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차이
    2008년 01월 07일 05:2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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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권영길을 찍지 않은 이유」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김영진의 글은 우리 사회의 일반화된 ‘민족 신화’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였고, <레디앙> 독자 사이에서도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김영진의 글을 네 차례에 나누어 싣는다. 이 시리즈에서 김영진은 민족주의적 역사관 뿐 아니라 1980년대 이후 힘을 얻고 있는 수정주의적 역사관과도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국제정치를 연구하는 필자의 한국 현대사 서술이 매우 낯설기는 하지만, 좌우 양편으로부터 ‘세뇌’받은 우리의 역사의식에 작은 혼란이라도 불러일으켜, 스스로의 눈으로 역사와 현실을 관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① 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차이
② 김일성의 통일전쟁, 그 처절한 실패
③ 냉전의 해체, 그리고 한반도의 위기
④ 반전 반핵 양키 고 홈?

1945년 미국과 소련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다. 소련은 8월 11일 먼저 한반도에 들어와 북위 38도선에서 멈추었고 미국은 9월에 들어왔다.

외국 군대가 분할해 점령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점령지마다 별도의 국가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오스트리아는 4개국이 분할 점령했지만 분단체제가 형성되지 않았다. 구서독 지역은 미, 영, 불 3국이 점령했지만 한 개의 국가 서독이 성립했지 3개 국가가 생기기 않았다. 남북 분단은 분할한 외세의 의지이기도 했지만 또한 분단된 한반도 정치세력의 갈라섬이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과정에서 이니셔티브를 쥔 쪽은 소련이었다. 20세기 초, 러시아는 중국의 항구 뤼순과 다렌의 조차권과 남만주 철도의 운영권을 가지고 있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이 권리는 일본으로 넘어갔다.

이후 러시아는 동아시아에 개입하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실질적으로 히틀러를 패퇴시킨 스탈린은 유럽전쟁이 종결되어가던 1945년 2월 미, 영, 소 3개국 정상이 만난 얄타회담에서 국민당 정부를 승인하되 러일전쟁 이전 만주에서의 러시아 이권을 되찾겠다는 내용을 밀약하고 대일전 참전을 약속했다.

소련은 장개석 정부와 이런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소련은 8월 9일 대일전 참전을 선언하고 8월 11일 한반도 진공을 시작했으며, 8월 15일 만주와 한반도의 38선 이북을 점령하였다.

소련과 국민당 정부의 조약 체결로 중국공산당은 만주에서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소련군은 일본군 무장해제 후 얻은 무기를 공산군에게 넘겨주는 등 은밀하게 공산군을 지지하기는 했으나 표면적으로는 공산군을 지원하지 않았다.

46년 3월 소련군은 심양에서 철수했고 심양, 장춘 등 주요 요충지를 국민당 군대가 점령했다. 46년 여름 중국공산당은 열세에 몰렸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은 소련과 타협하여 자국의 이권을 외국에 내어줌으로써 민족주의의 명분을 잃었다.

소련, 일국일당 원칙을 부정하다

   
▲ ‘항일 전사 김일성 장군 및 소련군 환영 군중대회’ 1945년 10월 14일. 검은 양복 입은 이가 김일성.
 

반면, 한반도의 상황은 다르게 진행되었다. 소련은 분할 점령한 지역에 일국일당 원칙과 배치되게 조선공산당 분국을 설치하였다. 김일성은 이 분국의 책임자로 등장했고, 서울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은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1945년 12월, 신탁통치가 발표되고 조선의 대중들이 분노했을 때 김구는 이를 적극 비난하고 나서 일약 정국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반면 박헌영은 아무런 대중적 설득작업 없이 찬탁을 주장하고 나섰다.

북한에서는 조만식이 신탁통치를 완강히 거부하였고, 김일성과 소련이 조만식을 설득하였으나 그는 거부하였다. 결국 조만식은 북한 지역의 관직에서 사임하여 소련과 결별하였고 곧 이어 감금되었다. 그 결과 조선공산당, 그리고 한반도의 좌익은 민족주의의 명분을 잃었다.

북한은 1946년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북한혁명이라고 할 이 급격한 변화는 지주 집단이 38선 이남으로 떠남으로써 큰 유혈 없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때 지주 집단만이 떠난 것은 아니었다.

월남자는 약 100만 명으로 북한 인구의 1/10이었다. 떠난 사람들은 남쪽에서 강력한 반공주의 세력을 형성하였다. 38선 이북 혁명의 반작용으로 남쪽에서는 월남자로 인해 반공주의의 역량이 증가하고 38선 이남을 점령하고 있는 미국이 물리력으로 뒷받침을 하면서 좌익세력은 점차 기반을 잃었다. 남의 좌익세력의 상당수는 월북하여 북한 형성의 중요한 인적 기반이 되었다.

소련의 38선 이북 점령과 북한혁명이 38선 이남에서 우익의 강화를 가져온 반면, 만주에서는 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과거 중국공산당 소속으로 항일 유격활동을 한 경력이 있는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을 적극 지원하였다.

이로 인해 중국공산당 점령 지역의 주요 교통로가 끊겼을 때 북한은 북부 접경 지역을 전략적 교통로로 제공했으며 상당량의 전략물자를 제공했다. 46년 10월 만주의 중공군이 결정적 위기를 맞았을 때 북한은 후퇴하는 중공군에게 교통로를 제공하여 이를 바탕으로 중국공산당은 위기를 넘겼다.

중국공산당은 양자강을 건너고…

만주의 중국공산군은 47년 5월부터 공세를 취하여 48년 11월에는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고 이는 국공내전의 결정적 분기점이 되었다. 49년 2월 중국공산군은 베이징을 점령했다. 이제 양자강 도하가 문제가 되었고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을 우려해 반대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49년 4월 양자강을 건넜고 미군은 개입하지 않았다. 트루만 정부는 48년까지 상당한 양의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제공했지만 48년에 이르러서는 내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48년과 49년 미군의 중국 파병을 거부했다.

트루만 행정부는 의회에서 중국 자체의 문제점들로 인해 봉쇄정책이 실패했다고 설명했다. 중국공산당은 소련의 국익을 우선한 스탈린의 반대를 무릅쓰고 혁명에 성공했고 이미 상황이 결정된 상황에서 미국은 개입할 수 없었다.

혁명은 대체로 계급모순을 주장하며 조직화된 혁명세력이 민족주의의 명분을 획득해 절대다수 대중을 확보했을 때 성공한다. 일본이라는 외세에 대해 반대하는 민족주의가 팽배하고 외세가 일반적으로 지주 등 기득권 계층과 협력해 식민지배를 해 온 상황에서 일본이 패망한 상황은 좌익에게 대체로 유리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좌익을 표방하나 엄연히 자국 이익을 추구하는 새로운 외세인 소련의 등장 앞에서 협력의 파트너로서 소외된 중국공산당이 결과적으로 대중을 얻어 혁명에 성공한 반면, 적극적 협력에 나선 조선공산당은 신탁통치 국면에서 대중의 지지를 잃고 그 상황에서 물리력을 바탕으로 북한혁명을 단행하여 확실한 국가적 기반을 형성하고, 이는 역으로 남쪽에 우익의 기반을 강화시켰다.

결국 양쪽에 정부 수립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남쪽의 좌익은 여순 반란 사건 등 가능성 없는 봉기를 계속했고 스스로 자멸했다. 에치슨(당시의 미 국무장관. 편집자)의 말을 뒤집으면 ‘한국의 좌익은 스스로 실패했다.’

역사적, 인종적(또는 민족적) 전통을 공유하는 지역적 단위에서 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두 개의 국가가 성립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은 아니다. 1830년 7월 혁명 후 네덜란드로부터 벨기에가 분할 독립했고, 2차 대전 후 인도와 파키스탄이 각각 성립했고, 동구권 붕괴시 체크와 슬로바키아가 분할했다.

하지만 분단국가의 국가형성은 그러한 자기 완결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의 통일국가 형성을 기대하는 대중의 바람 속에서 분단국가 형성은 외부의 조건으로 강제된 불가피한 선택이며 통일국가 형성은 미완의 과제이다.

상대방은 정통성 없는 반란단체

양 국가는 서로 거울을 보듯 자국에 대한 외국세력의 지원은 무시하고 타방에 대한 외국세력의 지원으로 불가피하게 자국이 분단국가로 형성되었으며, 타방은 정통성이 없는 반란단체이며 타방을 지원하는 외세를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형성할 것을 주장한다.

   
▲ 1948년 봄, 남북회담 길에 오른 김구.
 

따라서 근대국가형성의 과제는 통일이 오기 전까지는 미완이며, 강력한 국가와 민족주의는 당연한 것으로 상정된다. 그러나 한 번 형성된 국가는 그 자체로 존재 이유를 가지며 통일이라는 과제를 생각할 때 분단국가는 스스로가 장애물이라는 모순에 빠진다.

결국 국가가 독점하지 못하는 통일 논의는 분단국가에 대한 위협이 된다. 따라서 타방을 군사적으로 극복하겠다는 직접적인 주장은 물론 기타 모든 통일 논의가 한반도 평화에 대한 잠재적 위협요소가 되는 논리적 모순이 분단체제에는 내재해 있다.

한민족(韓民族)이라는 단위에서 생각했을 때 분단체제의 형성은 분명 바람직스럽지 못한 상황이다. 누가 분단의 원흉인가? 왜 분단을 막지 못했는가? 분단을 막으려면 어떻게 했어야 했는가?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던지게 되는 질문들이다. 그러나 분단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여운형, 김규식, 그리고 48년 남북회담시의 김구 등을 이야기하지만, 테러와 암살이 일상적인 당시의 상황은 지금의 이라크 상황과 그리 다르지 않았고 중간파의 입지란 거의 없었다.

미국, 소련 등 외세는 각각 자국의 이익을 추구할 뿐이다. 그러나 한 외세에 의존해 다른 외세를 비난하는 것은 똑같은 반작용을 낳을 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자 외세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어야 했다.

하지만 강자만이 살아남은 정치의 영역에서 그런 평가는 너무도 안이한 이야기일 뿐이다. 한반도는 외세가 없었어도 내전 수준의 갈등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문제는 내전의 수행이 아니라 두 개의 국가 형성으로 나아갔을 때 그 분단을 받아들이지 않고, 분쟁은 내전일 뿐이라며 전쟁을 긍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는 통일로부터 거리를 두었을 때 확보되었다. 그러나 다른 분단국가가 통일이 되고 이번에는 한반도라는 생각이 퍼져갔을 때 그 내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언제나 한반도에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1949년 중국이 통일되었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1975년 베트남이 통일되었을 때 남북의 군비경쟁이 고조되었고, 1990년 독일이 통일되고 나선 북한 핵위기와 북한의 기아사태가 발생했다.

과연 평화를 해치지 않는 통일의 조건은 무엇인지, 평화 지향적 통일 또는 통일 지향적 평화가 가능한 것인지, 다시 북핵위기 해소와 평화체제 구축을 논의하는 지금 신중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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