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당은 진보진영을 우경화로 이끌 것
        2008년 01월 09일 12:28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대선 평가를 둘러싸고 패배의 책임과 원인을 둘러싸고 진보진영 내의 날선 논쟁이 민주노동당 분당 논란으로까지 번지며 무서운 기세로 불붙었다. 그런데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새삼스러운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민주노동당 내 정파 간의 해묵은 논쟁거리다. 대선의 참담한 패배가 이런 논쟁에 명분을 부여하며 기름을 부은 것에 불과하다.

    흔히 이런 정치적 견해와 노선의 차이를 둘러싼 논쟁에서는 무엇보다 과학적 접근과 이성적 태도를 강조하곤 하는데 도무지 이 싸움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냥 선입견과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어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이를 근거로 상대를 재단하거나 감정적인 언사로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 내는 데 열을 올리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 지난 7일, 민주노동당 시도위원장 연석회의 (사진=뉴시스)
     

    그렇다고 해서 논쟁의 당사자들에게 도덕적 비난을 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오랜 기간 쌓인 상처가 너무 크고 불신의 골이 너무 깊기 때문인 걸 어쩌랴.

    선입관에 근거한 도덕적 판단이 문제

    논쟁의 핵심 내용은 북한에 대한 견해, 태도와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연동되어 사업과 조직 활동에 있어서의 민주주의 문제다.

    평등파에서는 종북주의가 문제이며 당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자주파들이 이러한 내용의 자신들의 주장을 당 사업에 패권적으로 관철시키고 있다고 비난한다. 자주파에서는 북한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종북주의자는 당내에 없다고 하며 지금처럼 당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을 패권적이라고 한다면 평등파가 당의 지도부를 구성했을 때 역시 마찬가지라고 받아치고 있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은 북한 문제와 맞닥뜨리기만 하면 이상하게도 이 대단한 논객들이 이성의 힘을 상실해 버린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회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북한체제의 성격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정치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핵 문제 등 당면 실천 문제에 대해서도 오로지 도덕적 판단이 앞서버린다.

    그리고 그 판단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래서 김일성 부자는 항상 악마이거나 구세주 둘 중 하나이고 북한은 지옥 아니면 낙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주파 : 민족 문제 역사적, 사회적 시각에서 접근해야

    구체적인 사건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나마 살펴보자. 사실 독도 문제, 이주노동자문제, 황우석 문제 등을 둘러싸고 자주파들이 보여준 태도는 상당히 배타적 민족주의 입장에 있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물론 자주파가 모두 같은 견해를 가지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인 것은 아니다.

    어쨌든 자주파들의 이러한 견해는 민족문제와 관련한 북한의 견해와 많이 닮았다. 자주파들은 북한이 항일투쟁과 미국과의 대결이라는 특수한 조건 속에서 형성시킨 민족개념을 절대화시켜 적용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북한의 ‘민족’은 혈연적 동질성에 기반한 개념이다. 이러한 민족의식은 나름대로 외세와의 대결에서 민중들을 결속시켜 위력적인 힘을 발휘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민족개념은 결코 초역사적, 초사회적인 것이 아니다.

    사실 마르크스의 민족개념은 혈연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경제 공동체에 기반한 것이다. 유럽에 민족의식이 생긴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일로 겨우 근대민족 국가가 형성되고 난 뒤부터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진보에 있어서 민족이 계급이나 인류의 공통적 이해에 우선하는 상황은 오히려 제한적일 뿐이다.

    평등파 : 북한 문제에 대해 도덕적 비난에 앞서 합리적 접근을

    평등파는 북한 핵개발과 관련한 논란에서 자주파 지도부가 이에 대해 분명한 반대와 비판의 태도를 취하지 않고 유감만을 표명하는 등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고 비난한다.

    부시 정권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지속적으로 압박해왔다. 때로는 전쟁 가능성 이야기까지도 흘러나왔고 만약 미국이 중동에 매여 있지 않았다면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아무도 장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와중에 북한 핵개발 문제가 불거지자 네오콘은 물론 국내에서는 한나라당이 전쟁도 불사해야 된다고 난리를 치고 나섰다. 그런데 북한은 미국에 대해 한쪽으로는 미국이 원한다면 맞서겠다는 강경대응 태도를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핵무장을 하는 것은 미국의 북한 와해공작과 맞서기 위한 것일 뿐이며, 만약 미국이 그럴 의도가 없고 체제가 보장된다면 핵을 소유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계속 내비쳤다.

    실제로 미국이 중동정세의 악화로 발목 잡히면서 북한에 대해 태도 변화를 보이며 관계 정상화를 꾀하겠다고 하자 북한도 핵 불능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한 것이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이 문제의 본질을 미국의 대북 압박정책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규정짓고 북한 핵개발에 대해서는 한반도 비핵화 원칙 위배로 유감의 뜻을 표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는 북한정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가진 학자들 중 상당수도 북한 핵보유는 기본적으로 부시의 대북정책의 실패에 기인한 것으로 규정하고 미국에 대해 비판했고, 결국 미국이 정책변화를 꾀함으로써 이를 인정한 셈이다.

    그로 볼 때 당시 민주노동당의 입장은 매우 올바랐다고 말할 수 있다. 평등파 중 어떤 이는 유감만 표명하면 다냐고 이야기하는데 그렇다면 북한 핵 폐기를 위해 한나라당 같은 태도나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직접적 행동을 취했어야 했다는 것으로, 납득하기 매우 힘들다.

    ‘코리아 연방 공화국’ 구호, 문제 많으나 패배의 원인으로 규정은 곤란

    이번 대선에서 특히 논란거리가 된 것은 ‘코리아 연방 공화국 건설’ 구호이다. 첫째로 이 슬로건은 사람들에게 매우 생소할뿐더러 그것만으로 구체적으로 와 닿는 게 거의 없다. 혹여 이번 대선을 통해 꼭 그것을 선전하고 사람들에게 교육해야 될 그 무엇으로 의미를 둔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구상한 사람의 숭고한 뜻에도 불구하고 전혀 쓸모가 없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발상 자체도 문제다. 92년 대선 때의 구호 ‘일어나라 코리아’의 2탄 같은데 풀어 쓰면 아마 ‘세계 속에 웅비하는 영광스런 통일 조국 코리아’쯤 될 것 같다. 게다가 국내 선거용인데 ‘한반도 연방공화국’도 아니고 왜 또 ‘코리아 연방공화국’이어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전형적인 아류 제국주의적 발상이다.

    그래서인지 평등파에서는 바로 이 구호 때문에 선거에서 참패했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평가와 비판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정확히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다. ‘코리아 연방공화국’안은 나오자 말자 당장 당내에서부터 매우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현수막에도 내 걸리지 못했다

    선거기간 내에 주요하게 선전되지도 못했다. 실제로 그 이야기를 가지고 보통 사람들과 몇 번만 접촉하다 보면 머쓱해져서 입에 올리기가 썩 내키지 않게 될 것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거의 선거용으로 사용되지도 못한 코리아 연방공화국 구호 때문에 선거에 졌다고 하는 것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기 대단히 힘들다.

    이념 판단의 근거와 비판의 대상은 드러난 실천 활동에 대한 것이어야

    종북주의에 대해서 한 번 이야기해보자. 종북주의라는 말은 말 뜻 그대로 해석하면 맹목적으로 북한을 추종하는 이념 사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주체적인 사고와 판단 능력을 전혀 갖지 못했다는 것으로 속된 말로 북한과 ‘오야붕, 꼬붕’ 관계라는 말쯤 되겠다.

    우파 일각에서 진보진영을 비난할 때 쓰는 ‘친북파’ 라는 말보다 훨씬 심한 말로 사뭇 감정이 섞여 있다. 평등파에서는 이에 대해 심하든 어떻든 이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말한다.

    확실히 자주파들이 대체로 북한에 대해 우호적이고 또 얼마는 더욱 호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자주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속내를 다 알 수는 없는 것이지만, 어쨌든 드러내놓고 하는 주의 주장이 북한과 같지는 않다.

    특히 논란거리가 되는 선거와 관련한 입장에 대해서 말이다. 북한은 늘(근 20여 년 동안) 그랬듯이 이번 대선에서도 반한나라당 전선을 강조했다. 아마 북한은 체제유지를 위해 한반도에서 극우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가장 경계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남한에서도 통일운동을 하는 집단 중에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고 그들은 곧잘 민주노동당을 민주분열세력으로 비난해왔다. 이번 선거시기에는 문국현이 분열세력으로 주요 표적이 됐지만 말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내의 자주파 진영은 남한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와 이에 기초하여 민주노동당 후보를 지지하고 있다.

    이렇듯 사업 실천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종북주의 논란과 같은 것은 사상적 통일성을 존립의 근거로 하는 정파 집단 내에서는 의미 있는 것인지 몰라도 적어도 민주노동당의 틀 속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대중정당인 민주노동당 내에서의 비판의 대상은 머릿 속에 있을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해서가 아니라 실천 활동에 의해 확인되는 것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분당은 진보 진영 전체를 우경화로 이끌 가능성 커

    혹 분당이 된다면 그 이후의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자. 입장에 따라서 듣기에 불쾌할 수도 있겠지만 분당과 관련한 판단을 하는데 반드시 고려해야 할 지점일 것이기 때문에 생각 그대로 적어 본다.

    분당이 된다면 자주파, 평등파 모두 대중적 판단에 의해서 자신들의 주장과 노선의 정당성을 증명하고자 할 것이며 그 무대는 선거판이 될 것이다. 그것도 가능하면 단기간에 확인받고자 할 것이다. 그렇다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양쪽 모두 포퓰리즘에 기초한 우경화로 경도될 가능성이 크다.

    먼저 자주파 쪽을 보자. 어떻게 보면 자주파는 지금껏 그들을 옭아매고 있던 끈이 떨어졌으므로 사업이 통일지상주의로 끌려갈 것이고 대중적 관심과 요구에 걸맞지 않는 주장으로 급격하게 몰락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2002년 대선을 한 번 보자. 어쩌면 대중적 이익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월드컵 열풍이 정치인으로서는 별다른 능력과 영향력을 인정받지 못한 한 재벌 정치인, 정몽준을 일약 대통령자리에 오르게 할 뻔한 사건이 일어났었다.

    실제로 자주파 쪽도 대중적 인기를 좇아 국민들의 민족적 감정을 자극시킬 수 있는 이슈들을 부지런히 따라다니고 과격한 주장을 할 가능성이 크다. 독도 문제라든가 아니면 동북공정에 대한 대처 등등. 황우석 비슷한 사람이 영웅으로 뜰 수도 있을 것이다.

    평등파 쪽을 보자. 평등파 쪽은 무엇보다 또 한 번의 분열 가능성이 크다. 민족이나 통일문제에 관심이 적고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진다는 점에서는 일치점이 있으나 진보의 내용과 경로 방식에 있어서는 이들 내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는 게 분명하다.

    더구나 자주파가 통일단결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는 어지간한 명분 가지고는 분열이 쉽지 않지만 단결보다는 노선의 옳고 그름을 더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는 평등파 쪽은 이에 비해 분열 가능성이 훨씬 높다.

    분열이 되지 않는다면 경쟁구도에서 단기간에 성과를 거두며 살아남기 위해 우경화로 기울 가능성이 크다. 물론 우경화가 항상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정파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 해결 실마리

    분당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주로 분열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국민적 지지를 떨어뜨릴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에 분당을 통해 서로 발목 잡지 말고 자기의 주장을 가지고 경쟁하며 국민들의 심판을 통해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서로 발전할 수 있다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분열 그 자체에 대한 국민의 부정적 인식 이상으로 진보진영의 진보성이 희석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과거에는 어쨌든 발목을 잡음으로 해서 서로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통해 민족 문제와 계급 문제가 어느 한 쪽으로 과도한 편향으로 가는 것을 막았고, 상대를 비판할 때 진보성이 중요한 가늠자가 되었지만 분당 후에는 선거에서의 표가 그들 노선의 정당성을 판가름하는 가늠자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불신과 감정의 깊은 앙금을 숨기고 그냥 함께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아무리 대의를 내세우더라도 모두가 성인 군자들도 아니고 앙금의 뿌리가 그렇게 깊은데 당위성만 가지고 어떻게 상처를 쉽게 치유하고 함께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처와 정파간 논란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사람들이 중심을 잡아가는 것으로부터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그런 사람들이 중심을 잡고 외연을 확대해 가면 얼마 간의 이견과 논쟁의 불씨를 안고서도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과정을 통해서 80년대 이래로 지속되어 온 논점들의 구도를 바꿔 놓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한 기대일까?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