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당 주체와 신당 주체는 달라야 한다
        2008년 01월 16일 03:2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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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동당의 와해 국면에서 "분당이냐, 동거냐" 에 관한 다양한 생각과 논의들이 제출되고 있다. 나는 이러한 다양한 주장들을 대충 4가지의 전략적 흐름으로 구분해 보고자 한다. 4가지란, 동거론의 두 가지 입장 즉 ‘침묵적 동거론’과 ‘전투적 동거론’, 그리고 분당론의 두 가지 입장 즉 ‘선택적 분당론’과 ‘파괴적 분당론’의 4가지를 지칭한다.

    1. 침묵적 동거론

    침묵적 동거론은 "첫째, 당을 포기할 수 없다. 따라서 주체주의자들과의 ‘동거’를 깨뜨려서는 안된다. 둘째, 정파간 대립과 투쟁도 밖으로 노출되지 않도록 부정해야 한다. 세째, 이로부터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는 ‘당 혁신’이라는 애매한 구호로 돌파한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주체주의자들이 야기시킨 여러 가지 당내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심지어는 정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편향으로 나타난다. ‘정파는 다 나쁜 것’이고 ‘정파는 없다’고 말한 것이 엊그제 일이다.

    또 이러한 침묵적 동거론은 ‘양비론’을 취했다. 즉 ‘주사파도 문제지만 좌파도 무능하다. 다를 바 없다’는 무대책의 입장을 통해 ‘분리해서 뭐하냐’ 는 회의주의적인 관점에 선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선거주의로 나타난다. ‘동거해야 한다’는 전략적 대전제 하에 모든 당 내부의 문제들을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상, 유일한 대안은 선거를 통해 당권을 잡는 것 뿐이었다. 결국 당권 탈환을 위한 ‘당내 선거’에만 집착하는 행태가 다년간 지속된다.

    이런 맥락의 ‘동거론’ 중에는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사실 이들은 실제로 당내 문제에 있어서 ‘주체파들과 투쟁은 하지 않고 1년 내내 당권 선거만 준비하는’ 선거주의에 집중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침묵적 동거론은 2007년 9월 권영길 후보가 자주파의 지지를 등에 업고 당내경선을 통과하자 급격히 무너진다. 즉 아무리 선거를 해도 당내 역학관계의 역전이 향후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가시화되자 그동안 침묵 속에서 선거용 조직 만들기에만 전념하던 그룹의 절반이 순식간에 ‘파괴적 분당론’으로 이탈해 버린 것이다.

    얼마 전 17명의 서울지역 출마자, 지역위원장들의 공동성명이 있었는데 이 입장 속에서 우리는 침묵적 동거론의 전형적인 화석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입장은 ‘선거가 코 앞인데 제발 잠자코 있으라’는 침묵에 관한 호소였다.

    그런데 침묵하는 동거론은 결정적인 오류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실물정치에 작용하는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만약 진정으로 동거를 원했다면 당내에서 더 심하게 분당을 주장해서 상대를 계속 압박하고 양보를 얻어냈어야 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정파등록제’의 쟁취를 목표로 했어야 했다.

    그러나 침묵적 동거론은 이런 인식이 없었다. 오늘의 상황을 보자. 분당론이 거세게 일어나자, 자주파는 자기들이 다수파임에도 불구하고 일제히 찌그러져 뒤로 후퇴했다. 지난 2년 동안 무던히 노력하고서도 번번히 실패했던 상황을 선거도 안하고 만들어낸 것이다.

    침묵적 동거론은 분당론을 잠재우거나 무시하는데 주력했을 뿐, 분당론을 당내 권력투쟁에 입체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알지 못했다. 침묵적 동거론은 이 지점에서 자신의 한계와 오류를 인식해야 할때가 왔다. (분당 압박을 통해 상대의 전폭적인 양보를 얻어내는 바로 이런 타협적 상황이 1년 전에만 발생했어도 당은 장기적 동거의 길에 접어들 수 있었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다.)

    2. 전투적 동거론

    같은 동거론이지만 침묵적 동거론과 달리 문제의 외부 노출을 두려워 하지 말고, 싸우면서 동거해야 한다는 전투적 동거론이 존재해왔다. 전투적 동거론은 일단 ‘당을 깨서는 안 된다’는 전략적 방침은 앞의 입장과 같다.

    그러나 침묵적 동거론과는 달리 주체주의자들과의 가열찬 투쟁이 오히려 기회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판단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입장 속에서는 분당론까지도 적을 압박하는 무기로 활용될 수 있었다. 마산에서 김정일 정권 반대 33인 선언을 주도했던 주대환 분회장이나 당원 게시판에서 탈당 대신 계속 잔류를 택하면서 싸우고 있는 민중시대 같은 분들이 따지자면 이런 전투적 동거론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전투적 동거론이란 얼핏보면 모순된 방침으로 보인다. 즉 ‘동거’라는 전략적 방침과 ‘사사건건 내부 투쟁’이라는 전술은 서로 충돌하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이 모순은 전투적 동거론이 갖고 있는 논리적 전제를 들여다 보면 조금 이해가 된다. 전투적 동거론은 첫째,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한 당이기 때문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근거지" 이며 둘째, 조직에서 밀린다 해도 명분과 입지를 십분 활용하면 당내 역학 관계를 충분히 역전시킬 수 있다.는 두가지 전제를 갖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전투적 동거론은 전략적 동거 대상과 맨날 투쟁하는 다소 모순된 방침을 지속해왔다. 심지어 일부 전투적 동거론은 권영길 선본에 소수파로 참여하면서도 오히려 권영길을 장악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제출했다.

    그런데 오늘 시점에서 "강한 권한을 가진 심상정 비대위의 등장은 현실적으로 이러한 전투적 동거론의 인식이 적중했음을 보여준다. 거대한 분당 협박이 발생하자 다수파가 소수파에게 당권을 내준 것이다.

    물론 한가지 문제는 있다 "과연 이런 체제가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민주노동당 좌파는 앞으로 무슨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계속 분당 협박을 하면 된다는 교훈을 얻었지만 다수파가 몇번이나 더 들어줄지는 모른다는 의문이 생긴 것이다.

    따라서 단 한번의 기회에 당 강령 개정을 포함해 모든 것을 얻지 못하면 전투적 동거론도 그 효용을 다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온 것으로 보인다.

    3. 선택적 분당론

    분당론의 최초 시작은 ‘선택적 분당론’이었다. 여기서 선택적이라는 것은 당장 분당하자는 것이 아니라 일단 ‘분당 에너지’를 키우는데 주력해서 언제라도 전술적으로 분당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자는 취지였다. 즉 언젠가 조승수 진보정치연구소 소장이 얘기했던 대로 "분당을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전투적 동거론과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민주노총의 외곽 지원 없이 당이 생존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선택적 동거론은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배타적 지지의 상대개념으로서) 복수 지지를 분당의 조건으로 생각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 위에서 선택적 분당론은 그동안 개별 탈당을 반대해왔다.

    이는 결과적으로 당장 분당이 힘들기 때문에 분당 자체 보다는 분당론이 갖고 있는 ‘협박 효과’를 증폭 시키는 양상을 띤다. 주체주의자들의 기본 목표가 무엇보다 ‘통일전선 전술의 구현’에 있기 때문에 좌파가 분당론을 제출하는 순간 통일전선전술이 무너지게 되고 따라서 분당론은 그 자체로 상대에게 커다란 협박 또는 압박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북한의 대남 전략을 총괄하는 부서의 이름은 노동당 통일전선부다)

    사실 선택적 분당론의 중요한 목표도 ‘정파등록제’의 쟁취였다. 정파등록제를 확보하면 당내 책임정치가 가능하고 당내 대중들에게 주체주의자들의 정체성을 폭로할 수 있으며, 여의치 않을 경우 조직된 정파 단위로 질서있는 분당을 쉽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전술적으로도 무척 중요한 고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당내 사민주의 그룹인 자율과 연대가 당대의원 대회등을 통해 ‘정파등록제’를 선전하면서 당내 만연된 이중장부 문제와 투명회계 문제를 제기하고, 주사파들과 꾸준히 대립해온 것은 이런 전략적 맥락을 포함 하는 의미로 간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선택적 분당론은 올해 12월 이 되기 전까지는 전투적 동거론과 거의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무조건 직면한 당내 권력 투쟁을 앞뒤가리지 않고 수행해야 한다는데 전혀 이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선택적 분당론은 ‘2007년 대선 후, 2008년 총선 전’ 이라는 절묘한 시기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지상명령 앞에서 ‘파괴적 분당론’으로 이전할 수 밖에 없는 조건을 맞이 한다.

    대선이 끝나고 반자본주의 진영의 정신적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평당원들의 대탈당 사태가 빚어지자 선택적 분당론은 이제 자칫하면 기회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발생했던 것이다.

    특히 심상정 비대위가 출범해 봉합의 기운이 높아진 상황에서 선택적 분당론을 고집하는 것은 분당 협박을 통해 다른 이익을 챙기려는 시도로 보일 수 있었다. 이것은 구리 당원들이 탈당 성명에서 제기한 ‘침몰하는 배에 남아 금고를 뒤지는’ 짓이 될 수 있었다.

    4. 파괴적 분당론

    파괴적 분당론은 선택적 분당론과 달리 분당을 전술적 선택이 아니라 당면한 전략적 과제로 본다. 그리고 ‘분당’과 ‘창당’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본다. 즉 분당의 목표는 기존의 당을 파괴하는 것이고 신당 창당 문제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추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파괴적 분당론이 볼 때는 개별 탈당도 그리 나쁘지 않다. 분당론은 ‘분당’까지만 생각한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첫째, 분당이 물리적 분당 이전에 소통 전략으로서의 분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서는 ‘총선’이라는 계기를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이 시기를 놓치면 향후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오지 않는다"고 본다.

    반드시 총선을 경유한 분당을 해야 분당의 의미를 대중에게 알릴 수 있다. 즉 선거를 통해 대중에게 당의 변신을 보여줄 수 있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잡을 수 있다. 사실 민주노동당도 2000년 총선 2달전에 창당한 것이다.

    따라서 파괴적 분당론의 입장에서 보면 2007년 12월 대선으로 민주노동당이 초상집이 된 지 불과 3달만에 다시 총선을 치러야 할 상황에 빠지고, 바로 그 중간에 ‘분당 선언’을 할 수 있게 된 바로 이 시기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시기가 된다.

    둘째, 선택적 분당론과 달리 파괴적 분당론은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 혹은 조직적 지지에 그리 목을 매지 않는다. 노동자 대중조직의 전폭적인 지지를 ‘진보정당의 필요충분 조건’으로 간주했던 것이 과거의 교과서적 견해였다면 이제 노동자 대중조직의 조직적 지지는 ‘필요 조건’ 정도로 그 의미가 퇴색했다고 본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민주노총이 일종의 정치조직화 되어 사실상 외부에 또하나의 ‘당’으로 인식되는 조건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고 노조단위의 줄 투표가 계속되어 사실상 노조 내부 소정파 단위의 블럭투표가 진행 중이라는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셋째, 파괴적 분당론은 낡은 건물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 일종의 재건축론에 입각해 있다. 즉 일단 낡은 진보정당을 최대한 깨뜨려야 새로운 진보신당이 최초의 입지구축에 나설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일부 논자들이 분당론을 반대하며 "나가면 두 쪽 모두 죽는다"라는 언급을 한 바 있는데 ‘파괴적 분당론’에 의하면 바로 이것은 걱정거리가 아니라 ‘목표’가 된다. 파괴적 분당론의 가장 큰 목표는 적의 보호막을 걷어내 햇볕 아래 고사시키는데 있다. 당연히 빈자리는 살아남은 자의 것이 된다. 나중에.

    5. 소통전략으로서의 분당

    분당에 대한 시기상조론자들은 작금의 분당 상황을 아직 대중들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호소한다. 즉 "당내 상황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던 활동가 층에서만 분당에 대한 동의가 있을 뿐 그 아래 단계로 내려가면 전혀 이런 공감대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혼란스러워 한다. 대중을 아직 설득하지 못했다. 기다려 달라" 고 말한다.

    그러나 분당이란 ‘물리적 분당’이 아니라 ‘소통 전략으로서의 분당’을 뜻한다. 거대한 분당론이 발생하면서 당의 매체 노출은 눈에 띠게 부피가 늘었다. 그리고 동시에 사람들의 염증과 한탄과 회의도 늘었다.이와 함께 궁금증도 늘었다. 대체 다들 왜그러는지?

    그런데 자세히 보자. 우리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형들이 데모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비슷한 생각을 했다. 저 미친놈들이 대체 왜 그러는지? 그것이 사회에 대한 내 관심의 시작이었다. 그 작은 관심의 시작은 어느덧 우리를 ‘운동’의 길로 인도했었다. 결국 그 시대의 데모는 대중과의 소통이었다.

    이제 당에 아무런 관심도 없이 당비나 내고 선거 때 되면 옆사람이 불러주던 번호를 줄줄이 찍고 나오던 당원들도 뭔가 관심과 궁금증을 갖게 될 것이다. 대부분은 욕도 하고 실망도 하겠지만 한쪽에서는 누군가 이 상황을 열심히 설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새로 뭔가 고민할 소재와 조건을 얻게된다.

    물리적으로 모든 계획과 준비를 마치고, 모든 대오를 다 정리해 놓고 분당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거라는 공간 속에서 분당을 통해 대중의 관심을 먼저 모으고 그 다음에 갈라진 지형을 설명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으로 우리 스스로를 밀어 넣어야 한다. 이것이 대중과의 대량 소통을 시작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분당과 창당은 다른 개념이다. 주체가 달라야 한다. 분당 주체가 고스란히 신당 주체로 되어 양자가 혼용되면 신당도 민주노동당2 로 보여지기 때문에 결국 해롭다. 민주노동당2 가 아니라 진보2.0 이라는 업그레이드 버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새는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온다. 물론 알이 깨지면 당장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실제로 알을 깨고 세상에 나가면 죽을 위험이 상존한다. 당연하다. 그러나 알을 파괴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예 새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다. 날개짓 한번 해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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