 통제하지 못한다는 규정만으로 한 체제를 자본주의로 규정하는, 사회과학 원칙으로부터의 근본적인 이탈을 보여 주고 있다.

    이후에 본격적으로 하겠지만 일단 먼저 묻고 싶다. 일단 노동자 민중이 스스로 사회와 생산을 통제한다는 멋있는 문구가 현실적으로 어떠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먼저 묻고 싶다.

    러시아 혁명 직후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는 가장 원칙적인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대대적으로 생산자 직접 통제, 노동자 직접 생산 통제의 실험을 했었다. 화폐도 폐지하려 했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그 비현실적인 실험은 중단되었다.

    그 대신 사회주의 원칙에 반하는 자본주의 착취 방식인 테일러 시스템 도입과 경영자 단독 책임 경영제, 노동의 군사화 등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구 짜르 시대 자본가까지도 노동자 통제는커녕 경영자로 복귀시켰고, 비현실적 장교 선출제 실험의 폐지 직후에는 군대에도 구 짜르 장교가 현장 즉결 처분권까지 얻은 채 복귀하였다. 그 민주적이라던 소비에트도 일찍이 유명무실화되었고, 빈농위원회의 실험도 비참하게 끝났다.

    이 시기의 반사회주의적인 조치들에 대한 변명으로 스탈린주의자들이나 트로츠키주의자들 양자 모두 전쟁과 내전 등의 이유로 사태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는데, 전쟁과 내전 등으로 인한 불가피성이 강조되었던 것과 상반되는 사실을 보여 주는 최근의 비밀 해제된 자료들은 이 당시 노동자 직접 통제가 어떻게 현실에서 이루어졌고 실패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은 왜 노동자 민중으로부터 권력과 사회에 대한 통제를 도로 빼앗아야 했을까?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들은 전 공업의 국유화와 노동조합 국가 기관화 등의 조치 이전에 수많은 ‘현실적’ 고민을 했었다. 정반대로 시장 요소를 도입한 네프(신경제 정책)의 실시에 있어서의 고민의 근본적 의미 역시 똑같다.

    혁명의 열기 속에 현실주의적 정치가로서보다 이상적 사회주의자로서의 입장을 표명할밖에 없었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의 공식적 문서들과 포고와는 달리, 그 뒤에 숨겨져 있는 그네들의 고민을 전지윤은 읽을 수가 없을 것이다.

    생산을 늘리기 위해 왜 자본주의 착취 시스템이라고 욕하던 시스템을 도입해야 했고, 공장과 기업의 통제권을 도로 경영진들에게 주어야 했으며, 시장을 도입해야 했던 근본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 판에 박힌 틀 속에서 사고하는 전지윤은 알 턱이 없을 것이다.

    다함께의 논리대로라면 초기 소련도 타도 대상

    어구만으로 무장한 그들의 잣대를 들이 대면, 레닌 시기의 소련조차 노동자와 민중들은 사회와 생산을 통제하지 못했으니 타도되어야 할 체제에 불과하다.

    또 하나 지겹도록 다함께가 상대를 비판하는 논리가 있다. 바로 국가자본주의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란 모두 ‘국유화=사회주의’라고 믿고 있다는 터무니 없는 모함이 그것인데, 전지윤은 여기서도 똑같은 왜곡을 태연히 늘어놓고 있다.

    어느 누구도 ‘국유화가 곧 사회주의’라는 주장을 하지 않음에도, 이에 아랑곳 않고 상대를 자신들이 익숙한 비판의 틀 내에서 규정하고, 주장을 이어나가기 위해 다함께 회원들은 아주 자주 사회주의와의 차이점을 설명해 보라며 박정희의 포항제철, 한국통신 국유화의 예 등을 질기도록 써 먹는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는 박정희의 포항제철이나 한국통신 국유화와는 비교도 안 되는 근본적 차이가 있었다. 즉, 이들 국가에서는 사적 소유와 시장 부재를 원칙으로 하는 경제 체제였기 때문에 포항제철, 한국통신과 같은 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주택, 여관, 까페, 식당, 심지어 동네 구멍가게까지 모조리 다 국가가 운영했다.

    자본주의 사회 경제와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이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도 못하거나 일부러 회피한다.

    사적 소유와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자본주의와 어떻게 다른 모습을 할 수 있는지 그는 아마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소련의 한 구성원이었던 인구 6백만 정도의 아제르바이잔이라는 소국에서만도 2만 2천 개의 소기업(한국으로 치면 구멍가게 등도 포함)과 5천여 개의 중대 규모 기업이 십수 년 간에 걸쳐 국가 기업에서 개인들에게로 사유화되었다.

    하물며 전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어떠했겠는가? 상속되지도 않는 자원으로의 정치적 접근권에 의한 것이 아닌 자본의 소유 여부에 의한 새로운 계급이 생성되었고, 자본주의 고유의 생소한 직업들과 소련 때 사라졌던 각종 시장이 생겨났으며, 소련 시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자본주의 사회 특유의 사회적 현상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대전환이 가져온 어마어마한 질적인 변화를 두고 머리 속에서만의 몇 가지 기준 만으로 한 체제를 정반대로 규정하는 것은 무책임 그 자체이다.

    듣지도 보지도 않는 무책임

    박정희의 대한민국보다 훨씬 더 국가 소유 집중도가 높은 원료 수출 중심 국가들에서조차 사회주의 사회와 가장 큰 차이점이란 바로 사적 소유와 시장의 허용 여부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공기업(완전 국유 기업도 아닌)이 298개가 있다고 하지만, 이들은 각종 사적 영역 즉, 재벌 등 대기업, 중소기업, 각종 자영업들에 비하면 고용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 자본주의 국가 경제 체제 자체의 기본 동력이 아님은 물론이다.

    다함께 식으로 하면, 히틀러 치하의 나찌 독일과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 질적으로 같은 체제라는, 50년대 유행했다 붕괴한 미국의 극우주의자들의 전체주의론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미안하지만 히틀러 치하의 나찌 독일에서조차 극히 그 범위를 제한했지만 분명 그 체제는 사적 소유와 시장 원리 자체를 거부한 체제가 아니었다.

    “토니 클리프는 혁명적 정당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국가기구를 분쇄하지도 않았고,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도 없었던 그 나라들이 노동자 국가라면, 맑스주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물었다. 이것은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이라는 맑스주의의 정수에 비춰본 태도였다.” -전지윤의 글

    지난 글에서 이 어구만으로 모든 판단의 잣대를 삼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건만 그대로 반복하다니 주장의 근거가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가? 다함께의 모 조직이 극단적으로 왜곡하는 것과는 반대로, 제4인터내셔널이든 어떤 좌파든 모든 이들이 현실 사회주의 사회가 우리가 이상으로 삼은 사회가 아님은 물론이며, 이들 국가에서의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관료 집단 타도를 위한 정치적 혁명에 대해 지지를 보내 왔다.

    또한 그 누구보다 스탈린주의적으로 왜곡된 노동자 국가 체제의 이식에 대해 강한 비판을 해 왔다. 클리프가 현실 사회주의 사회에 더 독한 자세를 취하며 실현 불가능한, 전쟁을 내전으로 따위의 구호를 외치며 투쟁을 회피했을 때, 많은 좌파들은 이미 오래 전에 트로츠키가 소련에서 정치 혁명이 없으면 반동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주장에 따라 소련 체제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군사적 비판의 정신을 이어 왔다.

    하지만 좌파들은 이에 대한 기본적 이해도 없는 클리프 일파에 의해 이유 없는 무고를 뒤집어 써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과 해당 국가 혁명 조직들의 수준에서 혁명 정당을 만들지 못했다고, 노동자 계급이 제대로 형성되지도 않은 국가들에서 무조건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의 원칙만을 들이 대면서 그 잣대만을 가지고 다른 실질적 현상들을 다 사장한 채 아예 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것이 말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다함께 규정대로라면 베네수엘라는 국가자본주의

    그렇게 규정하는 위험성에 대해 내가 지적한 게 한 가지도 틀리지 않음을 전지윤이 너무도 빨리 보여 주어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그 원칙이 그렇게 타당하다면, 체제에 대항한 투쟁이 아닌, 이미 국가 권력을 접수한 베네수엘라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아예 처음부터 혁명으로 권력을 잡지도 않았고,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은커녕 도시 빈민 등을 기반으로 삼은 권력에다가 혁명 정당도 부재하며, 시장 체제를 포기할 생각도 없으며, 국가 기구를 분쇄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국가자본주의 체제인데 무엇을 망설이며 지지하고 있는가? (3편에 계속)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