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냉전 해체와 함께 온 남북의 위기
        2008년 01월 16일 04: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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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은 한반도에 분단을 극복할 어떠한 기회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전쟁의 가능성도 별로 없었고 행동준칙도 비교적 간단했다. 냉전의 첨단에 서 있는 한반도 양측에서는 모두 전국민 동원체제가 작동했고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생활수준이 보장되었다.

    하지만 냉전의 종식 후 곧 한국과 북한은 홀로 생존해야 한다는 현실에 부딪히게 되면서 국내적으로도 전국민 동원체제는 무너지고 한 사회 내에서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리게 되었다. 남과 북의 어려움은 다른 맥락에서 찾아왔다.

       
    ▲ 남한의 극우세력은 북한붕괴론을 유포하거나 혹은 기원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북한붕괴론의 붕괴로 드러났다. 사진은 반핵반김국민협의회의 2007 신년하례식 모습 (사진=뉴시스)
     

    남쪽의 어려움은 자유주의적 개혁을 통해 ‘세계화’란 이름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외환위기 후 10년, 적어도 지표상으로는 1인당 GDP 2만 달러 달성이 임박한 지금 위기는 종식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양극화와 중산층 해체라는 대세 속에 급격한 저출산이 20년 뒤 감당할 수 없는 고령화라는 어두운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반면 북쪽의 어려움은 냉전의 해체와 사회주의권의 변화라는 흐름을 거부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핵개발, 전쟁위기, 그리고 연이은 기아 사태는 전 세계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수십만 또는 수백만의 아사자를 발생시킨 20세기 후반 인류 최악의 비극을 발생시켰다. 이는 ‘배고픔의 평등’이 보장되지 않는 가운데 나타난 비극이었으며 기존의 북한 사회는 해체되었다.

    남에서는 환란, 북에서는 기아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90년 독일은 통일되었다. 루마니아의 차우체스크는 비참한 최후를 맞으며 무너졌다. 소련과 중국은 한국과 수교하였고 북한은 남북 유엔 동시가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북방 3각 동맹은 와해되었다. 91년 말 걸프전에서 이라크의 전력이 미군의 공습에 무너지는 것은 또 다른 충격을 주었다. 북한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고 경제적으로 외부 원조 중단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중국식 개방을 하기에는 체제상으로도 위협을 느꼈고 안보적으로도 불안을 느꼈다.

    한국의 공식적인 통일정책은 흡수통일을 부정하고 공존을 모색하며 교류 증진을 통해 긴장을 완화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일로 가는 빠른 길로 북한붕괴와 흡수통일에 대한 유혹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북한붕괴론은 대체로 이러한 논리를 가진다. ① 군사적으로 강하게 몰아붙이면 북한은 군사비 지출을 증가시킬 것이다. ② 이러한 과정에서 북한은 경제적으로 붕괴할 것이다. ③ 그러면 민중봉기나 쿠데타가 일어나 북한 체제는 붕괴할 것이다. ④ 이런 방향으로 가는 과정 속에 북한은 자살적인 대남 공격을 해 올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더욱 국방력 증가가 필요하다.

    원조가 급격히 줄어든 상황에서 남쪽과의 군비경쟁은 불가능했지만 개방이 체제의 위협을 초래할 수 있는 상황에서 북한은 핵 개발을 선택했다. 즉, 북한에서는 ①의 길을 갔다. 그러나 ④의 길을 가지는 않았다.

    북한은 선제공격을 하지 않고 핵을 개발하여 상대에게 공격을 할 것인가 협상을 할 것인가 선택을 강요했다. 북한이 핵을 개발한다고 해서 군사력의 공포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북한이 핵 또는 미사일을 개발한다고 해도 한국 및 일본이 같이 핵을 개발하거나 미국의 핵에 적극적으로 의존하는 경우 북한은 여전히 선제공격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북한이 러시아와 같이 확증파괴능력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의 핵무장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핵무기, 자살적 대남공격의 대체물

    하지만 북한에게 핵은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핵개발을 통해서만 미국과 협상할 수 있었고 한국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었다.

    핵 위기는 일단 타결되었지만 위기는 계속되었다. 김일성의 사망과 95년 홍수, 그리고 기아는 처절하게 붕괴된 북한 경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나리오 ②가 작동했고 북한붕괴에 대한 기대는 고조되었다.

    그러나 시나리오 ③ 민중봉기나 쿠데타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나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첫째 중국의 도움이 있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고학력 엔지니어가 헝가리 등 주변 동구국가를 통해 서독으로 넘어가면서 장벽의 의미가 무의미해지며 일어났다. 하지만 중국은 탈북자의 한국행을 허용하지 않았고 북한의 체제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식량 지원을 계속했다.

    기근이 진행되어 수십만의 탈북자가 중국에 체류했다고 추정된 95년~98년간 한국행 탈북자의 수는 100명이 넘지 않았다. 2002년 이후 탈북자의 수는 1,000명을 넘어섰다. 탈북자의 증가는 북한 체제 안정화의 반증이다.

    둘째, 적절한 긴장과 공포가 있었다. 미국과 한국에 대한 공포와 긴장, 동유럽 변화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아주 적은 자원만으로도 북한 체제는 유지되었고 지배층 사이에서 균열은 공멸을 초래한다는 인식에서였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결과론일 수도 있지만 남에서 5.16, 10.26, 12.12가 일어났기에 북한 지배집단 내 위기의식은 너무도 컸던 것 같다. 반면, 중국의 지원이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가 내분으로 멸망하는 식의 분열이 발생하기엔 위기의식의 정도가 약했다.

    그리고 설사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국가로서의 북한이 붕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북한은 중국에게 미국, 일본 세력의 대륙 진출을 막는 동시에 남한 중심의 한국 민족주의가 조선족 문제를 자극하는 것을 사전 차단하는 이중의 방파제인 것이다.

    정권이 무너져도 북한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정권이 교체된 이후에라도 북한이 백두산 및 압록강 두만강 국경을 획정한 조중변계조약, 그리고 전쟁시 자동개입을 규정한 조중상호원조조약의 당사자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북한붕괴론은 북한과의 진지한 교섭에 대한 강력한 비판 논리였다.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붕괴하고 외부 원조로 유지되는 체제가 핵개발 등 군사비 증강을 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 비난의 목소리는 강력하였다. 북한의 열악한 인권상황에 대한 비판도 이에 덧붙여졌다.

    하지만 북한은 붕괴하지 않았다. 1950년 10월에 그렇듯이 북한은 국가 자체가 없어지기에는 너무 중요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북한붕괴론은 한국에서는 다른 의미의 북진통일론이었다. 북진통일론이 그랬듯이 북한붕괴론은 북한을 자극해 상황을 악화시키고 긴장만 고조시킬 뿐 아무런 해결도 내놓지 못했다.

    북한붕괴론은 기아상태 해결을 지연해 희생자 수를 증가시켰고 이것이 다른 무엇보다 인권 상황 악화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97년 외환위기로 인해 한국경제가 생각보다 외부 충격에 취약하다는 것이 폭로됐고, 핵을 둘러싼 북한과의 대치나 급격한 붕괴에 따른 대량 탈북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북한붕괴론이 나오고 15년이 흐른 지금 한국과 미국 모두에서 북한붕괴론은 이제 힘을 잃어가고 있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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