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소년의 불온한 선택을 기대한다
        2008년 01월 14일 08: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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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말하는 것처럼 90년대를 아동문학의 부흥기라고 한다면, 요즘은 가히 청소년문학의 부흥기 아니면 최소한 형성기라고 할 만하다. 청소년문학이 주목받기 시작하자 여러 출판사에서 앞을 다투어 청소년문학을 선보이고 있다.

    그런데 90년대 이른바 아동문학의 부흥기에 쏟아져 나온 작품들이 전부 훌륭한 작품들이 아니었듯이, 요즘 쏟아져 나오는 청소년문학들 역시 아직 부족한 구석이 많이 엿보인다. 청소년이라는 시기 자체가 청년도 아니고 소년도 아닌 어중간한 지점이듯이, 청소년문학 역시 성인문학도 아니고 아동문학도 아닌 어중간한 지점에서 길을 잃은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라일락 피면』(원종찬 엮음, 창비, 2007)은 바로 그 애매한 지점에서 청소년문학의 위치를 점검하고자 한 단편집이다. 아직 청소년문학 작가 집단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서 성인문학과 아동문학의 작가들이 본 단편집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현실은, 우리 청소년문학이 처한 어중간한 지점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겠다. 이 단편집에서 인상적이었던 단편소설 세 작품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첫 작품이자 본 단편집의 표제작인 「라일락 피면」은 전형적인 리얼리즘 소설이다. 공선옥이라는 작가의 힘이 느껴지는 이 작품은, 한 고등학생의 시선을 통하여 오월 광주 학살의 비극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첫사랑을 위해 총을 들다

    모든 대선 후보들이 망월동 묘역을 방문할 만큼, 광주는 더 이상 숨겨진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든 이들에게 불편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불편함을 거부하는 세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광주 학살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들려주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지만, 자칫하면 그들에게 광주 학살의 아픔에 대하여 생각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라일락 피면」의 주인공은 군사독재에 대한 분노보다는 첫사랑의 죽음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총을 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청소년들에게 막연한 거부감을 주는 것을 피하고 깊이 있는 공감으로 다가갈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작품은 첫사랑의 설렘이 시대의 비극에 휘말려 좌절된 뒤 주인공의 선택을 보여줌으로써 오늘날의 청소년들에게 광주 학살을 보다 극적으로 전달한다.

    최인석의 「쉰아홉 개의 이빨」은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재혼, 어머니와 재혼한 장 목사가 휘두르는 폭력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이빨’이라는 상징을 통하여 풀어나간 작품이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 윤장구는 사회주의자로서 노동조합을 이끌던 노동자였다.

    노동조합을 결성하다가 감옥에 다녀온 뒤에 그의 이빨은 마흔두 개로 늘어났고, 천 킬로미터 높이의 공장 굴뚝에서 보름 동안 농성을 하다가 일 년 육 개월의 징역생활을 하고 돌아온 뒤에는 이빨이 쉰아홉 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그렇게 거칠게 살았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주인공에게 손찌검을 한 적이 없었다. 반면에 어머니와 재혼한 장 목사는 주인공이 자신의 뜻에 따라 살아갈 것을 거부하자, 그를 사정없이 구타한다. 그런 주인공에게 장 목사의 아들 우석이 연고를 발라주며 자신 역시 지금껏 구타를 당해왔음을 고백한다.

    그때 우석은 주인공의 이빨을 세어 보는데, 주인공의 이빨이 마흔여섯 개로 늘어나 있었다. 결국 우석은 식사 전에 기도할 것을 거부한 뒤에 입대하고, 우석은 마침내 어머니와 장 목사의 집을 떠날 것을 선택한다.

    현실에서의 고난을 이겨낼 때마다 늘어나는 이빨은 역경을 딛고 일어나 성숙해가는 과정을 상징한다. 집을 나설 것을 선택하는 주인공의 미래는 불투명하고 불안하다. 그러나 그는 장 목사의 폭력을 거부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선택했다. 그의 아버지처럼 당당하게 현실을 이겨내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선택은 그를 더욱 성숙하게 하고,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아마도 그의 이빨은 앞으로 더욱 늘어나게 되리라.

    표영희의 「널 위해 준비했어」는 다분히 현대적인 감각에 충실하면서도, 껍질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웅크리고 있던 주인공이 껍질을 깨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주인공 빔은 학교에 가지 않을뿐더러 아예 집밖에 나가지 않는 대공(대인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일과는 하루 종일 방 안에서 컴퓨터로 영화를 보거나 대공을 가진 이들의 채팅방에서 앨리스, 사공, 패로디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것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빔의 어머니는 갑자기 오토바이 가운데 최고의 명품이라는 할리 데이비슨을 구입한다. 오토바이를 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던 어머니가 할리 데이비슨을 구입한 것을 못마땅해 하던 빔은 그것을 망가뜨리기 위해 모처럼 집 밖으로 나선다. 그러나 할리 데이비슨을 보는 순간, 그것을 망가뜨려야 하겠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머니의 할리 데이비슨

    그렇게 새봄이 오고 “꽃과 황사는 세트 메뉴처럼 잘 어울려”라는 기가 막힌 말을 할 줄 아는 앨리스는 빔에게 “우리 만날까?”라는 기가 막힌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빔은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를 보고 난 뒤에 영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자유로이 세상을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결국 어머니의 이해할 수 없었던 할리 데이비슨의 구입 덕분에 다시 세상으로 나서게 된다.

    영화와 채팅, 할리 데이비슨 같은 청소년들이 흥미를 느낄 법한 소재들을 자유로이 버무려, 대인공포증을 가지고 있던 아이들이 그것을 극복하고 세상으로 나서기를 선택한다는 내용이 많은 청소년들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하다. 새로운 소재와 표현 방식에 목말라 하던 청소년문학에서 이런 작품이 나오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지금까지 책에 수록된 단편소설 가운데 세 작품을 살펴보았다. 이 작품들을 포함하여 『라일락 피면』에 수록된 여덟 편의 단편들은 하나같이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장혜옥 전 전교조 위원장은 대한민국이 ‘열 살 무렵에 인생이 결정되는 나라’라고 말했다. 입시지옥의 무한경쟁에 내몰린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에게 기존 체제에 순응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청소년기의 선택이 앞으로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점에서 청소년과 선택은 “세트 메뉴처럼 잘 어울”린다고 하겠다.

    중요한 선택의 시기에 있는 청소년들이 『라일락 피면』을 읽으면서, 재미도 느끼고 고민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고민이 쌓여 가다 보면, 그들 스스로 기존 체제에 순응하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책을 엮은 원종찬 교수는 해설에서 문학을 “세상과 불화하면서 세상을 구원하는 불온한 산소”라 정의했다. 청소년들이 불온한 산소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언젠가는 입시 폐지와 대학 평준화를 주장하며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 수 있기를 다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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